요즘에는 좀 덜해진 것 같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음악 애호가는 뚜렷하게 두 부류로 나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레코드 음악을 주로 듣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음악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나뉜다는 말을 쓰는 것일까요? 두 가지가 다 좋은 것이 아닌가요? 뭐가 문제이고 어디에서 갈린다는 말인가요?
문제는 레코드를 열심히 듣는 사람은 방에 틀어박혀서 자신의 레코드만 파고, 음악회를 다니는 사람은 음반은 듣지않고 무대만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미에서도 전자를 ‘레코드 컬렉터recordcollector‘라고 부르고, 후자는 ‘콘서트 고어 concert goer‘라고 부릅니다. 물론 ‘오페라 고어opera goer‘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후자에 포함되겠지요. - P103

이렇게 음악회의 결과는 연주보다는 감상자의 자세와 마음가짐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악회는 연주자만 준비 - P118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상자도 마치 시험을 준비하듯이 음악회를 대비해야 합니다. 대단한 음악 애호가나 전공자 혹은 엄청난 지성인이 아니라면, 그렇게 세계적인 작곡가들이 만든 명곡을 아무런 준비 없이 처음 들어서 감동을 받을 것이라고생각하는 자체가 착각입니다. 청력이 좋다고 음악이 들리는 것이 아니랍니다. - P119

그리고 기억나는 것은 시민회관의 공연이 끝난 후에 어두운 조방 앞부산에서는 과거 조선방직공장이 있던 넓은 터를 조방 앞이라 불렀다밤길로 나오면, 한 달을 기다렸던 음악회가 끝나버렸다는 허허로운 마음과, 음악에서 받은 새로운 인상과, 오늘도 공부를안 했다는 걱정과, 그리고 가까운 부둣가 특유의 약간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는 조바심이 묘하게 얽힌 채 집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던 것입니다.
를 한 달에 한 번의 부산시향 정기연주회는 저의 사춘기를키운 커리큘럼이었습니다. 항상 프로그램 곡목을 미리 들으며예습했습니다. 나중에 서울로 올라와서도 KBS교향악단이나 서울시향의 연주회도 물론 그렇게 다녔습니다. 분명 서울악단들의 연주력이 더 좋았지만, 조방 앞 공터에 켜진 푸른 가로등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부두에서 불어오던 비릿한 바닷바람을 받으며 집으로 가던 기분과는 비교할 수 없었죠. - P123

콘서트와 레코드의 결합

음악회만 다니면 행복할 것 같지만, 결국은 레코드로 돌아오게 되는 것도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음악회라는 공간은 일회성과 즉흥성과 현장성에서 평생에 담아둘 인상적인 기억을 갖게 하지만, 대신에 늘 완벽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완벽보다는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음악회가 더 많다고 할 수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음악회임에도 반복으로 참여하는 경험을 통하여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서 음악이 가진 진정한 의미와 가치도 깨우쳐가게 되는 것입니다. - P124

음악회는 음반과는 달리 실제로 ‘시간의 예술‘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해줍니다. 한 번 지나면 그 음악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같은 곡목을 같은 연주가가 공연하더라도 이전의 연주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실제 공연은 단 한 번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음악회는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 P125

하지만 음악이라는 장르의 특징은 여기서 두드러지게 다릅니다. 즉 창작자와 감상자인 나 사이에는 재현이라는 과정, 즉 연주자가 있는 것입니다. 한 단계가 더 있는 것입니다. - P129

살롱 음악회의 가장 중요한 정의이자 개념은 살롱이라는 방에서 열린다는 점이 아니라, 음악회의 모든 비용을 주최자, 즉 살롱의 주인이 부담한다는 점입니다. 이 점만이 살롱 음악회의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의미이며 살롱 음악회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주최자인 주인은 작곡가나 연주자에게 금일봉을하사하여 후원의 형태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 역시 살롱 음악회의 기본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답하여 작곡가는 주인에게 자신이 새로 작곡한 작품을 선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헌정獻呈입니다. 많은 명곡들의 악보나 해설에 보면 ‘누구에게 헌정했다‘는 문장이 붙은 것을 볼 수 있지요. 나중에는헌정이 진정한 헌정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했지만, 원래 헌정이란 후원과 교환하는 가치였습니다. 여기에 와인이나 음료나사교 등은 전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 P145

그래서 주최 측에서는 극장을 잡아서 (처음에는 빌려서)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예술의전당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공公 음악회‘ 또는 ‘공개公開 음악회’의 탄생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것을 처음 촉발시킨 스타가 바로 베토벤이었습니다. 슈퍼스타 베토벤의 등장은 공공 음악회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당시에는 이런 한 작곡가를 중심으로 하는 음악회를 ‘아카데미Akademie‘라고 불렀습니다. - P151

청중은 음악회에서 연주될 곡목을 예습해가야 합니다. 이 한 줄의 문장은 음악회에 임하는 가장 중요한 선제 조건입니다. 그리고 음악회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음악회의 기본 사항이며, 음악회의 사전에 이루어져야 하는 필수 사항입니다. 이런 생활이 쌓인다면 우리의 공연문화는 분명 멋지게 발전할 것입니다. - P171

음악회의 중요한 덕목은 시민의 교양을 높이는 데에 일조한다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교양의 기본은 스스로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남이 떠먹여주는 지식을 섭취하는 것이 교양이 아니라, 무엇을 찾고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탐색하는 것이 교양입니다. 그런 점에서요즘 성행하는 해설 음악회의 부작용을 고민해야 합니다. - P173

이제 클래식 감상이라는 행위는 다만 듣는 것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인식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클래식 감상의 특징이자, 클래식의 어려운 점이며, 또한 동시에 클래식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공부는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 진짜일 것입니다. 누가 제시하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진정한 공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 P174

이렇게 클래식을 감상한다는 것은 단순한 듣기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와 나아가 인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점점 진정한 공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일단 클래식 감상이라는 배를 타면 그 배는 여러분을 태우고 광활한 인문적 지식의 망망대해로 나아갈 것입니다.
클래식 감상은 실로 신나는 공부이며, 여러분은 큰 공부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축하드릴 일이지요. 이제 클래식이아름답게만 들리는 감각의 즐거움 너머로 진정한 지적 즐거움도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 P176

그렇다면 얘기가 나온 김에 박수는 언제 치는 것이 좋을까요? 꼭 치고 싶다면 두 가지 타이밍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휘자나 연주자가 인사를 할 때 치십시오. 가장 안전하고 무난하며, 예의에 맞는 타이밍입니다. 사실 그때 치는 것이 맞는 때입니다. 그런데 인사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처럼 연주자가 아예 보이지 않거나, 무대 앞으로나오지 않는 공연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50번째로 치십시오. 그러면 실수할 리가 없습니다. 그 공연장에서 50명쯤이 박수를 친 다음에 친다는 마음이라면, 실수도 없고, 선동도 아니고, 진정으로 자신의 칭찬을 표현하는 셈입니다. 박수는 천천히쳐도 늦지 않습니다. - P181

콩쿠르를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세계 최고’를 겨루는 대회인 양 여기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콩쿠르는 ‘젊은 음악가들의 등용문‘일 뿐입니다. 그러니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우승 - P189

자가 세계에서 가장 연주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그는 직업 연주가의 길고 긴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만 처음부터 월드클래스의 대접을 받으면서 시작하게 되기는 하겠지요. - P190

음악회에 간다고 해서 다 훌륭하거나 멋진 청중인 것은 아닙니다. 음악회의 문화를 역행시키는 가짜 청중은 많습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열 가지를 골라봤습니다.

첫째로 집에서 음악은 듣지 않으면서, 연주회만 찾아서 다니는 사람입니다. 클래식 음악은 한 번 들어서 느낄 수 있는 음악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그는 음악가이거나 상당한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최소한 집에서 그 곡을 5회에서 10회 정도는 듣고 음악회에 가야만, 작곡가의 의도나 연주의 개성이나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서 음악을 전혀 듣지 않고 심지어는 무슨 곡이 연주되는지도 모르는 채로 음악회만 다닌다면 그들이야말로 대표적인 가짜 청중이며, 연주장의 분위기를 망치는 존재들입니다. - P193

일곱째로 음악이 아니라 연주자를 보러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지금 공연계에 만연한 문제입니다. 곡목과 관계없이 연주자를 따라서 음악회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공연을 보러 간다는 사람에게 "무슨 공연을 보러 가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백건우 들으러 가"라고 말합니다. "정명훈이 지휘해"라고 대답합니다. 네, 다 좋습니다. 하지만 음악회의 본질은 좀 다르죠. 유럽 사람들은 "나 저녁에 브람스를 들으러 가" 내지는 "저녁에 말러를 만날 생각하니 벌써 들떠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다음에 연주자나 악단을 말해야죠. - P196

외국의 오케스트라에서 이런 말이 돌고 있습니다. 유럽사람들은 레퍼토리를 보고 음악회를 찾고, 일본 사람은 지휘자를 보고 찾으며, 한국 사람은 협연자를 보고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미성숙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가 내한 공연을 할 때는 한국에서의 프로그램은 쉽고 대중적인 곡으로 바꾸고, 협연자도 한국에 잘 알려진 사람이나 한국인으로 바꾼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부끄러운일입니다. 이제 우리도 작곡가와 곡목을 보고 음악회를 선택하는 성숙한 음악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P197

그러므로 클래식을 감상한다는 것은 위대한 사상을 배우는 인문 공부입니다. 음악을 듣다 보면 그 음악과 관련된 인문적인 흥미가 생기게 되며, 또한 음악을 통하여 다양한 인문 분야에 대한 더욱 깊고 넓은 공부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음악을 들으면서도 오직 음악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이 되는 역사, 사회, 지리, 문학, 미술, 사상 등의 공부도 함께 해보면서 들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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