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인트 존 리버스가 순결하게 살아왔고 양심적이고 열정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부서진 우상과 잃어버린 낙원에 대해 남모르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근래에는 될 수 있는대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건만, 내게 달라붙어 무자비하게 나를 괴롭히는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아직 하느님의 평화를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 P227

"그래서요?" 그가 다시 말을 끊자 내가 말했다. "말씀을 계속하세요." - P230

"못마땅한 게 있으신가요, 리버스 씨?" 내가 물었다.
"당신은 모턴에 오래 안 있을 거요, 아마 그럴 거요."
"아이참! 왜 그런 말씀을 하시죠?"
"당신의 눈을 보고 알았지요. 당신의 눈은 평온한 인생을 계속해 나가는 것에 만족할 눈이 아닙니다.
"전 야심가가 아녜요."
‘야심가‘라는 말에 그는 찔끔 놀랐다.
"야심가. 물론 아니겠죠. 그런데 어째서 야심이란 것을 생각하셨죠? 누가 야심가입니까? 내가 야심가입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전 저 자신의 이야기를 한 거예요." - P233

이러한 남루한 옷차림의 농부의자식들도 인간으로서는 좋은 가문의 자제 못지않은 것을 가지고 있으며, 날 때 타고나는 훌륭한 소질이나 세련이나 지성이나 고운 마음씨의 싹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 못지않게 이아이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잊어서는 안 되었다. 나의 의무는 이러한 싹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 의무를 다하는 데 나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내 앞에 열려 있는 이 생활에 많은 기쁨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지만, 마음만 바로 가지고 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다면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보람쯤은 있을 것이다. - P240

그러나 이런 기분을 느꼈다고 나 자신을 지나치게 미워하거나 경멸하지는 말자. 나는 그게 나쁜 줄을 안다. 그것만 해도 큰 발전이다. 그런 기분을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내일이면 일부는 극복할 수있으리라. 그리고 몇 주일이 지나면 그러한 기분은 아주 없어지고, 몇 달이 지나면 나의 학생들의 진보와 향상의 모습을보는 기쁨이 혐오 대신에 만족을 줄 수 있게 되리라. - P241

그리고 마음속 깊이 그녀를 찬미했다. 자연은 특별히 그녀의 편이 되어 그녀를 만든 것이었다. 보통 때는 계모처럼 인색한 선물이나 하는 자연이, 이 특별히귀여워하는 여인에게는 할머니와 같은 너그러운 심정으로 아낌없이 은혜를 베푼 것이었다. - P248

"그리고 심부름할 애로 앨리스 우드를 고른 건 어때요?"
"아주 좋은 애를 골라 주셨어요. 말 잘 듣고 쓸모 있는 아이예요." ‘그럼 이 여자가 천부의 미모와 함께 재산까지 타고난 상속자 올리버 양이로구나! 이 여자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데 얼마나 많은 행운의 별들이 결합했을까?‘ 나는 생각했다. - P249

그는 테이블 위에 신간의 책을 한 권 올려놓았다. 시집이었다. 근대 문학의 황금 시대였던 그 무렵의 행운의 독자에게 자주 주어졌던 순수한 작품 중의 하나였다. 아! 슬프게도 현대의 독자는 그때만큼 혜택을 못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운을 내자! 비난이나 불평을 말하기 위해서 쉬어서는 안 된다. 시는 죽지 않았다는 것, 천재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부귀도 그 양자를 속박하고 살해할 힘이 없으며, 언젠가 다시 시와 천재는 그 생명을, 존재를, 그 자유와 힘을 주장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쉬고있는 시와 천재의 힘찬 천사들이여! 미천한 혼이 승리를 구가하고 가냘픈 혼이 자신의 파멸을 통곡할 때에 그들은 미소 짓는다. 시는 멸망했는가? 천재는 추방되었는가? 아니다. 범부들이여, 그런 게 아니다. 질투심이 그런 생각을 일으키게 하지마라. 아니, 시와 천재는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권력을 쥐고 지위를 회복하리라. 그리고 온 세상에 그 신성한 힘이 충만치 않고서는 너희는 지옥에서, 자신의 비천함이라는 지옥에서 살리라. - P262

우선 나는 말했다. "의자에 앉으세요, 리버스 씨."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랬듯 곧 가야 된다고 대답했다. ‘좋아요.‘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서 계시고 싶으면 서 계시죠. 하지만 아직 당신을 돌려보내 드리지는 못하겠어요. 고독이란 최소한내게 해로운 만큼은 당신에게도 해로운 거예요. 나는 당신의비밀의 원천을 찾아보고, 그 대리석과 같은 가슴에 동정의 향유를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릴 수 있는 틈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볼 작정이에요.
"이 초상화, 닮았어요?" 내가 불쑥 물었다. - P263

그러나 조용한 냉혹성이 이상스러이 무섭게 느껴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위엄은 있지만 탁 트이지 못한 이마와 밝고 깊고 무엇을 찾아내려는 것 같지만 부드러움이라고는 전혀느낄 수 없는 두 눈과, 키가 크고 당당한 체격을 바라보면서, 그의 아내가 되어 있을 자신을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아아!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그의 부목사로서라면, 그의 동료로서라면 문제가 없었다. 그런 자격에서라면 그와 더불어 대양도건널 수 있고, 그런 직책이라면 그와 더불어 동방의 태양 아래아시아의 사막에서도 일할 수 있었다. 그의 용기와 헌신과 활력을 보고 경탄하고, 나도 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그의 지배에 얌전히 순응하고, 그의 뿌리 깊은 야심에 의연히 미소를 보이고, 그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일면과 인간으로서의 일면을 구별하고, 전자를 깊이 존경하고 후자를 너그러이 용서하기도 하리라. 물론 이러한 자격만으로 그에게 소속되어 있다면 고통을 받는 일도 많으리라. 그러나 내 몸은 가혹한 멍에를 지고있을망정 내 마음과 혼은 자유로우리라. 때에 따라 의지할 수 있는, 아직은 시들지 않은 자아가 있고, 외로운 때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아무 데도 예속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감정을 유지할 수도 있으리라. - P334

그동안에 나의 청을 잘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만약에 당신이 거절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을 거절하는 것임을 잊지 마세요. 하느님은 나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숭고한 생애를 당신에게 열어 주시려는 겁니다. 나의 아내로서만이 당신은 그리로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내 아내가 되기를 거절한다면, 그건 영원히 이기적인 안일과 불모의 어둠 속에 당신 자신을 가둬 놓는 일입니다. 그런 경우, 신앙을 거부한 자들 중의 하나로 꼽히고, 이교도만도 못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 P337

이런 것이 모두 나에게는 고문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세련된 고문이었다. 그것은 분노의 불길을 끈질기게 타게 하고 비탄으로 인한 몸부림을 지속시켜 나를 괴롭히고 짓밟아 버렸다. 내가 만약 그의 아내였더라면, 햇빛도 비치지 않는 깊은 샘물처럼 순결한 이 착한 사나이가 나의 혈관에서 피 한 방울흘리지 않고, 수정같이 맑은 그의 양심에는 눈곱만 한 죄의식도 없이 금방 나를 죽여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 P341

"그 문제는 직접 오라버니께 여쭈어보시면 되겠는데요. 벌써 몇 번이나 말씀하셨어요, 저와 함께 가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직무라고요. 저는 또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시더군요.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제가 만약 사랑을위해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결혼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아녜요. 자기를 쓸모 있는 연장으로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한평생 매어져 있다는 것은 우스운 일 아니겠어요, 다이애나?" - P351

"확신만 선다면 결심을 할 수 있어요." 내가 대답했다.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만 납득이 되면, 지금 이 자리에서 결혼의 맹세를 할 수 있어요. 나중에는 어떻게 되든!"
"나의 기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세인트 존이 소리쳤다. 그는 마치 나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이라도 하듯이 나의 머리를 힘주어 손으로 눌렀다. 그리고 다른 한쪽 팔로는 사랑 같은 것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안았다.(나는 ‘사랑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 차이를 안다. 왜냐하면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때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애정은 문제로 하지도 않고 의무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구름이 용틀임하는 내 마음속의 몽롱한 환영과 싸우고 있었다. 나는 옳은 일을 하기를 진지하게, 진심으로 열렬하게 원했다. 그 생각뿐이었다. "가르쳐 주소서, 나의 갈 길을 가르쳐 주소서." 나는 하느님께 간구했다. 나는 그때까지의 어느 때보다도 흥분해 있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이 과연 흥분의 결과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독자가 판단해 주리라. - P357

왜냐하면 그는 조금도 고통스러운 치욕감이나 기가 죽는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이런 봉사를 당당히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내가 시중을 들어주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고, 또 내가 자기를 진심으로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나의 시중을 받는 것을 나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P4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