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술이란 것은 참 유용한 것이군. 산술의 도움이 없다면 선생의 나이는 짐작도 못 했을 거요. 선생의 경우처럼 얼굴 생김과 표정이 딴판인 경우엔 나이를 맞히기가 어렵단 말이오. 그럼 로우드에서는 무엇을 배웠소? 피아노는 칠 수 있소?" - P221

"어디에서 베껴 낸 거요?"
"머리로 생각해 낸 것입니다."
"지금 그 어깨 위에 얹혀 있는 그 머리에서?"
"네."
"그럼 그 머릿속엔 지금도 이 비슷한 딴것이 들어 있단 말이오?"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더 나은 것이 있다고나 할까요." - P223

이 파리한 초승달은 ‘왕관의 형국‘이었고 그것을 얹어 놓고 있는 것은 ‘자태 없는 자태‘13)였다.
"이 그림들을 그릴 때에는 행복했소?" 한참 만에 로체스터씨가 물었다.
"열중해 있었어요. 네, 행복했습니다. 요컨대 이 그림을 그릴 때는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중에서는 제일 큰 즐거움을느꼈습니다."
"그랬겠지. 자신의 얘기를 들어 보면 즐거움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지냈다니까. 아마 이렇게 기묘한 빛깔을 섞고 칠하고 할 때엔 일종의 예술가의 꿈나라에서 지낸 셈이었겠지요.

13) 밀턴의 실낙원』에서 인용했다. - P225

그러나 부지중에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아니요."
"어이구, 한 대 맞았는데. 아무래도 보통 사람과 다른 데가 있어요." 그가 말했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늘 양탄자 위로 내리깔고 (지금의 경우처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걸 뺀다면) 앉아 있을 때엔 꼭 조용하고 엄숙하고 별스러운 어린 수녀 같아. 그러나 누가 질문을 한다든가, 꼭 대답을 해야 할 말을 건넨다든가 할 적엔 숨김없이 단호한 대답을 한단 말이오. 퉁명스럽지는 않지만 매정한 대답을 어떻게된 거요?"
"죄송해요. 너무 생각나는 대로 얘기했어요. 용모에 관한 질문에 즉석에서 대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든가, 기호란 사람마다 다르다든가, 잘생기고 못생기고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든가, 이런 식으로 대답을 했어야 하는 것인데요." . - P235

"자, 어때요? 내가 바보처럼 생겼소?"
"천만에요. 대신 인정이란 것을 아시느냐 되묻는다면 제가 무례하다고 말씀하시겠지요?"
"또!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체하고 또 칼을 대는군. 어린이나 노부인과 같이 어울리기가 싫다고 했더니(가만있어, 들릴라!) 이렇게 들이대는군. 아가씨, 나는 흔히 말하는 박애주의자가 아니지만 양심은 가지고 있소."라고 하면서 그는 양심적인 성격을 나타낸다고 하는 이마의 불쑥 나온 곳을 가리켰다. - P236

‘술이 확실히 과하셨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기묘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내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아주 난처해진 모양이군. 내가 미남이 아닌 것처럼 아가씨도 미인은 아니지만 그 난처한 표정은 아주 어울리는군요. 게다가 그러는 게 내게도 편리하단 말이오. 꿰뚫어 보는 듯한 눈길이 내 얼굴을 떠나 양탄자의 꽃무늬를 관찰하느라고 바빠지니까 계속 그러고 있어요. 아가씨, 오늘 밤에는 나도 사람이 그립고 얘기가 하고 싶으니까." - P237

"조심하세요. 그건 참다운 천사가 아니에요."
"다시 물어보는 거지만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오? 대체 어떤 직관을 근거로 해서 지옥의 구렁으로 떨어진 천사와 신의 옥좌로부터의 사자(使者)를 구별할 수 있는 거요? 길잡이와 유혹자를 말이오?" - P245

귀염을 받으면 버릇없이 굴면서 마구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 대기가 일쑤였지만 나는 그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에게서 이어받은 것이겠지만 영국 기질과는 맞지 않는 천박한 성격이 그 점에 나타나 있었다. - P261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방을 나서면서 내가 말했다.
그는 놀란 표정이었다. 나보고 방으로 가 보라고 이르고서는 놀란 표정이니 정말 앞뒤가 맞지 않는 노릇이었다.
"뭐요! 벌써 나를 두고 간단 말이오? 그렇게 거침없이?"
"가도 좋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지만 인사를 하기도 전에 가보라고는 하지 않았소. 나에게서 한두 마디 호의나 감사의 말은 듣고 가야 할 것 아니오! 그렇게 냉랭하게 가는 수가 있소! 아가씨는 내 생명을 구해 주었소! 끔찍하고 괴로운 죽음에서 나를 건져 내 준 것이오. 그런데도 우리가 전혀 생면부지의 사이인 것처럼 그렇게허술하게 나가는 수가 어디 있소? 최소한 악수라도 합시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도 손을 내밀었다. 처음엔 내 손을 한 손으로 잡더니 나중에는 두 손으로 잡는 것이었다. - P271

여기까지 나의 추측이 다다랐을 때에 그레이스 풀의 펑퍼짐하고 납작한 몸매와 단정치 못하고 꺼칠하며 약하기까지 한 얼굴 모양이 선연하게 내 눈에 떠올랐다. 부지중에 ‘아니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속삭이는 비밀의 목소리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너도 예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로체스터씨는 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어쨌든 너는 그가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간밤에는 어땠는가? 그의 말을 상기해 보라. 그리고 표정을 상기해 보라.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 P281

나는 번갈아 가며 그를 노엽게 하고 달래는 즐거움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가장 주된 즐거움의 하나였고 과오를 모르는 직관력이 도를 넘는 것을 막고 있었다. 한 발짝 더 가면 그를 노엽게 한다는 선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질 않았다.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내 솜씨를 시험해 보는 것이 좋았다. 온갖 사소한 존경의형식을 지키면서 또 나의 지위에 걸맞은 예의를 지키면서 나는 불안한 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와 토론을 나눌 수가 있었다. 그것이 내 성미에도 로체스터 씨의 성미에도 맞았던 것이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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