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비밀스러운 마음의 상처
<교수>의 학생

역시 읽은지 얼마되지 않아 기억이 생생하니 몰입도 잘 되고 이해도 좀 잘 되는 듯? 그런데, 샬럿 브론테의 다른 소설보다 화자와 작가가 신중하게 구분되었나?


9장 앞에 나오는 실비아 플라스의 무화과 나무에 관한 글을 읽다가 어제 읽은 무화과 요리에 관한 글이 생각남. ㅎㅎ 우리가 먹는 무화과가 과일이 아니라 사실 꽃이라니!

무화과(無花果)는 '꽃이 없는 과일'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지만,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데서 많은 꽃을 피우고 있어요. 열매처럼 생긴 껍질이 꽃받침이며, 그 속에 융털처럼 보이는 빨간 부분 하나하나가 모두 꽃이랍니다. 바로 우리가 과일이라 생각하고 먹는 부분이지요. 무화과 특유의 작은 알갱이가 씹히는 식감은 무수한 꽃들이 만들어 내는 하모니라고 할 수 있어요. 엄밀히 따지면 무화과는 과일이 아니에요. 우리는 무화과 꽃을 먹고 있는 거지요.

- 김수향의 제철 담은 병절임, 개똥이네 집, 202호(2022년 9월)



나는 눈앞에서 나의 인생이 이야기 속 초록빛 무화과나무처럼 가지를 뻗어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모든 가지 끝에서, 통통한 자줏빛 무화과처럼, 찬란한 미래가 손짓하며 윙크했다. 어떤 무화과는 남편이고 행복한 가정과 아이들이었다.
어떤 무화과는 유명한 시인이었고, 다른 무화과는 뛰어난 교수였으며, 어떤 무화과는 에제, 그 대단한 편집자였다. […]
어떤 무화과를 선택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나는 나 자신이 무화과 나무 등치에 앉아서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 그리고 내가 결정하지 못하고 거기 그대로 앉아 있자 무화과들은 쭈그러들더니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땅으로, 내 발치에 툭 하고 떨어졌다.
- 실비아 플라스 - P557

브론테의 어휘와 상상력 대부분은 그녀가 몰두했던 19세기 초의 작가들(워즈워스, 콜리지, 스콧, 바이런)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그녀가 무아지경이 될정도로 빠져서 썼던 반복적인 주제와 은유는 우선 자신의 젠더에 의해, 즉 험난한 자신의 성적 운명에대한 의식과 세계 속에 처한 이상한 ‘고아 같은‘ 위치에 대한 불안에 의해 결정된 것 같으니 말이다. - P559

이런 점에서 브론테의 작업은 19세기 많은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집과 ‘여성의‘ 역할에 갇힌 채 느끼는 감정에 대해, 그리고 그런 집과 역할에서 도망치고 싶은 자신들의 열렬한 욕망에 대해 강박적으로 글을 썼던 방식, 대개 (은유적으로) ‘무아지경‘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글 쓰는 방식의 모범을 제공한다. - P561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샬럿은 천국과 지옥, 천사와 괴물이라는 이분법에 대해 에밀리보다 훨씬 더 모순되는 모습을 보인다. - P561

표면적으로 보면 샬럿 브론테는 ‘바이런을 덮고, 괴테를 펼치라‘는 칼라일의 충고를 따라 자신의 수정 충동을 철저하게 수정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샬럿의 소설 네 권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자신의 괴테와 자신의 바이런을 어느 정도 동시에 읽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P562

우리가 살펴보았듯 남성이 지배하는 문학적 전통에서 글을 쓰는 많은 여자들은 처음에는 남성을 모방할 뿐 아니라 은유적 남성으로 분장함으로써 자신들의 모호한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 P565

여자가 남성 사회에서 상속권이 없는 고아 신세이듯, 크림즈워스도 ‘상업의 바닷가에서 난파당해 좌초된‘ [4장] 여자처럼 무력하다. 이런 무력감은 샬럿 브론테 자신이 일찍이 경제적인 독립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을때 느낀 심정과 같다. - P570

‘기숙학교! 그 단어는 나를 뒤숭숭하리만치 흥분시켰다. 그것은 억압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7장] 그 단어는 확실히 크림즈워스 자신보다 크림즈워스의 창조자에게 훨씬 더 큰 억압을 의미했을 것이다. 사실상 크림즈워스의 브뤼셀 시절 직업에 초점을 맞춘 『교수』의 중요한 중반부에서 브론테는 2년 동안 굉장히 고통스럽게 갇혀 지냈던 기숙사의 좁은 여자의 세계를 점검하기 위해 그를 일종의 렌즈로 사용한다. - P572

여자란 무엇인가? 브론테가 의식적으로 이 문제에 천착하고 있지는 않긴 해도, 크림즈워스라는 도구를 통해 그녀는 여자란자주성이 없고 ‘정신적으로 타락한‘ 피조물로, 천사이기보다 노예이고 꽃보다 동물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크림즈워스/브론테는 암시하지 않을지라도)이 작품이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여자가 그렇게 되는 것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그런 존재가 되는것이 그녀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거짓말하기, ‘점수를 얻을 수 있을 때 정중하게 말하기‘, 소문 퍼뜨리기, 뒤에서 험담하기, 새롱거리기, 추파 던지기. 이 모든 것은 결국 노예의 특성, 즉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복종하지 않는 방식, 남자의 권력을 회피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또한 도덕적으로 ‘괴물적인‘ 특성이며, 따라서 다시 한번 천사 같은 여자의 외관 뒤에 괴물-여자가 나타난다. 브론테가 『제인 에어』에서 검토한 천사와 괴물의 연관성에 비추어보면, 『교수』에서 여성 괴물/노예의 특징에 지나치게 공포심을 품고 반응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 P575

그뿐만 아니라 조라이드가 겸손하다고 가정되지 않는 모든 것에 반감을 갖는다는 것은 젊은 스위스계 영국인 레이스 수선가 프랜시스 앙리를 사악한 계모처럼 대하는 데서 강하게 표현된다. 이 소설에서 프랜시스의 진정한 본성만이 여성성에 대한 남성의 이상화를 모순적이거나 거슬리는 방식으로 깨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 P578

『교수』는 크림즈워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프랜시스 앙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이 이 두 인물의 생애는 마치 각각이 서로를 반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병치되어 있다. 윌리엄처럼 프랜시스도 가난한 고아에 가톨릭 국가의 프로테스탄트이며, 물질주의 사회에서 이상주의자로 살아가며, 자수성가한 인물로 남자 교수와 동등한 지위라 할 수 있는 전문가인 ‘여자 교장‘이다. 한편 이 둘의 인격 차이는 유사성만큼 중요하다. - P578

이 비우호적인 우정은 무엇 때문인가? 왜 브론테는 『교수』의 시작과 결말에서 그들의 우정을 극화시키는가? 헌스든의 빈정거림과 (처음에 나타나는) 크림즈워스의 빈정거림 사이, 헌스든의 반항성과 (나중에 나타나는) 프랜시스나 빅터의 반항성 사이에 점점 뚜렷한 유사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해답에 가까운 무언가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헌스든은 『교수』에서 불만이 많은 사람처럼 보인다. 헌스든은 (찰스 웰즐리, 자모르나, 또는 노생거랜드의 공작처럼) 샬럿 브론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의 무의식적인 이미지다. 그의 이름 헌스든 요크 헌스든은 기존의 제도를 전복하려는 야만적 의지뿐만 아니라 프랜시스 앙리와 크림즈워스가 되돌아가고자 열망하는 ‘어머니의 나라‘ 영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한다. 헌스든은 분노로 가득한 ‘터의 기운‘이기도 하면서 어딘가 양성적인 인물이다. - P591

어떤 의미에서 헌스든은 반항의 목소리이기도 하지만 플롯의 조종자이자 위장한 화자이고, 줄거리를 나가야 할 방향으로 진행시키며 일어나는 사건을 논평하는 자다. - P592

그 사건은 이야기를 진전시키기보다는 브론테의 상징성을 명료하게 밝히는 역할을 한다. 크림즈워스는 개를 죽이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개가 나타내는 것을 죽이고 싶어한다. 이제 완전한 가부장이자 교수가 된 그는 요크 헌스든과 개 요크를 그의 삶에 있어서 병들고 광적인 요소로 보는 것이다. - P594

이 작품은 샬럿 브론테의 작가 전체 이력에 걸쳐 점점 중요해질 주제를 처음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은유적으로 눈을 감은 채 글을 쓴 브론테는 여기에서 자신의 소명과 상처를 탐색했고, 완전성을 향한 다른 길을 발견하려고 마치 꿈속에서처럼 더듬거리며 노력했다. - P5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