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은 우리가 쓴 시를 하나하나 읽어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요.
"부용이 쓴 시는 임금님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 있어 훌륭하고, 비취가 쓴 시는 은근한 멋이 있어 좋고, 소옥이 쓴 시는 술술 읽히다가 끝에 가서 묘한 맛을 내고, 자란이 쓴 시에는 깊은 뜻이들어 있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고 나서 덧붙였습니다.
"나머지 시도 다 잘되었는데, 운영이 쓴 시만은 뭔가 쓸쓸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들어 있구나. 그게 누구인지 알아내어 벌을 주어야 하겠지만, 글재주를 보아 오늘은 그냥 넘어가겠다."
저는 얼른 엎드려 울면서 아뢰었습니다. - P30

"시를 쓰다 보니 어쩌다 그런 말이 나온 것이지, 결코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대군마마 의심을 받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대군이 저더러 일어나 앉으라 하고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글이란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어서, 억지로 숨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 일에 대해 다시 말하지 마라."
그러고는 우리에게 상으로 비단 한 필씩을 내려 주었습니다. - P31

그날 밤, 평소 저와 가깝게 지내던 자란이 가만히 제게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어. 네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정말로 있는지 모르지만, 네 낯빛이 날로 야위고 핼쑥해져 가니 걱정되어 묻는 거야. 나한테숨기지 말고 말해 줄래?"
저는 눈물을 머금고 말했습니다.
"궁 안에 사람이 많아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 말을 못 했지만, 네가 진심으로 묻는데 어떻게 더 숨기겠니? 다 말해 줄게."
그날 밤, 자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지요. - P34

제 편지가 그리워하는 마음을 덜어 주기는커녕 점점 더 짙어지게 했으니, 제가 진사님께 죄를 지은 셈입니다. 아무튼 진사님은그날 밤 안에 답장을 써서, 제가 그랬던 것처럼 비단조각에 고이싸서 품에 간직하였다지요. 하지만 또한 전해 줄 기회를 얻지 못하여 애만 태울 뿐이었답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마음속에 사무치면 병이 되나 봅니다. 진사님도 저도 똑같은 병에 걸린 것입니다. 잠도 못자고 음식도 못 먹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며 속만 태우는 병이요. 그러다 보니 몸은 날로 야위어 가고 얼굴은 핏기 없이해쓱해졌지요. 우리 둘 다 그랬답니다.
어떻습니까, 진사님? 그때 일이 생각나나요? - P47

꿈결처럼 한 번 눈길을 주고받은 뒤로, 마음은 들뜨고 넋은 떠나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날마다 궁궐을 바라보며 수없이 애를 태웠습니다. 어느날 뜻밖에도 벽 틈사이로 전해 준 옥같이 고운 글을 받아 보고는, 잊지 못할 그 목소리 귓가에 맴돌아 펴 보기도전에 먼저 목이 메었습니다. 가슴이 아려 와 절반도 채 못읽고눈물이 글자를 다 적셨습니다.
누워도 잠을 못 이루고 먹어도 음식이 넘어가지 않으니, 뼛속마다 병이 맺혀 백 가지 약도 듣지를 않습니다. 죽어서나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하루빨리 저세상에 가기가 소원입니다. 만약에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신령님이 도우셔서 살아생 - P51

전 한번 만나 맺힌 원을 풀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몸을 가루로만들고 뼈를 갈아서라도 천지신명께 바치겠습니다.
붓을 들고 종이에 글자를 써 내려가는 이 순간에도 자꾸만 목이 메니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예를 갖추지 못하고 서둘러 적습니다. - P52

여태 가만히 있던 보련도 나섰습니다.
"누구든지 말은 함부로 하지 말고 삼가야 한다고 들었는데, 지금까지하는 말을 들어 보니 그게 아닌 것같네. 자란의 말은 속뜻을 숨기고다 드러내지 않은 것 같고, 소옥의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 같지않고, 부용의 말은 애써 갖다붙인 것 같아서 모두 참되게 들리지 않아. 나는 이번 일에서 빠질 테야." - P62

"오늘 일은 그저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랐는데, 비경이 저렇게 우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괴롭구나."
하자, 비경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지낼 때 나는 운영과 단짝이 되어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맹세했어. 이제 남궁 서궁으로 서로 떨어져 살게 됐지만, 그렇다고 옛 맹세를 저버릴 수 있겠니? 이왕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다 말할게. 전에 운영이 나날이 야위고 핼쑥해질 때만 해도 영문을 몰랐는데, 이제 보니 그게 다 그리움 때문인 것 같아. 이대로 두면 운영은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 얘들아, 내가간곡히 빌 테니 우리가 운영을 도와주자. 자란이 이번에 소격서로 가자고 한 뜻을 나는 이미 짐작했단다. 자란이야말로 운영의 진정한 벗이라는 것도알았지. 우리가 다투다가 끝내 궁을못 나가면 운영이 어떻게 되겠니? 운영이 병들어 죽기라도 한다면 모든 원망은 남궁에 있는 우리에게 돌아올 텐데, 그래도 괜찮겠니? 이제 모두 고집을 거두고, 우리가 힘을 모아 줄을 목숨 하나 살려 보자꾸나." - P64

하지만 여자로 태어나 궁녀가 되었으니 그 재주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제가 만약에 남자로 태어났다면, 가진 재주를 마음껏 펼쳐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나라를 위해서도 큰일을 할 수 있었을것입니다. 그런데 기껏 궁녀가 되어 감옥같은 궁궐 안에서 죄인처럼 갇혀 지내다가, 끝내 여기서 말라죽을 운명이니 어찌 슬프지않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한이 맺히고 원망이 머리끝에 차오릅니다.
그래서 방에 앉아 수를 놓다가도 수들을 던져 버리고, 등불 아래 비단을 짜다가도 천을 찢어 버리고, 거울 보며 머리를 매만지다가도 옥비녀를 빼내어 꺾어 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어쩌다 술한잔 마시고 뜰을 거닐다가도 돌 틈에 핀 꽃을 뜯어 버리고, 길섶에 난 풀을 뽑아 버리곤 했지요. 마치 미친 사람처럼요. 제 마음속에 깊이 맺힌 한을 억누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 P72

그 말을 들은 소옥과 비경이 눈물을 흘리며,
"한 사람 마음이 곧 열 사람 마음이고, 운영 마음이 곧 우리 마음이야.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서로 도우며 살자."
하고는 남궁으로 돌아갔습니다. - P77

그 말을 들은 김 진사가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해.
"우리 두 사람은 죽은 뒤 저승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저승 시왕*께서 저희 둘 다 죄 없이 일찍 죽은 것을 불쌍히 여겨 다시 인간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사양했습니다. 또다시 그 한 많은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세상은 아직도 사람을 차별하고 억누르며, 죄 아닌것을 죄로 만듭니다. 또 일삼아 남을 해코지하고 자기 욕심만채우는 나쁜 사람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오늘 밤 여기 와서 슬픔에 잠긴 것은, 그때 겪은 서러운 일이 다시 생각나서일 뿐입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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