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비숍,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한번은 너무 답답해 통번역대학원 동기 K에게 하소연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언니가 텍스트를 너무 사랑하나봐. 원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잖아" 하는 말을, 배꼽을 잡고 깔깔 웃는 토끼 이모티콘과 함께 보내왔습니다. 사랑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K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만 넘길 수도 없었습니다. 텍스트를 너무 사랑해서 번역이 갈팡질팡하는 역자. 너무 잘하고 싶어서 자꾸만 꼬이는 해석. 저는 K의 말을 혼자만의 변명으로 삼으며 기나긴 겨울을 한권의 책과 함께 동굴에서 보냈습니다. 어느새 마감일이 왔고 2000매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3월이었습니다. - P9

그러다가 앞의 문단을 만났고 이상한 환기를 경험했습니다. 단호하고 냉철하고 때로는 신랄한 문장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적이고 솔직한 고백을 담고 있었으니까요. 저자가 드물게 내비친 사담을 향해 저속한 호기심이 발동했던 걸까요?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하기엔 그 문단이 가시처럼 뇌리에 박혀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루 목표랑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불면과 싸울 때면 간혹 가본 적도 없는 그 고속도로 언저리를 더듬었습니다. 혼자 상상하고 짐작했습니다.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어떤 식으로 서로 ‘이해받고’ 있다고 느꼈는지, 미치도록 알고 싶었습니다. - P15

두 사람의 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에이드리언리치는 ‘자기 이야기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처럼‘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밝히지 않았죠. 실제로 리치는 그 어느 허구보다 극적이었던 그 ‘사건‘에 대해, 그후 세 아들과 함께 그 경험을 어떻게 헤쳐나갔는지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거라곤 모든 것이 시작되는 3월 봄밤에 두 여성 시인이 돌이키기 싫었을 지난날의 상실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뿐입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자살로 잃고 그 일로 세간의 비난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했던 공통의 경험이 두 사람 사이의 어떤 차이를 훌쩍뛰어넘게 했겠지요. - P17

싱숭생숭하고 불안한 이 마음의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내가 오늘 하루 8만원을 주고 구입한 것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일까 헤아려보기도 했습니다. 시간인 줄 알았는데 시간만은 아니었고, 안도감일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게 주어진 시간을 고스란히 계단참에 흘려보내고 있었고, 안도감은커녕 막연한 불안감으로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습니다. - P47

"어르신, 죽으려거든 날 좋을 때 죽어요. 이런 염천에는 죽지 말아요. 이런 날 죽으면 자식들 고생합니다. 부디 볕도 좋고 바람도 좋은 날 죽어요. 그래야 자식들이 덜 서럽습니다. 알았지요? 꼭 좋은 날에 죽어요. 우리 어머니처럼 염천에 죽어 자식 가슴에 한을 심지 말아요." - P77

양쪽 집에 이런 우리 부부의 뜻을 분명히 전달했는데도 제 부모는 여전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병원에 가보라고 충고했고, 시아버지는 아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저와 세진의 눈치를 봤습니다. 제 부모의 폭력적인 방식은 화가 났고, 시아버지의 수동적인 방식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를 만났다가 아이 말이 나오면 집에 돌아와 꼭 세진과 다투게 되었습니다. 아이 이야기는 지치지도 않고 나왔습니다. 친척 누가, 혹은 이웃의 누가 손주를 봤다더라, 돌잔치를 한다더라. 출산율이 곤두박질친다더니 우리 주변 어디에선가 끝없이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시아버지의 방식은 좀 치사한 데가 있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아기 이야기를 꺼내놓고 갑자기 제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어버리거나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습니다. 그러면 저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용서를 받는 더러운 기분이 들고 말았습니다. - P91

영옥씨처럼 이 건물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만아는 은밀한 통로를 지나온 모양이었습니다. 영옥씨가 저를 난간 옆 불룩하게 튀어나온 턱에 앉혔습니다. 옥상 공기는 텁텁하고 습했습니다. 영옥씨가 실외기 더미를 덮은작은 지붕 구조물 틈에 손을 집어넣더니 담뱃갑을 하나꺼냈습니다. 그리고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여 제게 내밀고 연달아 두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담배 한대를 피웠습니다. 어느 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고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을터뜨렸습니다. 저는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로 웃었습니다. 절대로 웃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렇게 웃고 나니 조금 힘이 나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옥상에서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 P105

소변기를 침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려놓고 시아버지의 바지춤을 제자리로 올렸습니다. 이제 시아버지는 모든걸 체념한 사람처럼 제게 완전히 몸을 기대고 있었습니다. 저는 행여 시아버지를 놓칠세라 한껏 힘을 주며 버텼습니다. 그때 제 귀에 들려온 소리는 분명 착각도 환청도아니었습니다.
죽어라…… 죽어……… 콱………
이 이야기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습니다. 세진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제겐 그 무참함을 표현할 언어가 없습니다. - P113

시아버지는 그해 겨울에 죽었습니다. 어떤 죽음이었는지는 여기에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죽음이 세진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제게도 깨끗이 지우는게 불가능한 어떤 감정을 안겨주었다고만 말하겠습니다. - P115

우체국으로 들어가 국제우편을 보낼 수 있는 우표를 샀습니다. 그날 산 엽서 중 가장 예쁜 엽서를 한장 꺼냈습니다. 기억 속의 라일락색 명함에 적혀 있던 간병인 파견업체 이름을 휴대폰으로 검색해 찾은 주소를 수신인란에 썼습니다. 엽서가 영옥씨에게 전달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지만 어쩌면 그 희박한 가능성 때문에 벌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신인란에는 제 이름을 적었지만 사실 영옥씨에게 제 이름을 알려준 기억도 없습니다. 유리병에 쪽지를 넣어 태평양에 던지는 것만큼이나 치기 어린 행위였지만, 제 마음만은절대로 우습지 않았습니다. 내용 칸에 볼펜을 대고 잠시 망설였습니다. 일단 영옥씨,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또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문장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한 문장을 쓰고 밖으로 나와 우체통에 엽서를 집어넣었습니다.
"영옥씨, 아침에 잘 일어나고 있나요?"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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