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고소인)는 피해자를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뒤 대대적으로 떠든다. 그러나 실제 고소장에는 ‘사실적시‘로 판명 나더라도 처벌 의사가 있다고 적거나, 수사기관에서 가해자에게 ‘사실적시‘로도 처벌할 것이냐고 물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답한다. 그러면 피해자는 고소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해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을 피하더라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는 처벌받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 다시 말해,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가해자들은 이를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기소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데, 피해자(피고소인)들은 이에 대해 대응할 여력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죄가 되는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식의 대응조차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247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보복성 고소를 당한 피해자의 고통은 어떠할까? 나는 2010년 성폭력 피해를 고소한 뒤 수년간 가해자로부터 여덟 가지 정도 보복성 고소를 당했다. 당시만 해도 성폭력 피해를 고소한 뒤 보복성 고소를 당하면, 성폭력 사건의 수사 중에도 피의자로 나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피해자인 내가 가해자의 왜곡·과장된 주장이 담긴 고소장을 앞에 두고 조사받아야 하는 상황 자체가 너무 모멸적이었고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대다수 피해자는 보복성 고소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면 큰 충격을 받는다. 피해를 떠올리는 것 자체도 고통스러운데, 수사관 앞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언급하며 심지어 자신이 가해자가 아님을 입증해야 하는 과정은 견디기 어렵다. - P250

물론 2015년 이후 SNS 등을 통한 피해 폭로와 신고·고소가 활발해지면서 가해자 쪽의 보복성 고소와 관련해 피의자/피고인(피해자) 조사 시기를 늦추거나, 보복성 고소를 무고로 인지하고 양형 등에 반영하는 사례도 생겼다. 이처럼.사법 시스템이 어느 정도 달라졌음에도여전히 가해자들은 보복성 고소를 멈추지 않는다. 고소 목적 중 하나는 말 그대로 피해자를 괴롭히기 위한 ‘보복’에 있으며, 그 방법은 여전히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고 김기덕 사건만 하더라도 2017년 시작된 폭로와 관련된 재판이 2021년까지 이어지지 않았는가. 보복성 고소는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진행하는 가해자의 악질적인 전략이다. - P251

사법 시스템은 냉혹하고 건조하다. 시간과 비용, 일상과 건강 모두를 갈아 넣어야 한다. 보복성 고소 자체를 막을 수 없다면 이러한 고소와 관련해 피해자가 추가로 받을 고통을 헤아리고, 적극적으로 무고로인지하며, 판결에서 엄벌 이유로도 더 많이 반영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현 시스템에서 보복성 고소는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상황임을 피해자가 이해하고 대비하도록 더 많은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며, 전문가의 조력도 필요하다. 사법시스템에서 가해자의 전략은 늘 한발 앞서기 마련이지만, 피해자도 충분한 정보와 조력이 뒷받침된다면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싸울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피해자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물론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폐지 등 입법적 변화도 뒤따르면 좋을 것이다. - P251

성폭력 가해자들은 가해 수법도 공유하고 학습한다. 이를 통해 가해행위를 정당화하고 죄책감을 덜어낸다. 온전한 판단능력이 있는 수평적 관계의 상대에게 성관계에 대한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동의를구하기보다는, 억울하게 성범죄자로 몰리지 않는 팁을 공유하는 것이 그들의 문화다. 강력하고 명확한 거부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여성이 문제라고 생각하며, 여성이 거부의사를 전달해도 내심은 다를 것이라고 판단한다. 아니,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거래 가능한 대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애초 여성의 의사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거부 의사를 표명하는 여성들을 짓밟는 쾌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 P254

무혐의·무죄 전략에서는, ‘위법수집증거‘를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없다는 형사사법 절차의 원칙도 적극 활용한다. 게다가 2022년부터는 검찰에서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이하 ‘피신조서)도 경찰의 피신조서와 마찬가지로 피고인이 부인하면 증거능력이 없다는 점도 한 발 앞서 적극적으로 악용하고 있다. 그래서 수사 과정에서 일부 혐의를 자백해 부실수사를 끌어낸 후 재판에 들어가면 피신조서 내용을 부인해 다시 유무죄 다투기, 강압수사를 들먹여 피신조서 내용을 부인해(예: "수사관이 강압적으로 수사해서 자백 취지의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유무죄 다투기, 수사 과정에서 증거수집이 위법했다는 절차적 문제를 짚어 다시 유무죄 다투기 등의 전략을 공유한다. 실제 재판에서도 이러한 전략이 관철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더욱이 2021년 검경수사권 조정, 2022년 형사소송법·검찰청법 개정 등으로 검찰의 보완수사 등에 제한이 생기면서 수사 단계부터 가해자들이 빠져나갈 구멍이더 생겼다. 물적 증거가 없거나 불충분한 성범죄 재판에서는 특히 유죄 입증을 위한 공판의 중요성이 더 커질텐데, 경찰이나 공판검사, 그리고 재판부는 기존의 관행을 벗어나 충실한 심리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 P257

성범죄자들의 자살 소식이 언론을 타고 퍼진다. 성범죄 혐의를 받는 정도도 견디지 못해서, 살아서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생을 마감하는 가해자들을 보면 안간힘을 써서 버티고 있거나, 버티다 못해 죽음으로 몰려간 피해자들의 고통이 떠오른다. 가해자들은그 정도로도 삶을 포기할 수 있구나. 그렇다면 성폭력 피해를 입고 시간, 말, 자리를 박탈당한 피해자들은 어땠을까. 게다가 가해자가 자살하면 이 사회는 피해자에게 문제 해결을 포기하고 피해 사실을 망각하라고 강요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뭘 더 바라냐는 거다. 심지어 가해자자살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면서 추가 가해를 이어나간다. 죽음에 관대한 문화이기 때문일까? 아니, 죽음조차 피해자와 가해자는 불공평하다. 피해자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다. 혹은 다른 이유로 포장되거나, 다른 가해자들에게 유희거리로 소비된다. 반면 성폭력 가해자들은 죽어서도 피해자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용서를 받고 추앙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피해자‘로 명명되기도 한다. - P260

‘지적장애녀‘, ‘성폭행 주장녀‘, ‘미투녀’, ‘몰카’, ‘음란물’.
2021년 1월, 성폭력 사건을 다룬 한 기사의 제목에 들어간 단어들이다. 성폭력 사건의 보도에서 이제 ‘ㅇㅇ녀‘ 표현 지양하기와 ‘몰카’ 대신 ‘불법촬영’으로 지칭하기, ‘음란물‘ 대신 ‘성착취물’로 표현하기는 합의된 원칙으로 생각했으나, 기대가 너무 컸다. 이렇게 퇴행하는 모습을 볼 때면 ‘기레기‘(‘기자‘와 ‘쓰레기‘를 합친 말)라는 멸칭을 언론이기꺼이 뒤집어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 P262

연대를 내세워 피해자에게 사적 만남을 강요하는 행태 역시 많이 목격했다. 연대 과정에서 피해 경험과 관련된 자료를 얻은 연대자가 이를 이용해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내 연대 원칙 중 하나는 피해자와 사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것이지만, 일부 연대자는 오히려 자신의 위치를 악용한다. 스토킹을 하면서도 피해자의 안전을 위한 연대활동의 일환인 것처럼 우기기도 하고, 자신이 요구하는 사적 만남 또는 관심에 대해 피해자가 거부하거나 자제를 요청하면 연대하지 않을 것처럼 말한다. 단 한 명의 힘이라도 더 필요한 피해자의 입장에서는연대자의 이런 요구에 적극적인 거부 의사를 표명하기 어려워진다. 실제로 피해자가 자신의 관심을 거부했다는 이유를 들어 연대 활동을 중단한 연대자도 있었다. 그는 연대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피해자의 사생활과 관련된 허위사실도 유포했는데, 나는 피해자가 그를 고소해 형사처벌을 받도록 하는 과정에 연대한 경험도 있다. - P279

마지막으로, 비상연락망을 구축해 위급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 긴 시간 싸움을 하는 피해자들은 순간적으로 약해질 때가 있으며, 그때 자살·자해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비상연락망을 통해 피해자의 상태·상황을 살피고, 위급 상황인 경우 외부기관의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자. 피해자의 삶과 생명을 연대자가 전적으로 책임질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최대한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법대로‘가 만능의, 최선의 선택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사법 시스템을 이용해 싸우길 선택한다면, 그럼에도 당신이 피해자와 함께 싸우길 선택한다면,
혼자 싸우지 말자.
혼자 싸우게 두지 말자. - P292

군 바깥 가해자들의 전략이 되다
이런 사례들이 쌓이면서 성범죄 가해자들 사이에서는 군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이에 민간인 신분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20~30대 남성 피고인들은 전략적으로 입대를 선택하기도 한다.
수사와 재판을 군에서 받으면 민간인 신분일 때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실제 통계로 뒷받침된다. 게다가 입대하면 피고인에 대한 외부의 관심이 줄어드는 효과까지 있어, 어차피 가야 할 군대를 십분 활용하려는 것이다. 2023년 2월 출소를 앞둔 아이돌 그룹 빅뱅의 전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 32세, 남)의 경우, 민간에서 수사를 받던 도중에 입대했고, 결국 군사법원에서 아홉 가지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1심에서 군검찰은 징역 5년을 구형했지만 보통군사법원은 징역3년을 선고했고, 1심에서 공소사실을 부인하다가 2심에서 전면 인정한점을 고려해 고등군사법원은 징역 1년 6개월로 감형했으며, 2022년5월 26일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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