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괴로움과 당혹감이 더해졌다. 중심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와 마주친 것인데, 토요일이라고 해서 평일보다 나을 것도 없는 차림새였다. 아버지가 걸음을 멈추었고, 패니는 아무리 신사답지 않은 모습의 아버지라 해도 크로퍼드 씨한테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행동거지에 크로퍼드 씨가 충격을 받을 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는 치욕감과 혐오감을 느낄 것이고, 곧바로그녀를 포기하고 결혼 생각 따위는 다 접어 버릴 터였다. 그가 사랑의 감정에서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패니지만, 이런 치유책이라면 난감하기론 질병이나 거의 진배없었다. 사실내 생각에도, 격이 떨어지는 육친 덕분에 똑똑하고 괜찮은 남자를 쫓아 버리느니 차라리 그의 구애를 받는 불운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 아가씨는 이 영국이라는 연합왕국을 다 뒤져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 P579
"제가 감히 조언이라니요! 무엇이 옳은지 잘 아시면서요." "예. 당신의 의견을 들을 때면 언제나 무엇이 옳은지 알게되지요. 당신의 판단이 제게는 옳고 그름의 척도니까요." "어머,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누구나 다 마음속에, 귀기울여 듣기만 한다면 그 어떤 타인보다도 잘 인도해 줄 훌륭한 길잡이를 가지고 있지요. 안녕히 가세요. 내일 평안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 P593
죄와 불행을 길게 곱씹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펜에 맡겨 두자. 유쾌하지 않은 그런 화제는 가급적 빨리 끝내고, 큰 잘못이 없는 사람들부터 어서 어느 정도 편안한 상태로 되돌려 놓고 나머지 사람들도 빨리 마무리 짓고자 한다. - P665
이미 늦었지만 그는 마리아와 줄리아처럼 아이들이 집에서극과 극의 상반된 태도에 상시적으로 노출된다면 인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치게오냐오냐하고 뭐든지 잘한다고 떠받드는 아이들 이모의 태도와 자신의 엄한 훈육이 계속 부딪쳤던 것이다. 그는 노리스 부인의 단점을 자신의 상반된 태도로 상쇄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것이 얼마나 그릇된 판단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아버지 앞에서는 감정을 억누르도록 가르친 결과 딸들의 기질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고, 또 딸들로 하여금 원하는 게 있으면오로지 맹목적 애정과 과한 칭찬으로 마음을 사려 한 사람에게 달려가게 만들었으니, 결국 불행을 키웠을 뿐임을 확실히깨달았다. - P668
"영국 소설의 위대한 전통은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 조지프 콘래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오스틴의 작품은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느끼고 있었던 영국 근대 시기의 시골 향사 계급의 일상적인 일들, 그 가운데서도 젊은이들의 사랑과 결혼의 주제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로맨스소설의 원형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사랑과 결혼 이야기라는 외피 속에 인간의 심리와 성격, 개인의 도덕성과 신분 및 자본과의 길항, 여성 주인공을 둘러싼 당시의 가부장적 질서 등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풍자, 탐색을담아내고 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특정 계급의 삶을 그려 낸 오스틴의 소설이 영국만이아니라 근대를 겪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 P688
그러나 면밀하게 읽어 보면 패니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 인물의 복합적인 성격 가운데 일면에 치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패니의 성격적 소심함과 수동적인 태도는 어린 나이에 낯선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야 했던 한 내성적인 여자아이가 안팎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패니의 여주인공다운 점은 이러한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속에꿋꿋한 심지를 간직한 채 스스로를 연마해 나갔고, 늘 자신을돌아보고 성찰하는 가운데 그 나름의 성장을 이루어 갔던 데 있다. 패니는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늘 양심과 - P690
도덕의 목소리를 경청할뿐더러 자신의 감정에도 일편단심이라고 할 정도로 충실하다. 주변 환경이나 사회적 ‘상식’에 휘둘리는 주변의 인물들 누구보다도 단단한 내면을 갖춘 처녀로 자라난 것이다. 누구나 선망하는 훌륭한 신랑감이라고 할수 있는 헨리 크로퍼드의 청혼을 받고도 꿋꿋하게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패니에게는 두렵기만 한 이모부의 진노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진실에 충실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 P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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