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그리고 그 당시에는 페스트가 비교적 안정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리유가 계획했던 조직이 손이 모자라 쩔쩔매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기진맥진하도록까지 노력을 쏟고 있던 의사들이나 조수들이었지만 그 이상의 노력을 요하는 상황을 상상해볼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그들은 다만 규칙적으로 그 초인적인 일들을 계속해야만 했다. - P307

그들은 다시 옷을 주워 입고, 말 한마디 입 밖에 내지 않은채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은 심정이었고, 그날 밤의 추억은 달콤한 것이었다. 멀리 페스트의 보초병이 보일 때 리유는, 타루도 역시 자기처럼, 페스트가 조금 아까 잠시 동안이나마 우리들을 잊고 있어서 좋았는데 이제 또다시 시작이군,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P335

진했다. 당국은 날씨가 추워지면 병세가 수그러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히려 페스트는 며칠 동안 계속된 겨울의 첫추위에도 물러갈 줄 모른 채 기승을 떨었다. 더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사람이란 기다림에 지치면 아예 기다리지 않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도시 전체는 미래의 희망 없이 살고 있었다. - P336

"됐어요." 하고 그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놈들이 다시 나와요."
"누가요?"
"쥐 말이에요, 쥐!"
지난 4월 이후로 죽은 쥐는 단 한 마리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다시 시작된다는 건가요?"하고 타루는 리유에게 물었다.
노인은 손을 비비고 있었다.
"놈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꼭 봐야 한다니까요! 정말 기분만점이죠."
그는 살아 있는 쥐 두 마리가 거리로 난 문으로 해서 자기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웃 사람들의 말로는, 그들 집에서도 그놈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서까래 위에서 몇 달을 두고 잊고 살았던 바스락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리유는 매주 초에 실시되는 총괄적 통계의 발표를 기다렸다. 통계는 병세의 후퇴를 표시하고 있었다. - P345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미온적인 고찰 밑바닥에는 동시에 무절제한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이 꿈틀대고 있었는데, 그 정도가 심한 나머지 시민들도 그 사실을 자각할 때가있어, 그럴 때면 그들은 부랴부랴 무절제한 희망을 지워 버리고 아무래도 해방은 오늘내일에 올 것은 아니라고 자신을 타이르는 것이었다. - P350

월요일에는 희생자의 수를 부쩍 늘려 놓았다가 수요일에는 거의 대부분의 환자를 다시 살려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처럼 숨을 몰아쉬거나 허둥지둥 서둘러 대는 꼴을 보면 마치 페스트는 신경질과 싫증으로 붕괴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으며, 그것 자체에 대한 자제력과 동시에 그의 힘의 바탕이었던 그수학적이며 위풍당당한 효율성마저 상실해 가고 있는 듯싶었다. - P351

아닌 게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는 것이나마 주민들에게 희망이란 것이 가능해진 그 순간부터 이미 페스트의 실질적인 지배는 끝났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 P353

그러나 그런 예외들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만족에 그 어떤 손상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아마도 페스트는 아직 다끝나지는 않았으며, 페스트가 장차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몇 주일을 앞당겨서 기차가 끝없이 긴 철로 위로 기적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고 선박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이튿날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진정되면 의혹은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당장에는, 도시 전체가 이제까지 돌의 뿌리를 박고 서 있던 그 어둡고 움직임 없는 밀폐된 장소를 떠나기 위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마침내는 생존자들을 만재한 채 전진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타루와 리유도, 랑베르와 다른 사람들도, 군중 틈에 섞여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땅에 발이 닿지 않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 P356

그것은 페스트에서 해방된 밤이었다. 그리고 추위와 햇빛과 군중에게 쫓긴 질병이 시내의 어둡고 깊은 곳들에서 빠져나온 다음 이 따뜻한 방 속에 숨어들어 와서 타루의 맥없는 몸을 향해 최후의 맹공격을 가하고 있는 듯싶었다. 재앙은 더 이상이 도시의 하늘을 휘저어 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방안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나직이 색색거리고 있었다. 리유가 몇 시간 전부터 듣고 있던 것이 바로 그 소리였다. 그는 그곳에서도 페스트가 멎고, 그곳에서도 페스트가 패배를 선언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 P372

그의 온몸은 발작적으로 경련하더니 이제는 그의 모습을 번쩍번쩍 비추던 번개도 점점 드물어졌고, 타루는 그 폭풍 속으로 서서히 표류해 가고 있었다. 리유 앞에는 미소가 사라진 채 이제는 무기력해져 버린 하나의 마스크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에게 그렇게도 친근했던 그 인간의 모습이, 지금은 창끝에 찔리고 초인간적인 악으로 불태워지고 하늘의 증오에 찬 온갖 바람에 주리 틀리면서 바로 그의 눈앞에서 페스트의 검은 물결 속으로 빠져들어 갔지만, 그로서는 이 난파를 막는 데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빈손과 뒤틀리는 마음뿐, 무기도 처방도 없이 기슭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는 눈물이 앞을 가려 리유는 타루가 갑자기 벽 쪽으로 돌아누워 마치 몸 한구석에서 가장 근원적인 어떤 줄 하나가 툭 끊어지기나 한 것처럼 힘없는 신음 소리를 내며 숨을 거두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 P376

타루는 아마 그렇게 살아왔던 모양이어서 환상이 없는 생활이 얼마나 메마른 생활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희망 없이 마음의 평화는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아무도 단죄할 권리를 인간에게주지 않았던 타루, 그러면서도 누구도 남을 단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심지어는 희생자가 때로는 사형 집행인 노릇을 하게 됨을 알고 있었던 타루는 분열과 모순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며, 희망이라곤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스러움을 추구하고, 인간에 대한 봉사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했던 것일까? 사실 리유는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 P379

"그냥요. 그분은 그저 무의미한 말은 하지 않으셨어요. 어쨌든 나는 그분이 좋았어요. 그냥 그랬다 이겁니다. 딴 사람들은 ‘페스트예요. 페스트를 이겨냈다고요.‘ 하고 난리를 치죠. 좀더 봐주다간 훈장이라도 달라고 할 판이죠. 그러나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인생이에요. 그뿐이죠."
"찜질을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오! 염려 마세요. 나는 아직 멀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죽는 것을 보고 죽을 거예요. 나는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단 말입니다."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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