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협탁에 놓인 전축이 돌아가고 있었다. 팝뮤직이 아니라 클래식이었다. 베토벤인 것 같았다. "안녕, 아직 안 잤니?". 그는 문득 말을 멈췄다.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어찌나 쓸데없는 소리로 들리는지, 기가 찼다. 지난 십년동안 집에서 이런 시답잖은 대화가 얼마나 많이 오갔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 P33
딸의 친구 중에는 모임이나 시위에 참석하는 등 정치 활동에 활발하게 참가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경찰을 몹시 혐오한다고 했다. 딸은 어릴 때는 아빠가 경찰이라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했지만 지금은 잠자코 있는 편이라고 했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 사실을 밝히면 자신이 경찰 전체를 대변하는 사람인 양 논쟁에 끌려들 때가 많아서라고 했다. 한심한 일이지만 현실이 그렇다고했다. - P35
콜베리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녀석의 허세로 걸친 자신감을 깨부수기 위해서지, 새롭게 진정한 자신감을 구축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언젠가 좋은 경찰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거야. 걸출한 성과를 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거랄까." - P110
뢴은 동년배 중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었다. 딱히 잘난 척할 마음도 없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체로 만족했다. 이대로도 썩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런 특징 때문에 그가 유용하고 유능한 경찰이 되었다. 그는 매사에 직접적이고도 단순하게 접근했다. 있지도 않은 문제나 어려움을 부러 지어내는 재주는 통 없었다. - P128
"확실한가?" 콜베리가 물었다. "확실하진 않아." "좌우간 유르고르브론 다리에서는 혼자였던 것 같아." 멜란데르가 말했다. 뢴도 하나 알아냈잖아." 군발드 라르손이 말했다. "뭘?" "’든르크’가 ‘못 알아봤다‘라는 뜻이라는 것. 사말손이라는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11월 15일 수요일에 그들이 알아낸 것은 그게 전부였다. 밖에서는 큼지막한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어둠이 벌써 내려앉았다. 당연히 사말손이라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스웨덴에는. 목요일에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 P166
"대량 살인마는 겉으로 보기에도 광기가 넘칠걸. 그런 인간이 거리로 뛰쳐나와서 사람들을 한 무더기 죽이기 전에 주변에서 미리 알아챌 순 없나?" 군발드 라르손이 물었다. "사이코패스는 비정상성을 자극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정상으로 보인다. 사이코패스란 개인의 한두 가지 성질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했다는 뜻인데, 그 밖의 면에서는 정상에 가깝다. 가령 재능이나 업무 능력 등은 정상일 수 있다. 특별한 동기가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무모하게 대량 살인을 저지른 살인범의 경우, 이웃들과 친구들은 그를 사려 깊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법 없이도 살 사람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살인범 중에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스스로의 질병을 인식해왔고 파괴적 성향을 억제하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충동에 굴복하고야 말았다고 말한 경우가 더러 있다. - P184
대량 살인마는 피해망상이나 과대망상, 혹은 괴상한 형태의 죄책감을 겪는 경우가 많다. 유명해지고 싶었다거나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자신의 이름을 보고싶었다고 동기를 설명하는 경우도 흔히 있다. 그 이면에는 거의 늘 복수심이나 과시욕이 깔려 있다. 그는 남들이 자신을 얕보고, 오해하고, 부당하게 취급한다고 느낀다. 대부분 심각한 성적 문제가 있다." 멜란데르가 낭독을 마치자 방에는 침묵이 깔렸다. 마르틴 베크는 창을 내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퀭했고, 자세는 어느 때보다도 더 구부정했다. - P185
"사회의 모든 계층에 경찰을 향한 적대감이 잠재되어 있거든. 사소한 자극에도 금세 튀어나오지." 멜란데르가 말했다. "그런가. 그렇담 그 이유는 뭐야?" 콜베리는 흥미라곤 없는 말투로 물었다. "경찰이 필요악이기 때문이야. 누구든 불현듯 경찰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알지. 직업 범죄자들조차 그래. 제아무리 도둑이라도 자기집 지하실에서 뭔가 달각대는 소리가 들려서 밤중에 잠을 깨면 어떻게 할 것 같나? 당연히 경찰을 부르지. 하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이 자기 일을 방해하거나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면 어떤 방식으로든 두려움이나 경멸을 표현하기 마련이야." "거참, 스스로를 필요악으로 여기는 건 정말이지 못 견딜 일인데." 콜베리는 의기소침했다. - P199
멜란데르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물론 문제의 핵심은 따로 있어. 경찰 직업 자체는 최고로 지적이며 정신적, 육체적,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수행해야 하는 일이건만, 이 직종에는 그런 자질을 보유한 사람을 끌어들일 매력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이야." - P199
갈색 머리 여자가 노르딘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웃음 띤 얼굴로 탁자로 몸을 숙여 친구에게 말했다. "헤이 에바, 북쪽에서 오신 신사분이 금발의 말린을 찾는데, 걔 어디 있는지 알아?" 친구는 노르딘을 쳐다본 다음, 저멀리 앉은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기 경찰 양반이 금발의 말린을 찾는데, 누구 아는사람?" "아아니." 건너편 탁자에서 합창이 들려왔다. 어떻게 내가 경찰인 것을 꿰뚫어 보았을까? 노르딘은 울적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스톡홀름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 P273
노르딘이 편지를 채 다 쓰지 못했을 때, 마르틴 베크가 들어왔다. "어떤 바보가 당신을 시내로 보냈습니까?" 마르틴 베크가 대뜸 신경질을 부렸다. 노르딘은 보고서 사본으로 얼른 편지를 덮었다. 방금 ‘그리고 마르틴 베크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괴팍해지고, 퉁명스러워져‘라고 쓴 참이었다. 콜베리가 타자기에서 종이를 뽑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뭐? 내가?" "그래, 자네가 시켰어. 지난 수요일에, 금발의 말린이 왔다 간 다음에." 마르틴 베크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콜베리를 보았다. - P299
"남편은 어떻게 됐나?" "자연히 그 일로 자신의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이름을 바꾸고 스웨덴 시민이 됐어. 스톡순드 출신의 집안 좋은 여자를 만나서 재혼했고, 아이를 둘 낳고 리딩에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 남편의 알리바이는 카셀 선장의 뗏목만큼이나 물샐틈없어." "누구의 무슨 뗏목이라고?" "자네가 모르는 유일한 주제는 보트인가 보군. 그 폴더를 열어보지그래? 스텐스트림이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 P317
멜란데르는 명단을 보면서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12월 23일에 몬손과 노르딘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직후에 돌아오기로 했다. 날씨는 지독히 춥고 나빴다. 소비사회는 삐그덕삐그덕 굴러가고 있었다. 이날 하루만큼은 무엇이 되었든, 가격이 얼마든 팔려나갈 것이었다. 신용카드나 위조수표로 계산되는 것도 많으리라.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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