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놀 때, 인간, 네가 여기 있어 줘서 정말 기뻐, 뭐,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양이는 죽은 자의 침상 앞에서도 놀 수 있습니다. 앞발로 수의의 옷자락을 가지고도 잘 놀 것입니다. 개는 절대로 그러지 않습니다. 고양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재미를 찾습니다. 개는 무슨 영문에서인지 다른 사람을 재미있게 해 주고 싶어 하고요. 고양이는 오로지 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지만 개는 다른 누군가 자기한테 관심을 보이기를 바라지요. 개는 무리의 일원일 때 온전히 활력 넘치는 삶을 사는데, 겨우 두 명이라도 무리는 무리인 겁니다. 꼬리를 쫓으면서도 곁눈으로는 누군가 해 줄지도 모르는 말에 신경을 쓰고요. 고양이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스스로 즐거우면 그만이지요. - P105

개는 순전한 사교성에서 놀이에 참여하며, 오로지 순수한 열의에서 공동의 놀이에 온몸이 터져 나가도록 열심히 임하죠. 개인적으로 체험해 봤다는 사실만으로 고양이는 만족하고도 남습니다. 개는 성공을 거두고 싶어 합니다. 고양이는 주관주의자입니다. 개는 반려자가 존재하는 세계에 살며, 그러기에 객관주의자입니다. 고양이는 동물처럼 신비롭습니다. 개는 인간처럼 나이브하고요. 고양이는 약간 유미주의자입니다. 개는 평범한 인간과 비슷하지요. 아니 창작하는 인간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요. 개는 어떤 내면적 성향으로 인해 타자로, 모든 타자에게로 향합니다. 개는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지요. 자기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배우처럼,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서 시를 쓸 수는 없는 시인처럼, 자기 얼굴을 벽에 걸겠다는 이유만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화가처럼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영혼을 걸고 참여하는 모든 놀이에도 역시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를 갈구하는, 그 간절하게 못 박힌 시선이 있습니다. 크고 소중한 인간 무리 전체의 관심을 구하는 그 눈길이 있습니다. - P106

그러나 육 주가 흐른 뒤에는, 새끼들의 소굴에서 조용히폴짝 뛰어나와 녹음이 우거진 어둠으로 사라질 겁니다. 저 멀리에서 굵은 알토의 목소리로 울부짖는 수고양이 소리가 들릴 테니까요. 고양이는 아침에서야 비로소 초록색 눈을 커다랗게 뜨고 헝클어진 털을 핥으며 돌아올 테고, 새끼가 목을 축이고 싶어서 혹은 어미의 민감한 수염을 갖고 놀고 싶어서 뛰어나오면 앞발로 탁 쳐낼 테고 그러면 너무나 놀란 새끼는 억울함에 비틀거리며 가 버릴 겁니다. ‘이리 와, 우리 새끼 고양이, 마음 쓸 필요 없단다, 그런 게 세상의 이치니까. 유년기의 끝이 온 거야. 내가 너희에게 살 곳을 찾아 줘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잘 핥아서 매끈해진 등을 새끼들에게 돌리고 고양이는 창밖을 내다봅니다. 흡사 그 어떤 존재의 명령을 귀담아듣는 모습이네요. ‘너는 밖으로 나가야 해, 오늘 밤에 외출해, 그가 올테니까.‘ - P109

나는 언제나 다른 건 몰라도 알고 지내는 지인들만큼은 산더미처럼 많다고 자부해 왔으나, 푸들렌카가 새끼를 생산하기 시작한 후로는 이생에서 지독하게 외로워지고 말았습니다. 이를테면 스물여섯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선물해 줄 사람이 아무리 찾아봐도 하나도 없는 거예요. 내 소개를 해야 할자리가 생기면 나는 내 이름을 중얼거린 다음에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고양이 키우고 싶지 않으세요?"
"무슨 고양이요?" 그러면 사람들은 의심 가득한 말투로 되묻지요.
"아직 모르겠어요." 보통 내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또 새끼 고양이들이 좀 생길 것 같아서요." - P113

편집부 사무실 식구들은 이제 모두 제게서 고양이를 한마리씩 받아 키우고 있습니다. 아주 좋아요, 그럼 이제 다른 데로 직장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는 어떤 사교 모임, 단체라 해도 최소한 고양이 스물한 마리만 받아 준다면 기꺼이 이름을 올릴 각오가 되어 있어요. - P116

옮긴이의 말

험난한 격동의 시대에 투철한 참여의식으로 정치와 외교에 발을 벗고 나섰던 작가인데도, 차페크의 글에서는 위압적인 무게감을 찾아볼 수 없다. 위트와 풍자는 차페크 문학의 생명이다. 인류라는 종을 사랑했지만, 그 치부 역시 냉정하게 직시했던 차페크는 애정과 비판의 간극을 촌철의 유머로 채웠다. 인류의 멸절마저 멀지 않게 느껴졌던 20세기 초반의 유럽, 무너지는 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차페크의 시선은 아이러니한 웃음기로 가득하고 비관에 빠지지 않았다. 『R.U.R.』이라든가 『곤충 희극』, 대작 『도롱뇽과의 전쟁』에서는 기막히고. 황당한 사건들이 채플린의 희극처럼 촘촘하게 쌓여 눈덩이처럼 불어난 어리석은 인간의 선택은 끝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지만, 풍자와 해학이 이 작품들을 시커먼 절망에서 구원한다. 당시 팽배했던 허무주의나 비관적 숙명론은 차페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P1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