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읽을 때도 ‘복잡한 것투성이’라는 문장 있어서 띄어쓰기 잘못된 거 아닌가 했는데, 이 책에도 ‘모르는 것투성이’가 나와서 찾아 봄.
-투성이는 ‘그것이 너무 많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물,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라서 앞말에 붙여서야 한다고. 실수투성이, 흙투성이 등등은 자연스러운데 것투성이는 영 낯설게 보이네. 띄어쓰기 어려워.

나는 이날 이때껏 철들어 보지 못한 아이 같다. 내 둘레에는 온통 모를 것, 모르는 것투성이여서 어디에나 코를 디밀고 아무나 붙들고 ‘왜‘냐고 묻는다. 요즈음에는 사람 붙들고 물으면 짜증스러워할까 봐 흐르는 물에게 스쳐 가는 바람에게 떨어지는 나뭇잎에게까만 하늘에게 묻고 또 묻는다. 나는 꿈만 먹고 사는 게으르디게으른 늙은이, 잠이 많아 꿈도 많은, 한 발을 저승에 내딛고 있는 ‘형이상학자‘(?)일지도 모르겠다. - P4
돈 되는 기술, 능력, 학위만 좇도록 만드는 교육은 생각 없이 살도록, 생각할 시간조차 꿈꾸지 못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꿈꿀 수 없으면 한 사람의 삶도 세상도 제자리를 맴돌기 십상이다. 철학은 올바른 가치관으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길을 비추는 등대 같은 것이다. 물질 만능 시대에 휘둘려 갈피를 못 잡는 이들에게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형이상학은 그 철학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주춧돌이자 뼈대이다. - P7
진리는 강요할 수 있거나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 특히 형이상학은 ‘검증‘과 ‘반증‘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 있을 때에 있을 데에 있을 것만 있고, 없을 때에 없을 데에 없을 것이 없는 ‘이론’. 그 안에 사랑과 미래에 대한 꿈을 가득 담은 가장 바탕이 되는 몇 마디 말이 ‘오선지‘ 노릇을 해야 하고, 그 위에 가락이 흘러야 한다. 우리는 그 가락이 흐르는 크고 작은 결에 몸을 실을 수 있어여 한다. - P7
‘틀릴 수 있어요’라고 말하지 않고 ‘오차 범위‘라고 얼버무린다. 누리의움직임에는 오차라는 게 없다. 틀림이 없다. 오차는 사람 머릿속에서만 생겨난다. - P37
산톨에 끝이 있다는 것, 겉과 갓이 있다는 것, 그것들 사이에 틈이 있다는 것, 그 틈 사이에서 힘이 늘고 줄어들어 목숨이 길어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 그러나 모든 톨에는 끝이 있다는 것, 저마다 어느 땐가는 새로 움트는 삶톨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것. 마치 물결이 높낮이를 이루고, 바람결이 셈과 여림을 가누고, 햇살이 톨과 결로 번갈아 바뀌어 퍼지고, 온통 톨로만 이루어진 듯한 땅별 안에도 깊숙이에서는 무르녹아 뜨거운 힘으로 바뀌는 흐름이있어 서로 이어져 있듯이, 끊어짐이나 갈라섬은 어쩌다 있는 짬, 틈, 새(사이), 참에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 P39
‘삶이 힘이다. 이 힘이 함과 됨으로 나뉘고, 함이 있음의 힘이고, 됨이 없음의 힘이 되더라도 이 둘을 아우르는 힘은 삶에서 나온다.‘ 이 생각은 점점 더 굳어진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나는 빛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로고스)에는 깊은 뜻이 있다. ‘나는 어둠이요, 죽음이다‘라고 바꾸어도 그 뜻은 바뀌지 않는다. 죽음도 삶의 한 모습이고 삶의 그림자이니까.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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