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사샤는 엘리엇이 말한 객관적상관물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이상한 점은 내슬픈 감정이 외부 대상을 통해 격하게 표출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서구적, 아니 아메리카적, 아니 코메리카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였다면 결코 그런 육체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의 감수성이 나도 모르게 얼마만큼 벌써 미국화되었단 말인가? 엘리베이터까지 따라가 엘리베이터에 탄 사샤에게 잘 가라 하며 손을 흔드니까, 같이 타고 있던 식료품 쇼핑 가는 사람들이 좀 놀란 얼굴이 되는 것 같았다. - P297
나는 왜 여기 있나. 무슨 역마살이 붙어서 내가 여기까지 와 있나 하는 생각. 그러나 그다음 순간에 내 의식이 힘차게 그것을 짓밟아버린다. 요즈음의 나는 슬퍼지는 게 싫다. 모두가 한껏발랄한 얼굴을 하고 다니는 세상에서 나만 혼자 서글픈 생각, 서글픈 표정을 갖고 다니는 게 구저분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골초이기 때문에 항상 내게서 담배 냄새가 나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프로작의 나라에서 말이다. - P322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나는 의식 상태에서 보자면 큰 혼란을 겪지 않는 사람인데, 언제나 내 무의식은 저 혼자서 커다란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내 의식은 그것조차 접수하기 싫어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결국은 내 몸과 내 몸을 통해 보이는 현상들이 내가 얼마나 보이지 않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 P336
이 사람들은 항상 나로부터 전체로 나아가고,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나아간다. 우리와는 반대이다. 내 시의 영어 번역에서도 그런 점이 드러났는데 내 시점은 항상 큰 것으로부터 나를 향해 좁아져 들어오는데 비해, 내가 영역한 시를 읽고서 자기 나름대로 번안한 한 학생의 시를 읽어보면 그는 시점을 완전히 뒤집어버려서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지점으로부터 자기 외부로 확대되어나가도록 만들어놓았다. - P337
이번 해외여행 중에 절실히 하나 깨달은 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입는 데 너무 신경을 쓴다는 거다. 한국에서 옷 잘 못 입기로, 아니 입을 옷이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정도이면 그건 심각한 현상이다. - P362
아이오와와 두 시간의 차이가 났다. 시계를 다시 두 시간 앞으로 당겨야 했다. 갑자기 아이오와는 완전히 물러나고 샌프란시스코가 내 의식 속으로 들어왔다. 아이오와가 스몰타운 시골이라면 샌프란시스코는 대도시이다. 그런데이 샌프란시스코가 내게는 더 익숙하다. 내 감수성에는 아마도 나는 완전히 전형적인 도시인의 센서빌리티를 갖게 된 것일까. 아이오와가 동화 같은, 꿈결 같은 도시였다면, 샌프란시스코는 현실이다. 고가도로와 고속도로와 수많은 차와 다운타운에 밀집해 있는 높다란 고층 건물들이 오히려 내게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왜 그런 감정 있지 않은가, 시골에서 좀 오래 머물다가 서울한복판으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친근감, 아 돌아왔구나 하는 느낌 말이다. - P364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것들을 되돌아보게 된, 그러니까 이미 나의 것이 아니게 된 것들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보았을 때의, 그러니까 사후의 추체험을 통해 다시 느껴보려 할 때의 공포감, 아 내가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았었구나(그 안에서 살 때는 오히려 그걸 느끼지 않았었는데)하는 공포감과, 이제 다시는 그것을 몰랐을 때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그리고 되돌아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는 공포감을 내 세포들이 느꼈고 그 세포들의 집합인 내 육체가 그 증세를 앓았고, 그 두려움의 감정을 내 세포들은 내 무의식에 부지런히 타전했고, 내 무의식은 그것들을 하나씩 접수하면서 아직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불안감을 느꼈고, 내 무의식은 그것을 부지런히 내 의식에 타전했고, 내 세포들과 내 무의식이 타전해준 그 정보들을, 그 감정들을 하나씩 접수하여 차곡차곡 쌓아놓았다가, 오늘 새벽 내가 깨어났을 때 내 의식이 드디어 하나의 완벽한 문장으로 만들어내게 제시한 거다. 그리고 그 문장은 바로 이렇다. "나는 프로그램화된 사회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문장의 배경을 이루는 감정은 이런 거다. 나는 이 프로그래밍에 더이상 적응하지 않겠다. 나는 더이상 프로그램화되지 않겠다. - P369
이상하게 두 사람과 금방 친해졌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미국에서는 친구 사귀기가 아주 쉽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자기와는 다른 것, 낯선 것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다. 남의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건 일상생활의 대화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부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받아들인다는 건 네가 옳다 그르다의 차원에서 받아들인다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논의 자체를 개방한다는 거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다른 부문은 고사하고 문학 부문만 보더라도 그렇다. 아니 문학 분야가 그리고 학계가 가장 고답적이고 가장 보수적이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페미니즘에관한 논의이다. 우리나라처럼 페미니즘에 관한 논의가 겉돌고 있는 나라도 없을 거다. 아니 겉돌고 자시고 할 만큼의 논의로서의 공식적 세력도 확보하지 못했다. 그건 무슨 이유인가. 아무도 페미니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 문화, 문학의 프로그래머들이 대부분 남성이기 때문이다. - P375
여성 작가가 페미니즘 운운하면, 대뜸 나온다는 말이 "그거 부르주아 여자들이 하는 거 아니오?"이다. 그러면 그 여성 작가는 입을 다물어버리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반격을 시작한다 해도 그 반격을 정식으로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지 않고 농짓거리로 만들어버릴 우려가 있고, 반격을 가한다면 참으로 골치 아픈 여자라는 딱지가 붙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게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이 갖고 있는 자기검열, 우리 사회가 우리 여성들에게 프로그램화시킨 자기검열의 소프트웨어다. 도대체 논의를 좀 해보자는데, 그건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뭔지 논의의 소재, 논의의 주체 자체를 장악하고 한정시키고 조종한다. 그러면서도 가끔씩은 또 개방한다. 그건 완전한 개방이 아니다. 문을 좀 빠끔 열어놨을 뿐이다. 왜 열어놨나? 그건 자기네들이 그렇게 독선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 빠끔히 열린 틈으로 들어가려 하면 갑자기 그 문이 쾅 닫혀버리고 들어가려던 사람은 문에 머리를 부딪히게 된다.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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