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가 스며든 태양이 모든 빛깔의 광채를 꺼 버렸으며, 모든 기쁨을 쫓아 버렸던 것이다. - P153
"아! 차라리 지진이기나 했더라면! 한 번 와르르 흔들리고 나면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을 텐데………. 죽은 사람 수와 산 사람 수를 헤아리고 나면 그걸로 끝난 거니까요. 그런데 이 망할 놈의 병은 글쎄!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까지도 생병을 앓게 된다니까." - P155
담을 쌓고 지내는 칩거 생활에 놀라는 타루에게 그는, 종교적으로 보면 한 인간에게 있어 앞의 반생은 상승이고 뒤의 반생은 하강인데, 하강기에 있어서 인간의 하루하루는 이미 그의 것이 아닌지라 언제 빼앗기고 말지도 모르는 일이며, 따라서 그 자신은 어떻게도 할 수 없고 그러니까 전혀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것이 바로 최선의 길이라고 대강 설명했다. 또한 그는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 P158
정말이에요.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지, 이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장에는 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반성할 것이고, 또 나도 반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긴급한 일은 그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나는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들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그뿐이지요. - P171
"결국은요?" 하고 타루가 나직하게 물었다. "결국………" 의사는 말을 계속하려다가 타루를 물끄러미 보면서 또 주저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그러나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만큼, 아마 신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 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 P172
"네." 타루가 끄덕거렸다.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하는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뿐이죠." 리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언제나 그렇죠.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싸움을 멈추어야 할 이유는 못 됩니다." "물론 이유는 못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이 페스트가 선생님에게는 어떠한 존재일지 상상이 갑니다." "알아요." 리유가 말했다. "끝없는 패배지요." 타루는 잠시 의사를 보고 있다가 일어서서 무거운 걸음으로 문 앞까지 갔다. 리유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의사가 이미 그의 곁에까지 갔을 때 자기 발등을 보고 있는 것 같던 타루가리유에게 말했다.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 P172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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