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페스트‘라는 말이 이제 막 사람들의 입 밖에 나왔다. 베르나르 리유가 그의 사무실 창 너머 저쪽에 앉아 있는 이야기의 이 대목에서, 서술자가 그 의사의 의아해하고 놀라워하는 심정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을 허락해 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몇몇 뉘앙스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그가 보이고 있는 반응은 바로 우리 시민들 대부분의 반응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그의 망설임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가 불안과 믿음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던 것도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 P54

그는 역사상 알려진 약 서른 차례에 걸친 대규모 페스트가 일억에 가까운 인명을 빼앗아 갔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억의 사망자가 과연 무엇인지 알 듯 말 듯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란 그 죽은 모습을 눈으로 보았을 때에만 실감이 나는 것이어서,오랜 역사에 걸쳐서 여기저기 산재하는 일억의 시신들은 상상속의 한 줄기 연기에 불과한 것이다. - P56

그러나 이 현기증 나는 상상도 이성 앞에서는 계속되지 못했다. ‘페스트‘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온 것도 사실이고, 바로 이순간에도 재앙이 희생자 두서넛을 후려쳐서 쓰러뜨리고 있는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거야 뭐 중지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이면 명백하게 인정해, 드디어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 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페스트가 멎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머릿속에서의 상상, 머릿속에서의 그릇된 상상이 아니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만약 페스트가 멎는다면 그것은 가장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 모든 일은 잘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우리는 페스트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우선은 그에 대비하는 조처를 취하고 다음으로는 그것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 있는지 어떤지를 알게될 것이다. - P59

리유는 머리를 흠칫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 매일매일의 노동, 바로 거기에 확신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무의미한 실오라기와 동작에 얽매여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멎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일이었다. - P60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고 리샤르가 시인했다.
"그런 데다가 입방아를 찧어 대는 바람에 모든 게 과장되었어요. 지사가 나더러 ‘원하신다면 빨리 서두릅시다. 그러나 말이 안 나게 조용히 해야 돼요.‘라고 그러더군요. 어쨌든 지사도 공연히 놀라서 법석을 떠는 거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 P69

이처럼, 페스트가 우리 시민들에게 가장 먼저 가져다준 것은 귀양살이였다. 서술자가 느꼈던 것이 동시에 수많은 우리시민들이 느꼈던 것인 만큼, 서술자는 자신이 그때에 느낀 바를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여기에 써도 무방하다고 굳게 믿는다. 그렇다. 그때 우리가 끊임없이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던 공동(空洞), 과거로 돌아가고만 싶은, 혹은 그 반대로 시간의 흐름을 재촉하고만 싶은 구체적 감정, 어이없는 요구, 저 불타는 화살과도 같은 기억, 그것이 바로 귀양살이의 감정이었다. 이따금 우리는 상상이 뻗어 가는 대로 마음을 맡긴 채, 집에 돌아오는 사람의 초인종 소리라든가 계단을 올라오는 귀에 익은 발소리를 심심풀이로 기다려 보기도 하고, 그러는 동안에는 기차 운행이 정지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로 마음먹기도 하고, 그리하여 저녁 급행으로 온 여객이 우리 동네에 도착함 직한 시간에는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맞춰 놓아 보기도 했지만, 물론 그런 장난이 오래갈 리는 없었다. - P98

특히 모든 우리 시민들은 이별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 헤아려 보던 습관을 아주 빨리, 심지어 공공연하게 떨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가장 비관적인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그 기간을 육 개월로 정하고서 장차 그 육 개월간에 닥쳐올 모든 고초를 미리 다 맛볼 대로 맛보고 나서, 가까스로 그러한 시련의 경지에 걸맞도록 용기를 키우고,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친 고통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버티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하고 있다가도, 어쩌다 우연히 만난 친구라든가, 신문에 실린 전망이라든가, 근거 없는 의혹이라든가, 혹은 불현듯이 생기는 통찰이라든가 하는 것 때문에 결국은 그 유행병이 육 개월 이상 가지 말라는 법도 없으며, 아마 일 년, 또는그 이상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 P99

이처럼 그들은 전염병이 한창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서도, 자칫 냉정함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로 건전한 여유 같은 것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절망감은 그들을 공포로부터 건져 주었고, 그들의 불행에는 좋은 점도 있었다. 예를 들면, 그들 중 누가 병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대개의 경우 본인은 그것을 깨달을 시간적 여유도 없이 그리된 것이었다. 눈앞에 있지도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를 상대로 계속해 온 기나긴 마음속 대화로부터 끌려 나오는 즉시 그는 다짜고짜로 가장 무거운 침묵만이 전부인 흙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이었다. 그는 앞뒤 돌아볼 시간의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 P105

잠시 후, 의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신문기자의 행복에 대한 조바심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리유에 대한 그의 비난은 정당했던가? ‘선생님은 추상적입니다.‘ 페스트가 더욱 성해져서 일주일에 사망 환자 수가 평균 오백 명에 달하고 있는 병원에서 보낸 그날들이 정말로 추상적이었을까? 그렇다, 불행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 다만 리유는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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