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은 여기저기 밀가루 부대로 기워져 있었고, 접어 놓으면 마치 영원한 패배를 상징하는 깃발처럼 보였다. - P10
"물론 기억하고말고. 네가 나한테서 떠난 게 내 솜씨를 의심해서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단다." 노인이 대답했다. - P11
"그런데 아버지한테는 그다지 신념이라는 게 없어요." "그래, 그건 그렇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신념이 있지. 안 그러냐?" 노인이 대꾸했다. - P11
투망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고, 소년은 노인이 투망을 언제 팔아 치웠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런 꾸며낸 말을 날마다 되풀이했다. 노란 쌀밥도 생선도 있을 리 없었고, 이 또한 소년은 잘 알고 있었다. - P17
어둠 속에서도 노인은 아침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노를 저으면서도 날치가 수면에서 날아오를 때 내는 부르르 떠는 소리라든가, 그 빳빳이 세운 날개가 어둠 속을 날아갈 때 내는 쉿쉿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날치를 무척이나 좋아하여 날치를 바다에서는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했다. 그러나 새들은 가엾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언제나 날아다니면서 먹이를 찾지만 얻는 것이라곤 거의 없는 조그마하고 연약한 제비갈매기를 특히 가엾게 생각했다. 새들은 우리인간보다 더 고달픈 삶을 사는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강도 새라든가 힘센 새들은 빼놓고 말이지만, 바다가 이렇게 잔혹할 수도 있는데 왜 제비갈매기처럼 연약하고 가냘픈 새 - P30
를 만들어 냈을까? 바다는 다정스럽고 아름답긴 하지. 하지만 몹시 잔인해질 수도 있는 데다 갑자기 그렇게 되기도 해. 가냘프고 구슬픈 소리로 울며 날아가다가 수면에 주둥이를 살짝담그고 먹이를 찾는 저 새들은 바다에서 살아가기에는 너무 연약하게 만들어졌단 말이야. - P31
하지만 난 정확하게 미끼를 드리울 수 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단지 내게 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어쩌면 오늘 운이 닥쳐올는지.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 P34
또한 노인은 어부들이 어구를 맡겨 두는 오두막집의 커다란 드럼통에 들어 있는 상어의 간유도 날마다 한 잔씩 마셨다. 누구든지 마시고 싶은 사람은 마실 수 있도록 그곳에 놓아둔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부들은 그 맛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싫은 것으로 말하자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보다 더한 게 있을까. 상어의 간유는 온갖 감기와 독감에도 아주 효력이 있고 눈에도 좋았다. - P39
이러다가 죽을 테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버티고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니. 그러나 네 시간이 지나도록 고기는 여전히 배를 끌면서 먼 바다로 헤엄쳐 가고 있었고, 노인은 여전히 낚싯줄을 등에 걸친 채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저놈이 낚시에 걸려든 게 정오 무렵이었지. 그런데 아직 녀석의 낯짝도 보지 못했단 말이야." - P47
그러고 나서 문득 뒤를 돌아보니 뭍이 보이지 않았다. 뭍이 보이지 않아서 어떻단 말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난 언제든지 아바나 쪽에서 비치는 밝은 빛을 보고 항구로 돌아갈 수 있거든. 해가 지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고, 어쩌면 그때까지는 고기 놈이 올라와 줄지 모르지. 만약 그때까지 올라와 주지않는다면 달이 떠오를 때까지는 올라와 주겠지. 또 그때까지도 올라오지 않는다면 내일 아침 해가 뜰 때는 올라와 주겠지. 지금 내 몸엔 쥐도 나지 않고 기운이 팔팔 흘러넘치고 있어. - P47
그러자 어깨에 가로질러 걸친 낚싯줄을 통해 자신이 선택한 진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큰 고기의 힘이 느껴졌다. 일단 내 계책에 걸려든 이상 어느 편이든 선택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런데 이놈이 선택한 방법이란 온갖 올가미나 덫이나 계책이 미치지 못하는 먼 바다의 깊고 어두운 물속에 잠겨 있자는 것이지. 내가 선택한 방법이란 모든 사람이 다다르지 못하는 그곳까지 쫓아가서 그놈을 찾아내는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지 못하는 그곳까지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함께 있는 것이고, 정오부터 줄곧 이렇게 함께 있었던 거야.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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