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호로비츠가 쓴 소설《맥파이 살인 사건》(열린책들, 2018)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책으로 인생이 바뀌려면 떨어지는 책에 맞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웃음을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인 것도 잠시, 회사까지 걸어가는 내내 이 말을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 P106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빠뜨릴 수 없다. 누군가 ‘죽을 때까지 단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어떤 책을 고를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일말의 망설임 없이 꼽았던 책이다.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10년 후에도그럴 것이다(미래의 일에 대한 몇 안 되는 확신 중 하나다). 이 책은 책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우주이다. 배경이 우주여서가 아니라, ‘책’이라는 존재에 기대하는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적이었다가 마르케스적이었다가 볼라뇨적이었다가 카프카적이었다가 칼비노적이었다가 보니것적이었다가………… 이런 식으로 지구 한 바퀴를 돌며 평소 애정해 마지않던 작가들을 다 만나고 오는 기분이 들면서 동시에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독창적인 아우라와 유머에 번번이 허를 찔린다. 아무리 읽어도 절대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 P115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써온 표현을 지적받으면 아무렇지 않았던 과거가 무안하고 아무래져야 하는 미래가 번거로워 반발심이 들기 마련인데, ‘벙어리장갑‘처럼 이미 고유한 명사가 되어버린 친근한 단어를 놔두고 막 지어낸 듯한 어색한 단어를 가져다 쓰는 건 유난하다고 느껴서 더욱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유난하다는 느낌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벙어리’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사람들에게 계속 상기시켜 준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일 것이다. 이외에도 장애인 비하가 들어가 있는 표현들, 이를테면 ‘꿀 먹은 벙어리’ ‘눈뜬 장님‘ ‘눈먼 돈’ ‘앉은뱅이책상’ ‘절름발이행정‘ 같은 말도 역시 쓰지 않는다. - P125
의식적인 노력을 다한다 하더하도 글은 모든 상황과 입장을 전부 담지는 못한다. 어느 한곳에서는 반드시 누수가 일어나 어떤 존재들은 빠져나가고 배제되고 소외되기 마련이다. 그 안에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표현’을 계속 고민하고 다듬는 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D들이 삐쭉댈 만한 말을 최대한 쓰지 않는 것. 누군가 내 글을 읽다가 외로워지는 일을 최대한 줄이는 것. D가 슬프면 나도 무척 슬플 것이다. D가 아프면 나도 무척 아플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써왔던 말들을 버리고 벼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 P126
"그 후로 어쩐지 점심시간마다 너를 계속 기다리게됐어. 혹시 또 안 오나 해서." 다시 읽어도 숨이 멎을 듯해서 바닥에 잠시 주저앉았다. 펑펑 울었다. 편지의 나머지 부분을 읽으면서도 문득문득 뒷문을 쳐다봤을 M이 자꾸만 상상돼서, 그때마다 실망하는 M의 표정과 아무렇지 않은 척 실망을 추스르며 맞곤 했을 M의 오후가 자꾸만 생각나서, 그날처럼 크게 터져 나올 일이 더 많았다면 좋았을 M의 끼룩끼룩대는 웃음소리가 자꾸 떠올라서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 후로도 수백 번은 더 하게 될 후회였다. 몇 번 더 갈걸, 더 자주 갈걸 하는 후회는 아니었다. 가지 말걸. 그날 가지 말걸. 그냥 지나갈걸. 그럴걸. - P134
설령 그렇지 않았던들 그건 엄마들만 미안해할 일이 절대 아니라고. 당시에는 어려서 사회가 ‘엄마‘에게 소급해서 씌우는 책임의 무게를 잘 몰랐다. 뒤에서 수군거리는어른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런 어른들이 미디어에 ‘나쁜 엄마들’을 만들어내고, 우리의 존재를 지워버렸다는 건 잘 몰랐다. 그래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고 그래서 한 번쯤 꼭 말하고 싶었다.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그 시절을 우리가 어떻게 통과했는지에 대해서. 그런 우리들도 있었다고. 분명 있었다고. - P143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내가 무능력했지 무기력하기까지 할까 봐!"라고 덮어놓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것도 내 안에 새겨진 다정들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쉽게 포기하지 않게 붙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얻게 되는 건 근육만이 아니었다. 다정한패턴은 마음의 악력도 만든다. 그래서 책 제목을 ‘다정소감‘이라고 붙여봤다. ‘다정다감‘을 장난스레 비튼 느낌도 좋았지만, 결국 모든 글이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작은 감상이자,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인 것 같아서. 내 인생에 나타나준 다정패턴 디자이너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디자인에 워낙 재주가 없는 나에게 다정한 부분이 있다면그건 다 그들의 다정을 되새기고 흉내 내며 얼기설기 패턴을 만들어간 덕분일 것이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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