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이 길었구먼, 지금 전라도 광주나 여기저기서 일 벌어지는 거 보니 지금이 전쟁이여. 지금은 전쟁 때나 다를 것이 없어. 오늘 텔레비전 보니께 또 불쌍한 사람들 수도 없이 죽고 있단 말이여. 전쟁이라면 군인들끼리 총 대포로 쌈질하다 죽는 줄 아는디 아니여. 그냥 멀쩡히 농사짓는 사람들, 정치가 뭔지 모르고 하루하루 착하게 하늘 보고 농사지으며 살던 사람들을 마구 끌 - P126

어다 쏴 죽이고 생매장하고 겁탈하고 죽이고 그런 게 전쟁이여. 광주만이 아니여. 서울이랑 사방천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거여. 살아남아야 혀. 이 어려운 시국을 잘 넘어야 혀." - P127

선생님은 말없이 몇 걸음 옮기더니 무겁게 말씀을 이어 가.
"지금 들어온 사람에게 누구냐고 묻지 마라. 얼굴도 보려고 하지 말고 그냥 책만 읽으며 그대로 수업 시간을 때우자. 그리고 이번 시간이 마지막 수업이니 학생들이 학원 나갈 때 조용히 섞여서 나가. 건강해야 한다. 살아남거라."
난 그날 맨날 조는 듯한 표정에 느리게 걷는, 젊은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날카롭고 섬광 번뜩이는 쌈박한 느낌이라고는 찾을수 없는 시골 형님 같은 역사 선생님에게 푹 빠지고 말았어. 역사라는 과목을 아주아주 좋아하게 된 건 말할 것도 없고. - P130

‘그래, 나는 없는 집 자식이야. 쟤네들처럼 힘껏 날 도와줄 사람은 없어. 그냥 내 힘으로 내 길을 열어야 해. 내가 정신을 못 차렸지. 어떻게 시작한 공부인데……. 아니야, 아이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어떻게 살아? 사람이 어떻게 공부만 하고 일만 하고 살아? 그래도 이제 남은 두 달은 죽은 듯 공부한다. 쟤네들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없는 집 자식이 술이나 마시고 이리저리 흔들리면 안 되지.‘
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교실로 들어가다 몸을 돌려 대진이와 신석이가 탄 자가용이 떠난 자리를 다시 쳐다봤어. - P158

"제가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다가 공장 다니고 그런 것도 어쩌면 어머니 아버지 잘못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청춘을 보냈고 전쟁을 겪었어요. 그런 아픔을 겪은 것과 제가 힘들게 살아온 게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도요. 그래서 그 공부를 하고 싶기도 해요. 단순히 개인 잘못으로만 보기에는 뭔가 풀리지 않아요." - P162

세상에! 눈이 번쩍 떠지고 등골이 오싹해져. 술에 취해 나오는대로 떠든 말을 다 기억하는 선생님 앞에 앉아 있는 게 어렵기도 하고 좋기도 해.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자랑스러워. 나는 얼른 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뱉고를 천천히 했어. 공장 다닐 때 만난 철룡이 형이 가르쳐 준 말, ‘공부는 평생 도 닦는 거다. 공부하면 안 보이던 게 보인다‘고 한말이 떠올라 술김에 선생님한테 했거든. - P169

엄마 말을 들으며 역사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어. 빈대떡집 아주머니 말씀도 떠올라. 물방울이 바위 뚫듯 평생 꾸준히 멈추지 않고도 닦는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국어 선생님이 노자 이야기하다 들려준 말도 생각나네. 젊어서는 직업마다 다 다른 것 같지만 결국 흐르는 세월 속에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 거기서 큰 도를 깨우친다는 말. 어떤 일을 하든 정성을 다해 하루하루 살다보면 세상 이치를 깨달아 막힘이 없다고. 그래, 돈이나 뭐 그런 거에 얽매이지 말고 그냥 가자. - P191

"어려운 결정 했다. 그런데 집안 형편 봐서 결정한 거지? 그러지 않아도 된다. 너는 니 길을 가야지. 아무도 너를 대신해 주지 못혀. 엄마가 그랬지? 엄마 아버지는 엄마 아버지 몫이 있는 거고 형제들은 형제들 몫이 있는 거여. 니가 다 지고 가려고 하지 마라. 할 만큼 했다. 무역 쪽이 좋으면 가. 난 니가 채소 장사 할 때장사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내 새끼라서가 아니다. 사람은 감이라는 게 있어. 그건 책으로 공부해서 만들어지는 게아니여. 갖고 있는 게 있단 말이다. 넌 그 뭣이냐 너만의 그 무엇이 있어." - P195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으로 뛰듯이 걸어지나가는 사람들, 광화문이라 그런가? 세상을 움직이는 주인공 같아 보이네. 엄마는 환자고 나는 보호자. 넥타이 매고 예쁘게 차려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저 사람들도 집에 가면 엄마 같은 환자가 있을까? 하긴 사람이 태어나면 늙고 아프고 죽는 게 너무나 당연한 건데 그런 사람이 왜 없겠어.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지. 그런데 왜 그당연한 것이 슬프고 마음이 칼로 에이듯 아프고 그럴까? - P208

"그러지. 그런디 너무 마음에 짐 지고 살 거 없다. 사랑이란 게 다 내리사랑이라고 너는 나중에 니 도움이 필요한 사람 만나거든 두 분 만난 줄 알고 챙겨. 타지에서 온 어린아이한테 목숨 같은 소 빌려주는 거,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녀. 잊으면 안 되지." - P218

"시방 하는 일에 마음을 줘야 혀. 지금 만나는 사람, 지금 하는 일이 중한 거여. 모자란 놈이 지난 일에 매달리는 거라고, 감옥살이도 그런 감옥살이가 없지. 지난 일에 갇혀 살면 살아도 사는것이 아녀."
"네, 안 그래도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그랬는데 이렇게 만나 보니까 좀 풀리는 거 같아요."
"그려. 어째 안 그러겠냐. 어려서야 부모나 어른 잘못 만나 그러려니 하지만 어른이 되면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져야 혀. 누구탓도 아니여. 이제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 말이여. 니야 앞가림을 하니 걱정 없다만……." - P233

산이 가팔라지자 엄마는 힘든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시네.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도 나도 말없이 걸었어. 엄마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겠다 싶어 천천히 걸어 거리를 벌렸지. 자식 키우며 남편과 살아온 시간 속에서 당신만의 삶은 얼마나 누려봤을까? 엄마 안에서 저절로 솟구쳐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는 욕망, 희망, 꿈 뭐 이런 걸 얼마나 누리며 살아왔을까 싶어.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이런 거 말고, 주민등록에 올라 있는 이름으로 불리는 우주에 단 하나뿐인 사람으로 존중받고 자기 자신을 마음껏 활짝 펼쳐보며 살아 봤냐는 거지.
부모는 저 낙엽처럼 떨어져 땅을 덮어 주고 거름이 되어 새끼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다 주고 가는 거라고 말하지만, 그건 말하기 좋아 하는 말이고, 어떻게 사람한테 그런 희생을 강요해? 봄과 여름을 마음껏 누리지도 못한 채 스러져 가는 아픔을 강요할 수는 없어. 그건 너무 잔인해. - P245

그때 엄마가 그랬어요. 세상 나무나 풀은 봄이 오면 다 같은 때 잎 나고 꽃피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고. 대추나무처럼 늦되는 나무는 소리 없이 물과 양분을 가지 끝까지 끌어올리며 기다린다고. 그러다 때가 오면, 자기한테 맞는 때가 오면, 잎 트면서 꽃 피고 열매 맺고 그런다고."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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