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자체를 좋아했다고 말하기는 좀 어려운데, 그건 아직까지도 당시의 내 감정을 정확히 해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똑똑하고 친절하고 흥미로웠으며 또한 진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내밀한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우리의 관계를 진정한 우정이라고 말했을 때, 내가 왠지 꺼림칙하고 부담스러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에 대한 그의 호감 속에는 무언가 거북한 압력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로 지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 P14
「말 좀 해보시오, 친구. 무시무시하거나 비밀스럽거나 환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어째서 실제의 인생으로부터가 아니라 꼭 유령이나 저승 세계에서 소재를 취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으니까 무서운 거지 아니 그렇다면 인생은 이해가 되시오? 말해 봐요. 그래 당신은 저승 세계보다 인생을 더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P18
「모든 것이 무서워요. 나는 천성이 심오한 인간이 못 되는지라 저승 세계니 인류의 운명이니 하는 문제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요. 뜬구름 잡는 일에는 도무지 소질이 없다는 얘깁니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진부함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내 행동들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전율하게 만들어요. 생활 환경과 교육이 나를 견고한 거짓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았다는 걸 나는 압니다. 내 일생은 자신과 타인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한 나날의 궁리 속에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나는 죽는 순간까지 이런 거짓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무섭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인가를 하지만 내일이면 벌써 내가 왜 그 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요. - P20
그러나 한편 마음속 멀고 깊은 심연 속에서 나는 그 어떤 거북한 느낌과 함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 속에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의 우정과 마찬가지로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눈물과 맹세를 담고 있는 심각한 사랑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심각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눈물도, 맹세도,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이 달빛 어린 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밝은 유성처럼 타올랐다가 그대로 팍 꺼져버렸으면.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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