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진
저에게는 읽고 쓰는 저녁 시간을 확보하는 게 중요한데요. 다른 회사들은 변수가 많잖아요. 야근하는 일도 생기고요. 이런저런 노동을경험하면서 깨달았어요. 콜센터는 업무 시간 외에 야근하는 경우가없거든요. 전화가 꺼지면 퇴근을 하는 거고요. 집까지 일을 가져가서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해볼 만하겠다 싶어서 일을 시작했어요. 노동하면서도 글쓰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제게 중요한 구직 조건이었어요. - P95

처음 콜센터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사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는데 여기 와서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 오래 버티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다시 이 일을 하게되면서부터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연장선상에서 제 노동을 생각하게 되니 자괴감이 덜하고 이 노동을 좀 덜 미워하게 되더라고요. - P97

강성 민원을 응대할 때는 심장이 벌렁거리기도 해요. 2년을 했는데도 수화기 너머에서 화내거나 짜증내거나 욕설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정말 놀라요. 저는 아직 그렇더라고요. 감정만 상하는 게 아니라 몸이 상하기도 하는 직업이에요. 그런데 왜 감정노동으로 부르게 됐을까요. 많은 서비스직을 감정노동이라고 부르잖아요. 주로 여성이 종사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렇게부르는 게 아닐까 싶어요. 콜센터의 육체노동적인 측면은 어쩌면 그보다 덜 말해지는 게 아닐까요. - P99

송해나
이 사회는 임신한 여성의 몸에는 관심이 없어요. 임신부들도 자조이 들도하면서 현대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임신부들은 열외라고, 현대의학에 버림받았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여성의 몸을 재생산 도구로만 보는 학계의 인식에 의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 피해는 임신한 여성이 오롯이 겪고요. 사회는 모성으로 극복하라고 이야기해요. 이게 극복해야 할 문제는 아니에요. 임신부가 조금만 고통스러운 티를 내면 모성이 없다고 말해요. 여성의 몸은 아기를 낳기 위한 모체로만 존재한다는 거예요. 저에게는 이날 아팠던 기억이 현대의학에 버림받은 아픔으로 각인된 것 같아요. 사회는 재생산에만 관심을 가지고, 아기를 살리는 게 먼저더라고요. - P108

그렇게 열 달 동안 제 몸을 희생하면서 고생한 산모가 출산의 순간에 "나보다는 아기를 살려주세요" 라고 말한다는 건 아기를 낳아보지않은 이들의 환상이 아닐까 생각해요. 아기랑 저는 초면이거든요. 저는 아기를 낳고서 아기를 낳았다는 느낌보다는 아기를 배출했다는 표현이 더 와닿았어요. 아, 나 살았다. 죽지 않았다. 아기가 내 배 위에,
올라온다고 해서 감격스럽지 않았어요. 내 배 위에 올라온 아기는 너무 낯설었어요. 출산하고 울었는데 살았다는 안도감에 운 거거든요. - P109

김명선
몸이 힘들고 아파서 긴장해야 할 것 같아 병원을 나선 후에 터미널에 가서 어디든 제일 빨리 가는 버스를 탔어. 전주로 갔는데 아는 게 있어야지. 한옥 숙박이 하루 7만 원이라는 거야. 나는 한 번도 그런 돈을 써본 적이 없었거든. 혼자면 5만 원에 해주겠다고 하더라고. 나가서 돌아보고 사진으로 다 찍었어. 잠을 자진 않았는데 이부자리가 너무 예뻤고 창에 달이 비치는 거야. 생전 처음으로 6천 원짜리 국화차를 마셨고 최고 비싼 비빔밥을 먹었어. 살아가면서 나를 위해 10만원은 써야겠구나, 싶더라고. 지금까지 날 위해 10만 원을 안 써봤네?? - P134

유지영
이 사건을 들려주자, 평소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던 지인은 "자기도 몰랐겠지만 아마 몸에 그 말을 내내 품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정돈된 말을 나도 모르게 해낸 사건 이후 오드리의 얼굴이 자주 떠올랐다. 나는 이렇듯 몸이 품은 말을 찾아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몸이 품고 있는 말. 그 말을 내가 느낀 그대로 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P140

오드리
제가 당사자지만 저조차 정말 함부로 말하지 못하겠는 게, 하나의 감정으로 결론지어질 수 없는 부분이 훨씬 크더라고요.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배척하면, 행복했던 기억들까지 날아가버려요. 그런데 또 행복했던 기억을 지키기 위해서 안고 있다보면 저 자신이 너무 다쳐요. 그런 모순이 있어요. - P146

봄이
저처럼 해외 체류 경험이 있는 모든 한국 여성, 아시아 여성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떤 불쾌한 경험을 했더라도 그건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요. 또 그때의 경험이 불쾌했겠지만 나를 단단하게 해준 일이라고 생각하셨으면 해요.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살다보면 사회문화적 맥락이 달라서 취약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나를지킬 수 있는 방법을 하나씩만 마음에 갖고 있으면 조금 더 안전할 수있지 않을까요. 물론 모든 혐오가 사라져야 마땅하고, 왜 우리가 그렇게 조심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지만요. 저도 어떤 게 나를 상처받지 않게 할지를 생각하거든요. 나를 지킬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 P156

박나비
그렇지만 그때 사귀었던 사람이 피임을 정말 안 하는 사람이었고, 저랑 사귀기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와도 세 번의 낙태 경험이 있었으면서 피임을 계속 안 했어요. 한국 사회에서 피임에 대한 남녀의 인식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거죠. 낙태 경험이 세 번있는 여자는 피임을 정말 철저하게 하겠죠.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게하지 않았던 거죠. 남자니까. 자기 몸으로 임신할 일이 없으니까요. - P161

유지영
그러므로 만일 "너는 언제 너 자신을 여성이라고 느끼니?"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엄청나게 당황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왜 여성인가. 생각해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알지도 못한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해서 굳이 알아야 할 일도 아니었다. 역사에 설치된 휠체어 리프트가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도 하루를 사는 데 지장이 없는 비장애인처럼. 무언가를 알지 못해도 그게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보통 우리는 그걸 ‘특권’이라고 부른다. - P166

챠코
만일 외국처럼 제3의 성이 한국에 도입된다면 성을 바꾸려는 논바이너리가 있을까요. 주민등록번호가 남아 있는 한 번호 때문에 언제든지 차별받으리라는 걸 알잖아요. 저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에 성별을 나타내는 번호가 아예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사람은 여자, 저런 사람은 남자‘ 라는 법적인 규정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 P171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단호하게 ‘트랜스젠더나 논바이너리는 없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분 주변에도 분명 논바이너리가 있을 거거든요. 저는 분명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중에도 논바이너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랑 같은 사람이 있다. 당신이랑 비슷한 사람이 여기 있으니 같이 살아남자는 이야기를 하고싶어요. 살아남아서 성별 이분법이 타파된 세상을 같이 보고 나서 죽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 P172

정김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내가 잘하는 걸 해야 할까하고 싶은 걸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이 많아요. 그런데 부모님하고 이야기해보면 50대가 되어도 이 질문에 대답을 못 찾고 있더라고요. 열여덟 살인 지금 당장 결정할 것은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안심이 되고요. 제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열여덟 살이 잘 모르는 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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