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때때로 불안이 나의 목을 조른다. 그럴 때면 벽에 붙은 마야콥스키의 사진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죽는 수도 있어, 죽는 방법도 있어"라고 말한다. 나는 로르카를 힐끗 바라본다. "죽임을 당하는 방법도 있긴 있지"라고 그는 말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의 입술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윽고 나는 파베세를 생각한다. 산다는 이 일, 산다는 이 수수께끼로 물불 안 가리고 괴로워했던 그를. 그러면 불안이 한번 더 거세게 나의 목을 조른다. 이러고 누워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당장 바람 부는 거리로 나가 정처 없이 쏘다녀야만 할 것 같은 느낌. 그러나 나는 내 목을 조르는 불안의 모가지를 한 손으로 비틀어 쥔 채 여전히 누워있기만 한다. - P20

그리고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년필은 서랍안에 녹슨 채 그대로 들어 있고, 새 울음소리는 책갈피 속에 더러더러 끼어 있고, 닫힌 책과 열린 책 사이로, 말하는 입과 듣고 있는 귀 사이로 시간은 허망하게 빠져나가고, 담배와 커피와 외로움과 가난과 그리고 목숨을 하루종일 죽이면서 나는 그대로 살아 있기로 한다. 빙글빙글 넉살 좋게 웃으며 이대로, 자꾸만 틀린 스텝을 밟으며 이대로. - P22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내가 이전에 죽음에 대해 품고 있었던 막연한 환상, 어떤 해결 혹은 해답에 대한 기대가 깨져버렸다. - P51

낳그리고 내가 그리도 오랫동안 죽음에 환상과 기대를 품어왔던 것은 내가 나의 삶에서 충분한 만족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나는 실제의 한 죽음을 통해, 죽음은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죽음은 다만 한 문제 자체를 도중에 종결시켜버릴 뿐이며, 더 나아가 그 문제에 해답이 없을지도 모르며, 더 더 나아가 아마도 그런 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이전엔 죽음이란 내게 막연하게나마 어떤 관능과 연결된 것이었다. 집요한 불면 끝에 어느새 가볍고 감미롭게 찾아드는 달콤한 잠처럼, 혹은 보다 적극적으로는 고통의 결정에서 느끼는 쾌락처럼, 죽음은 깊고 짙고 강렬하며 무르익은 관능과 연결된 것이었다. - P52

그러한 행사 절차 가운데에는 내가 여태껏 기대하고 있었던 감미롭고 관능적인 어떤 충족감, 해결감 따위는 없었다. 어쩌면 나는 삶의 편에서 죽음을 짝사랑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죽음의 관념은, 어머니의 실제의 죽음을 통해 죽임을 당했다. - P53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고 간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갖고 있었던 죽음의 관념 혹은 죽음의 감각을 산산이 깨뜨려 나로 하여금 이 일회적인 삶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끔 해주고, 그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잘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용기와 각오를 갖게 해준 것이리라. - P53

이제 나는 무차별적 불행의 이상화 대신에 선택적 행복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

존 스타인벡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떠나는가가 중요한 게아니라 우리가 어디로부터 떠나는가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 P57

글쎄, 시인 이성복의 시(다시 정든 유곽에서)를 인용하자면, 철들면서 변은 변소에서 보지만마음은 변 본 자리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일 변 본 자리가 우리의 현실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왜가볍게 떠날 수가 없는가. 그것은 떠나기 전에 그 자리를 치워야 하는데, 그 치운다는 일이 겁나게 힘들고 어려워 그냥 그 자리에 퍼질러앉아 있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P58

어쩌면, 행복이란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불행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는, 조금은 쓴, 그러나 넉넉한 인식뿐일는지도 모른다. - P59

‘문을 찾을 수 있어 그 앞에서 울 수 있는 자는 아직 행복하여라. (기유빅)’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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