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거슬렸고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태도는 그와 맺고 있는 혈연을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 거다. 무정하고 어떻게 보면 잔인한 처사일 수도 있지만 이런 태도는 미움도 복수도 아닌 자연스럽고 당연한 마음이다. 그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그를 이렇게 불편해하는 걸까. 이런 복잡한 감정과 고민이 마음을 지배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규정하고 있는 그에 대한 내 입장을 부정하는 격이 아닌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생각을 정리하려는 순간에도 그에 대한 반감은 왕성하게 자라나는 덩굴처럼 갈수록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내게는 그를 만나고 난 후의 모든 일들이 충격의 연속이었다. 한꺼번에 흡수되는 정체불명의 감정들과 너무도 많은 힘들이 나를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기습적으로 찾아온 이 상황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편두통이 생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어둡고 위험한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얼굴을 대하면 대할수록 점점 비참해지는 자신을 발견했고 마음이 상했으며 이상하게 억울했으며 기이한 수치심을 느꼈다. - P234
멈추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확인하고 싶지만 동시에 절대로 알고 싶지 않은 어떤 장면 앞에서 나는 정신병자처럼 초조해하며 또렷해지려는 생각들을 메스로 하나씩 찢는다. 이 순간 나를 정말 역겹게 한 것은 이제는 나 스스로가 헷갈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에게 연연하고 있는 나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나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강제된 생각들. 나는 하얗게 질려 있는 팔뚝을 내려봤다. 그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아니냐, 는 그의 말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없다. 나는 허벅지 위에 놓여 있는 팔을 바라봤다. 내 것이 아닌것 같았고 딱딱한 사물처럼 이질스럽게 느껴졌다. 피부 밑에 희미하게 숨어 있는 푸른 정맥이 보인다. 그 속에 바늘을 집어넣고나도 투석기 옆에 누웠으면 좋겠다. 몸속에 남아 있는 피를 투석기에 모두 돌리면 나는 그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투석의 무의미함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창밖은 어둡고 바깥은 깊은 새벽이다. 출근할 시간이다. - 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