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 작가의 [산책]의 미묘한 감정들.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는 단편집에서 이미 읽어본 작품인데, 다시 읽어도 여운이 있는 이야기.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요."
"안다, 하지만 이건 중요한 이야기 같구나."
"뭐가요? 아버지랑 어머니가 이혼한 이야기요?"
"아니, 너와 니 남편에 관련된 이야기 말이다." - P218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뭔가를 질책하는것도 아니었고, 뭔가를 추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마치 뭔가를 갈구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그것을 모른 척했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윽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 P219

그는 한 단계 한 단계 진급을 하며 성취감을 맛보았지만 그의 아내는 자신의 인생이 한 단계 한 단계 점점 내려앉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그런 느낌을 종종 딸에게 호소하곤 했다. 하지만 그때 딸의 나이는 고작 열세 살이었고, 그런 것들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하지만 그때까지 어떤 문제들이 표면에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 P220

손보미가 친밀한 관계 내부에 잠복해 있는 불안과 두려움의 요소를 포착하는 데에 특별히 출중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녀가 직조한 이야기들은 오래도록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려오던 인물의 감정이 어떤 암초를 만나 고조되다가 마침내 폭발하는 격정적 순간을 향해 고요히 나아간다. 언뜻 엉뚱해 보였던 묘사나 대사도 그 격정적 순간에 이르면 제자리를 찾으면서 모종의 역할을 해낸다. - P236

당시에는 쇼코의 모순된 말들에 혼란을 느꼈다.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니면 내게 하는 말이 진짜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두 종류의 편지가 모두 진실이었으리라고 짐작했다. 모든 세부사항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모두 진실된 이야기였을 거라는 걸, 아니, 모든 이야기가 허구였더라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의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을 것이고, 내 편지에 썼듯이 자신을 포함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겠지. - P253

"하지만 증오할수록 벗어날 수 없게 돼." - P264

어디로 떠나지도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렇게 박혀버린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맨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 P265

나는 서울에 살든 고향에 살든 엄마와는 같이 살지 않겠다고 말했다. 엄마도 이제는 자유로워지라고, 집에 남자친구든 친구든 불러서 같이 놀고, 누구의 밥걱정도 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있으라고 했다.
"엄마는 누구보다도 혼자 있기를 바랐던 사람이잖아."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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