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 작가님은 이름만 많이 접하고 책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 책 덕에 처음 읽어봤다. 박완서 소설과는 또다른 매력이~
근데 우리집에 <오정희의 이야기 성서>가 있다! 성경 알고 싶다고 몇쪽 읽다 말았지만(창세기 바벨탑…).

장편은 오정희 문학의 성격과도 잘 맞지 않는다. 앞으로 쓸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는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대신에 ‘오정희체‘라고 할 만한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잘 읽히지 않는 불편한 문체다.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닌데도 술술 읽어내기 쉽지 않은 고유한 문체는, 단편이라는 형식 때문에 도드라지기도 하지만 작가 자신의 말처럼 "서사보다는 이미지나 운율에 상당히 몰두한"결과이기도 하다. - P129

서정주도 마찬가지지만, 김동리의 특징은 ‘문학종교‘라는 점이다. 오정희도 그 자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학을 절대화한다. 문학관으로만 보면 모더니즘적인 문학관이다. 문학 이전에 삶이 있고 세계가 있고 현실이 있다는 관점이 아니라 그냥 문학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의미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 계보가 문학종교의 신자들이다. 문예창작학과라면 자연스럽게 문학에 죽고 문학에 사는 그런 분위기가 되기도 한다. 박범신이 신춘문예 당선소감으로 "문학, 목매달고 죽어도 좋은 나무"라고 말했다는 대목에서도 문학이 인생을 바칠만한 것이라는 믿음이 잘 드러난다. - P139

〈저녁의 게임>은 저녁식사를 마친 뒤 부녀간의 화투놀이 풍경과 그 사이에 낀 대화를 보여준다. 오정희의 소설은 소재에서 특별한 강점을 갖기는 어렵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나 문체, 문장이 상당히꼼꼼하다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꼼꼼한 한편으로 모호하기도 하다. 그래서 오정희 소설은 일종의 ‘분위기 소설‘이다. 뭔가 막연하고 모호한 분위기만 있고, 그 실체는 분명하게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을 유년의 시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인의 시점으로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성인 시점에서의 경험도 있을 텐데 오정희는 유년기의 경험이 좀 더 문학적이라고 보는 것 같다. 시적이라는 면에서는 그 편이 더 문학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이라면 다르다. 이 작가가 과연 한국 사회 변화의 중요한 계기들을 포착해서 작품의 서사를 통해 문제화하고 있는지는 적잖이 의심스럽다. 단편은 사실 이런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도 않다. - P145

오정희에게 문학이란 이 소설에서처럼 앞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이면에 이런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자신의 트라우마도 아버지의 세계도 깨뜨리면 안 되고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성적 일탈이다. 화자에게서 아버지와의 저녁게임과 그 다음의 성적 일탈 게임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오정희에게는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사생활과 문학 행위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도 하나의 모델을 보여준다. - P149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는 <저녁의 게임>에서도 나타난다. 아버지를 존중하지만 그 이면에 아버지가 모르는 생활이 있다. 그런 것이 오정희 문학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정희의 여성이다. 이때의 여성은 표면적으로는 가부장제의 남성 중심적인 질서 속에 편입된 여성이다. 그것이 남성의 시선에서 이른바 여성으로 호명되는 존재다. 그리고 이면에 있는 것은 이 질서에서 삭제된 여성이다. 오정희가 다루는 여성은 후자다. 이것이 한국문학의 여성성 또는 여성문학을 대표하는 한 모델이다. - P154

<나목>은 그런 공식에 잘 들어맞는 주체 형성 과정을 서사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머니의 경우 전쟁과 가족 상실이라는 트라우마적 경험의 충격을 받은 이후에는 생의 의지를 더 갖지 못한다. 그래서 새로 설이 돼도 떡국을 끓여주지 않는다. 그런 조건에서 이경이 어머니와 운명을 같이 하지 않고 분리돼 나와서 독자적인 삶을 살게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출발점이 되는 소설이다. 1970년작으로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상징적 의미를갖는 것이다. - P102

중산층은 흔히 ‘속물‘로 비하된다. 속물적인 중산층 의식에 대한 해부가 박완서 문학의 특기다. 실은 작가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그리도 속속들이 잘 아는 것이다. 다만 박완서의 특징은 그것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포함되어 있기는 해도, 거리를 두며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는다. 완전히 동화되면 이에 대한 자의식을 가질 수가 없다. 몸은 물속에 있지만 고개는 들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 P105

작가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박완서 자신이 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균열이 있다.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박완서 문학이다. 완전히 이 세계에 동화됐다면 창작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결여가 있고 공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창작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그의 문학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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