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의해야 할 것은, 민중생활에의 헌신이 민중에 대한 아첨을 의미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현실의 민중의 심리 속에는 이중성이라는 왜곡된 요소가 들어 있게 마련이다. 즉, 민중은 반드시 자유로운 사회를 지향하기보다는 오히려 지배자를 동경하는 심리에 빠져 있기 쉬운 것이다. - 김종철 - P131
‘김종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당연히, 그에게 국한되는 주제가 아니다. 지난 1세기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인 ‘식민주의와 발전주의 콤플렉스‘를 복잡하게 사유하는 핵심적인 사회운동이다. 이 글은 ‘김종철 문학(narratives)‘ 중에서 특히 그의 식민주의와 프란츠 파농에 대한 입장에 초점을 맞춘다. - P132
포스트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은 자원, 노동력 약탈 같은 직접적인 차원에서는 식민지배를 벗어났지만, 문화와 의식 차원에서의 서구중심주의는 계속되고 있다는 문제의식과 비판을 뜻한다. - P132
식민주의는 외부의 적이 원래 주민을 그들의 땅에 강제적으로 이식(移植)하는 통치다. 주민들은 자기 땅에서 유배, 징역살이를 하는 것이다. 자기 땅이 곧 자신의 감옥이다. 식민주의는 원주민(原/住民, 원주민에 대한 타자화된 어감을 문제제기하는 의미에서 ‘원/주민‘ 이라고 쓴다)이 식민이 되어 자기 땅에 강제로 뿌리를 내려, 자신이 자신을 묶어놓은 상태다. - P136
파농은 이렇게 표현했다. "프랑스인이 인간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인간임을 증명하는 자연적 배경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자연이 아니다. 적의를 품은 자연이다." - P137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과 달리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는 변증이 일어나지 않는다. 전자는 모순과 투쟁이 있지만, 후자는 동일시가 이를 대신한다. 파동의 가장 큰 업적은 헤겔과 맑스로 이어지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재해석, 전복시켰다는 데 있다. 헤겔 변증법의 핵심은 역동적 상호관계다. 둘의 위치는 변화한다. 그래서 타인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고, 노예의 투쟁은 주인을 구원한다. 덕분에 1980년대 한국사회에서 잠시나마 "노동자가 투쟁으로 자본가를 해방시킨다"는 논리가 가능했다. - P138
파농의 ‘흑인‘은 헤겔식 노예 개념보다 훨씬 종속적이다. 상대방에 대한 동일시 욕망 상태에서는 변증이 발생할 수 없다. 당연히 상호 해방의 가능성도 없다. 욕망의 특징은 절대성, 일방성, 그리고 주체적 종속이기 때문이다. - P139
재차 강조하면, 식민주의의 정의 중 하나는 자신의 존재를 지배자가 규정하는 체제에서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상태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나를 동성애자라고 정의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나를 ‘여성‘, ‘유색인종‘ 이라고 지칭하는 너는 누구인가. ‘우리‘가 이 호명을 의심하고 거부할 때 기존 질서는 균열을 일으키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파농에게 무장투쟁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정신분석 연구, 이를 언어화하는 작업은 별개가 아니었다. 이것은 김종철에게는 식민주의(발전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문학, 실천으로서의 글쓰기였다. - P139
파농에게 해방은 ‘자기 찾기‘ 혹은 ‘선진국처럼 되기‘가 아니라 새로운사회성으로의 이행이었다. 여기에는 지역모순, 농촌문제, 환경, 생명 이슈가 핵심이다. 김종철은 파농의 도농(都農), 지역문제에 대한 입장을 중요하게 언급한다. 지역 분권화의 절대적 중요성 그리고 정치의 중심이 도시가 되어서는 안되며, "저개발 국가의 정당 지도자들은 마치 페스트를 피하듯 수도(首都)를 피해야 한다"는 파농의 입장을 자세히 분석한다.
도시 중심, 변혁 주체로서의 농민에 대한 경시, 인류가 개척하지 않은다른 길을 가지 않고 기존의 자본주의체제와 경쟁한 사회주의의 문제는, 김종철의 문학의 핵심 개념인 ‘땅의 노래‘와 맞닿아 있다. ‘문학의 종말‘도 이와 관련이 있다. - P142
한국사회에서 ‘포스트‘처럼 잘못 통용된 언설도 없을 것이다. ‘포스트‘는 시간적 연대 개념이 아니라 인식 주체의 위치성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주관성을 보편성으로 만든 백인 남성의 입장이 ‘모던‘ 이라면, 다른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일 수밖에 없다. - P143
인간은 노력하는 한 죽을 때까지 방황한다. 혼란과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자원 삼아야 한다. 피억압자의 자기혐오, 자기부정, 자기분열에 대한 분노와 고통 역시 우리에겐 지적 자원이다. ‘우리‘가 벗어나야 하는 것은 우리가 서구의 타자라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타자 역시 우리 자신이라는 의식이다. 그렇다고 진정한 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점이 포스트콜로니얼과 민족주의의 차이이다. 자기찾기란 과정이지 도달점이 아니며,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 P145
김종철도 혼란과 외로움으로 고통받았을지 모른다. 그가 염원한 ‘공생공락의 가난한 사회‘는 그래서 귀하다. 김종철 이후의 문학은 인류세 시대에 외롭고 방황하는 이들을 조직하는 일이 아닐까. 《녹색평론》에 통문(通文)을 전하는 일이 아닐까.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이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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