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이란 내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처음으로 ‘청자‘가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다.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서도 타인과 소통할수 있구나, 한계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고유한 이야기가 될 수 있구나‘ 홍수영 씨는 생각했다. "제 아픔을 말한다는 게 결국 타인에게 다가가 생각의 균열을 만드는 일 같아요." 그가 가진 연약함은 다른 연약함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러자 질병은 더 이상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 P21

‘엄마 아빠가 날 팔아넘길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해질 때마다 동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목우야, 괜찮아. 그거 망상이야"라고 이야기해주었다. 환청과 망상은 다른 정신장애인 동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그때 처음 깨달았어요." - P23

‘아프면 아픈 대로의 삶이 있을 것‘이라고 정씨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울상이 된 지인들의 걱정과 위로를 받으며 ‘괜찮다‘ 안심시키느라 매번 진을 뺐다. 사회가 질병을 얼마나 낯설어하는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아픈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쉽게 대상화되었다. 아프다는 사실보다, 아픈 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 때문에 슬펐다.
정씨는 질병과 함께 사는 소소한 일상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한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암 환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싶었다. "아픈 사람이 질병에 대해 자꾸 얘기해야 덜 불편해질 것 같았어요. 이게 일상인 사람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요." - P25

건강했던 시간보다 질병과 같이 산 세월이 길어지면서 김씨가 깨달은 사실은 몸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픈 몸을 ‘잘 데리고 살아갈’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다섯 번 수술해서 멀쩡했는데 여섯 번도 받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마음을 버리고 나니 몸의 변화를 좀 더 편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김씨는 아팠던 시간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덕분에 하고 싶은 일들을 더 이상 미루지 않는 사람이 됐다. "나으면 해야지 했는데 그 시간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었어요." - P28

건강했던 몸을 마냥 그리워하지 않게 된 건 ‘느린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다. 장애인권동아리 활동을 하며 걷고, 말하고, 문자를 치는 데에는 사람마다 속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동안 자신이 빠른 속도로 추월해왔던 사람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안씨는 아픈 몸을 감추며 ‘괜찮은 척’하지 않았다. "아프고 약한 사람들이 강해져야 하는 게 아니에요. 아프고 약한 채로 살다가 편하게 죽고 싶어요."
‘나는 아마 낫지 않을 것이다.’ 이 한 문장을 쓰기까지 5년이 걸렸다. 안씨가 쓴 책 〈난치의 상상력>(동녘, 2020)에 나오는 문장이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싶었어요." - P30

건강은 추구해야 하고 질병은 퇴치해야 하는 이분법적 세계에 ‘질병권(아플 권리)’이라는 새로운 권리를 디딤돌처럼 놓았다. 아픈 사람을 빨리 회복시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아픈 상태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건강한 몸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아픈 몸은 열등해진다. 질병은 병원으로, 요양원으로, 그 밖의 각종 시설로 ‘처박힌다.’ - P34

한 사회가 ‘아픈 몸’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죽음의 미래를 엿보는 일이기도 하다. 질병은 죽음을 이해하는 소중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질병과 죽음에 관한 각자의 내밀한 경험이 더 많은 보편의 이야기로 나눠질 때, 삶도 조금은 덜 잔인해진다. - P35

의료를 비롯한 모든 시스템이 아픈 사람을 빨리 회복시키는 걸 목표로삼고 있지만, 저는 아픈 사람이 회복되지 않더라도 아픈 상태로 이 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는 없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 P37

병원에서 버려졌다는, 믿고 있던 시스템에서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는 거죠. 그래서 환자가 호스피스에 오면 저희가 제일 처음하는 일 중 하나가 ‘안심‘시키는 일입니다. ‘당신은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책임을 지겠습니다.’ 통증이 없게 하고 증상을 조절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이 이런 커뮤니케이션입니다.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이 질환의 예후는 불가피하지만 이 시스템에서 당신은 아직 버려지지 않았고 우리가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어떻게 보면 호스피스·완화의료의 핵심입니다. - P41

반대로 어머님들은 체력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걱정하느라 남은 시간을 잘 못 보냅니다. ‘내가 죽고 나면 내 자식, 내 남편은 어쩌지‘라는 근심걱정에 꽉 차 있어요. 제가 어머님들에게 자주 드리는 말씀은 ‘이기주의자가 돼야 한다’예요. 아버님들에게는 이런 얘기를 안 해요. 할 필요가 없어요(웃음). 남은 시간을 어떻게 자기를 위해 써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거죠. - P49

호스피스 제도는 돌봄을 훈련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해요. 죽음을 수용하는 것도 ‘용기‘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연약해진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더 큰 ‘용기‘라고 할 수 있거든요. 돌봄을 받아들이는 훈련은 환자와 보호자가 그냥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잘 아는 의료진의 예후 예측, 연명의료 결정에 대한 의료진과의 의사소통이 얼마나 충분히, 또 깊이 이뤄지는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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