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여행이란 상자 밖에서 보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에 제자리에서 뱅뱅 돈다는 느낌, 그것이 현실의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더 적극적으로 여행을 가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늘 마법이 풀린다는 것.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터미널에서 내리는 순간, 집의 현관문을 여는 순간 끝난다.
어떻게 하면 마법을 이어 갈 수 있을까. 여행의 마법은 신용카드 명세서만 기억한다. 허리띠 풀고 카드를 긁은 기록이 거기있다. 꿈에서 깨지 않고 그 꿈을 일상에서도 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 P33

어딜 간다고 나아질 일이 아니라는 걸 다른 곳에 가서야 알게 될 때가 있다. ‘다른 이를 빗대어 나를 보는 일‘을 하려고 떠났다 나라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되어 버려서.
지금도 종종 사진 한 장 없는 여행을 한다. 여행 사진을 SNS에 올리지 않는 것과 사진을 아예 찍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일이다. 전자는 경험을 지극히 사적인 즐거움의 영역에 저장하는 일이지만, 후자는 ‘배터리 없음‘을 알리는 빨간불이 내 안에서 번쩍거리는 상황이다. 사진 몇 장만 남은 여행보다 조금은 더 울적한, 사진을 찍을 여유조차 없었던, 길 위에서 보낸 어떤날들. - P53

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 대해서도 아는 것 하나 없던 어린 시절, 그저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일념만으로 매일같이 떠나고 도착하는 장소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 본 사람이라면 독일에서 23년째 살고 있던 시인 허수경이 고향 기차역인 진주역을 인터넷에서 찾아본 뒤 자신의 심정을 적은 글에 애틋함을 느낄 것이다. 가난한 생김새의 오래된 역은 이제 번듯한 한옥형 역사로 다시 태어났다. 그 사진 앞에서 허수경은 사라져 버린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이 지상에 아직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내가 살았던 어느 곳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 P79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마다 주력하는 관람 포인트가 있는데, 나는 정원과 종교시설 그리고 오래된 건물을 좋아한다. 외국에 나갈 때마다 정원을 허겁지겁 구경하다 처음 소쇄원에 방문했을 때 느낀 경이감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원하던 정원의 모든 것이 소쇄원에 있었다. 소쇄원은 그저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다. 자연물처럼. 벽오동과 목백일홍, 매화와 복사나무 그리고 단풍나무가 모두 소쇄원이었다. - P81

박연준 시인의 글을 읽으며 이런 ‘뒹굴뒹굴‘을 사치라고 부르는 사람이 역시 나만은 아니라는 데 감격 또 감격했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그저 존재하는 일. 뭐든 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까지 멍 때리기.
베를린에서의 나는 하늘 사진만 잔뜩 찍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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