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슨 웰스가 일러 주었듯 해피 엔딩인지 아닌지는 어디서 이야기를 끊느냐에 달려 있다. - P8

남자가 말했다. "원래 말이 많은 편인가 봐요?"
여자는 돌길 중앙의 광장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시가와 축구 셔츠를 팔고 있는 두 10대 소년에게 눈을 돌리고는 손가락으로 머리칼 끝을 빗질하며 이 말을 곱씹었다. 남자는 여자보다 어지간히 나이가 많았고, 그런 그에게 이 세상이 남자인 그뿐 아니라 여자인 그의 세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전달하기란 만만찮은 일이었다. 합석을 제안함으로써 남자는 모험을 감수한 셈이었다. 어쨌거나 여자란 여자 딴의 삶과 성욕을 장착하고 오기 마련이니까. 남자는 미처 깨닫지 못한 거다. 여자가 스스로를 조연으로 치부해 가면서까지 남자인 그를 주연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 P9

원래 말이 많은 편인가 봐요?
느끼는 대로 삶을 말하고 표현하는 것도 하나의 자유이지만 우리는 대개 이 자유를 택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 내가 엿본 여자의 내면은 하고 싶은 말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도 불가사의하게 다가오는 말들로 살아 생동하고 있었다. - P12

처음엔 배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곧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깨달았다. 혼돈은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대상인 양 포장되지만 난 차츰, 실은 우리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이야말로 혼돈이라고 믿게 됐다. - P14

삶은 허물리고 무너진다. 우리는 와해되는 삶을 지키려 뭐든 손 닿는 대로 부여잡는다. 그러다 깨닫는다. 그 삶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 P14

이 남자는 행사 자리에서 만난 여자들 이름을 십중팔구 잊는 편이어서 어쩜 저럴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그래서 늘 이름 대신 누구누구의 와이프 또는 여자 친구라고 칭했다. 마치 그 여자들에 대해선 누구의 배우자 또는 동반자인지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에게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인 걸까? - P18

보트로 헤엄쳐 돌아가지 않은 것이야말로 내 평생 가장 잘한 일이었다. 한데 그 대신 어디로 가야 좋단 말인가? - P20

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 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낸다는 건 그 뒤에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다는 의미다. 모두가 즐거이 누리는 가정, 순조롭게 기능하는 가정을 짓는 일은 수완과 시간과 헌신과 공감 능력을 요한다. 다른 이들의 안녕을 건설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넉넉한 인심에서 비롯하는 행위다. - P21

그리 손수 짓고 꾸린 가정집에서 정작 스스로는 겉도는 느낌과 대면하는 순간, 사회와 그 여성 불평분자들이라는 한층 큰 차원의 이야기가 촉발된다. 그간 희망과 자부심과 행복감과 다른 여러 모순되는 감정과 분노 가운데 본인이 연기해 온 - 성립시켜 온-사회적 이야기에 아주 무릎 꿇지 않는 한, 그는 이야기 자체를 바꿔 놓을 것이다. - P22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자유를 쟁취하고자 분투한 사람치고 그에 수반하는 비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 P26

불확실하던 그 시절, 내가 불확실에 내재된 불안을,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음에서 오는 불안감을 감당할 수있게 해 준 얼마 안 되는 활동 중 하나가 글쓰기였다. - P41

소설을 쓰려면 수백 시간을 가만히 앉아서 보내야 한다. 장거리 비행을 하듯. 단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는 알 수 없고 그저 대략적인 경로 정도만 잡힌 장거리 비행인 셈이다. - P46

자기가 쓴 책들에 대해, 그리고 아파서 집에 있는 자기 와이프(이름은 없었다)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겐 질문 하나 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 P62

나와 같이 산책하던 남자 동료가 여자들 이름을 좀처럼 기억하는 적이 없는 사실에 내가 느낀 반발감을 납득하는 데 도움이 됐다. 이는 내 가장 친한 남자 친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로(이 친구는 ‘푸른 수염‘이란 별명마저 붙었다), 이혼하기 전까지는 와이프들 이름을 절대 언급하는 법이 없었다. - P63

그럼에도 남자들이 쓰고 여자들이 연기해 온 이 여성성이 21세기 초입을 여전히 기웃거리는 기진한 유령이라는 점만은 명백했다. - P77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랑 없는 삶이 시간 낭비임을 알았다. 사르트르를 향한 그의 꾸준한 사랑은 호텔에서 생활할 것, 사르트르와 가정을 꾸리지 않을 것, 이 두 가지를 전제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은데, 1950년대만 해도 이런 선택은 지극히, 어쩌면 보부아르 본인이 자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 P85

아버지가 세계에 나아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때, 우리는 그게 아버지가 응당 해야 할 몫이라며 용인한다. 어머니가 세계에 나아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때는 어머니가 우리를 버렸다고 느낀다. 이리도 모순되고 사회의 가장 강력한 독기를 머금은 잉크로 쓴 메시지를 어머니가 용케 건져 내는 게 가히 기적이다. 그러니 이성을 잃지 않을 수가 있나. - P106

장례식에서 울었던 남자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연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자기도 한동안 방향 감각을 잃고 지냈다고 말해 줬다. - P123

내게 헤엄치는 법과 노 젓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냉장고가 비지 않도록 타이핑 일을 손에서 놓지않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고 계속 그 일들을 해 나가면서 어머니보다도 더 가차 없이 살아야 합니다. - P157

이런 것이 여자를 위해 마련된,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손에 쥘 수 있는 가부장제의 왕관에 박힌 보석들이다. 눈물지을 순간이 넘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 보석들에 손을 뻗느니 검고 푸르스름한 어둠을 두 발로 통과해 지나는 편이 낫다. - P161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은 삶의 비용으로 만든 글이며 디지털 잉크로 만들어졌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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