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먼저 읽고 서평 읽기.. 문학평론가의 평론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비판적인 서평이다

황정은 문학도 굳이 분류하자면 소수문학 또는 소수자문학의 갈래에 속한다. 중산층 계급의 작가가 자기 계급에 혐오감을 갖게 되면 미학적 모더니즘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보들레르나 플로베르가 대표적이다. 또한 그렇다고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을 완전하게 내면화한 것은 아니어서 그에 대한 회의든 거부감이든 거리를 두게 되면 특이한 ‘환상문학‘ 같은 것이 탄생하게 된다. 이런 요소들이 황정은 문학의 토대다. - P275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황정은 소설에서는 아직 작가 황정은이 세계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로 아직 나아가지 않은 단계다. - P278

"계속해보겠습니다"는 나나의 반복적인 문형인데, ‘포뮬라‘라고도 한다. 들뢰즈가 멜빌의 〈바틀비〉를 평하면서, 버틀비가 "안 하고 싶습니다" 라는 문형을 반복하는 것이 멜빌의 포뮬라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계속해보겠습니다"를 버틀비의 "안 하고 싶습니다" 에 해당한다고 보는 평자도 있는데, 말은 된다고 생각한다. - P280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면서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는 데서 의미를 찾는다. - P280

미국 소설에서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고 하면 흑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흑인은 존재하되 존재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런 사회적인 규정이 가능하다. - P292

이 작품에서 소라, 나나, 나기도 ‘나‘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자신을 가리킬 때조차 "나나는", "소라는"이라고 말한다. 확실한 자기 주체성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는 1인칭 대명사는 그냥 갖다 쓰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어떤 실질이 충족돼야 한다. 아무나 ‘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을 필요로 한다. ‘나‘라는 것은 책임성 혹은 주체성의 자리고, 그런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인칭은 대단한 인칭이다. 3인칭은 이런 역할을 피해갈 수 있다. 그래서 이름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은 면피하는 것이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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