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왕국』 또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해체와 탈주의 이야기다. 특히 그림책을 통해 상상미술관(musée imaginaire)을 구현한 미술실 장면에서는 아르침볼도, 클림트, 반 고흐, 로댕, 모네와 같은 과거의 작가들은 물론, 마티스, 모란디, 부르주아, 니키 드 생팔, 뱅크시 등 20세기 작가들도 자연스럽게 전시되어 독자들에게 발견의 재미를 선사한다. 팔레트를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이 비춰진 거울 -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연상시킨다 - 이나 책상 위에 놓인 도화지 속 그림책 장면은 미장아빔(mise-en-abyme)을 통한 메타적인 미술사 해석을 반영한다. - P139
미장아빔은 문학이나 회화에서 예전부터 사용되어온 기법으로, 그림 속에 거울과 같은 액자가 들어있거나 소설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작품 속에 다른 작품이 삽입되어있는 것을 뜻한다. - P140
그림책은 세 번 읽는 책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그리고 나이가 들어 인생을 돌아보면서 읽는다는 뜻이다. 필자로 말하자면 아무리 애써도 두 번밖에 못 읽겠다. 어렸을 때 그림책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 P143
살다가 힘들 때….… 돌아가고 싶은 때,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엄마와 함께 책을 읽은 시간들이 ‘그때’를 만들어 주신 거예요. 힘들 때 가장 쉽게 스위치오프를 할 수 있는 게 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독서는 즐겁자고 하는 것인데, 좋아서 읽는 독서의 목표에 가장 가까운 것은 어린 시절의 독서잖아요. 함께 그림책을 읽는 건, 아이에게 앞으로 사는 게 힘들 때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신 거예요. - P145
어머니가 읽어주신 그림책은 그림책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 시간의 느낌이 기억납니다. 어머니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그림과 글자를 관찰했던 포근한 순간들입니다. 함께하는 시간과 그 순간의 감각이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P147
어린이 곁에는 감동하는 어른이 있어야겠지요. 감동하는 어른이란 세상을 관찰하며 경직되지 않고 그 경험을 아이와 나누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어린이를 존중하는 어른입니다. - P148
이 모티브는 ‘곤경에 처한 아가씨(damsel in distress)‘ 라고 일컬어지며 서양문화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되풀이되며 강화되었다. 가장 오래된 원형은 그리스 신화 속에 페르세우스가 안드로메다를 구해내는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 P152
이야기를 빚는 자들이 무엇을 괴물로 만들어 없애려하는지 들여다보면, 이들의 공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남자를 죽이는 용이 여자라면, 여자가 용과 같은 힘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놀랍지 않은가. 용을 죽이고 아가씨를 구하는 많은 이야기 속에서 용이나 뱀은 ‘남성의 잣대로 볼 때’ 감당하기 어려운 부정적인 여성성이다. 그래서 죽인다. 그리고 오로지 남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나약한 여성성만 구해내 품에 안는다. 여성이라는 한 존재 내에서 부정적인 여성성을 척살하고, 나약한 여성성만을 걸러내는 취사선택이 이루어진 것이다. - P155
이 이야기에 길들여지며 여성들은 왕자님 혹은 기사가 백마를 타고 나타나 자신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어주길 기다리는 존재가 되었다. 이야기는 그래서 힘이 세다. 먼저 이야기 속에서 그런 존재가 되고, 그 다음 현실에서 실제로 그런 존재가 된다. 이야기는 현실을 이렇게 빚는다. 여성은 왕자에게 구원을 받는 아름다운 로맨스에 세뇌되어, 삶의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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