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윤이 낫고 나서도 읽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우윤의 병이 재발할까봐, 혹은 다른 나쁜 일들이 딸을 덮칠까봐 긴장을 놓지 못했다. 언제나 뭔가를 쥐어뜯고, 따지고, 몰아붙이고, 먼저 공격하고 싶었다. 대신 책을 읽는 걸 택했다. 소파에 길게 누워 닥치는대로 읽어가며,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키웠다. 죽을 뻔했다 살아난 아이의 머리카락 아래부터 발가락 사이까지 매일 샅샅이 검사하고 싶은 걸 참기 위해 아이가 아닌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낙관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한 게 없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키워놓았더니 미국으로 날아가버렸지, 내 딸…… 난정은 우윤이 보고 싶어 내내 우는 대신 계속 읽었다. 읽고 읽었다. 소원을 비는 사람처럼 책 탑을 쌓았다.
딸이 남기고 간 빈 공간을 책으로 채웠다.
"너같이 많이 읽는 애는 언젠가 쓰게 된다."
어느 날, 어쩌다가 그런 생각에 다다랐는지 심시선 여사가 난정에게 말했던 것이다. - P23

우윤은 어렸을 때 아팠고, 건강을 되찾고 나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젊음 같은 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함께 아팠던 친구들을 보면 곧 죽어도 후회 없을 만큼 용감해지거나, 언제나 죽음을 의식하며 조심스레 살아가는 듯했는데 자신은 역시 후자에 속한다는 점이 내심 못마땅했다. 그래서 와이키키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든 서핑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말로 서핑에 끌렸다기보다는 우윤이 생각하기에 가장 무모하고 위험한 운동인 것 같아서였다. 죽음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끔은 마주해야 했다. 나는 특별히 용감하지도 않지만 겁쟁이도 아니야, 스스로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일부러 아침을 일찍 적게 먹고 현금도 넉넉히 챙겨왔다. - P95

길이 한산해지자 유아차 한 대가 가게 앞에 멈추었다. 기세 좋게 유아차에서 내려온 아기가 부모에게 장난감을 꺼내달라고 하는 듯했다. 그런데 유아차 아래칸에서 나온 장난감은 미니 쇼핑카트였다. 하필 아기가 상하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숱이 적고 배가 통통했으므로 그것을 밀고 의기양양 걸어가는 모습은 너무나 마트에 온 아저씨 같았다……… - P107

어쨌든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평생 공격성이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공격성이 발현되든 말든 살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기분좋게 취했던 이가 돌변하기 직전의 순간을 알았고, 발을 밟힌 이가 미처 내뱉지 못한 욕설을 들었고, 겸손을 가장한 복수심을 감지했다.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선, 어찌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 첫번째 남편도 두번째 남편도 친구들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 P125

"내가 처음 장가와서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장모님한테 장모님이 담근 김치 먹고 싶습니다, 했다가 나를 돌아보시는데…. 어우, 눈빛이 잊히지 않아."
태호도 너스레를 떨었다.
"자기는 그렇게 눈치가 없더라? 우리 엄마한테 무슨 김치를 만들라고, 김치를 사먹는 게 자랑인 집이라고."
"그때는 몰랐지." - P144

박물관을 나와, 느리게 달리는 버스를 타고 와이키키로 향했다. 차로 십오 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 동안 달려서 한국과 비교가 되었다. 도로 사정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최저 속도로 달리는 듯했다. 정류장은 촘촘하고 보조기구를 하나씩 짚은 노인들이 주로 이용했으므로 혹여 누가 넘어질까 버스 기사는 부드럽고 일관된 운전을 했다. 급정거에 급출발, 급커브가 일상다반사인 한국버스에서는 책을 잘 읽지 않지만 하와이의 버스에서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 P158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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