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분투하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렇게 흉터를 지우기 위해 애쓰다간 인생 전체가 지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 비로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하고 절망하던 이들은 남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 P161
어떤 얇은 내 안으로 들어와 차곡차곡 쌓이지만 어떤 앎은 평생 쌓아온 세계를 한 방에 무너뜨리며 온다. 혁명 같은 그런 얇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작은 고양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는 걸, 나는 동물적으로 알았다. - P204
"나는 장애인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어. 그랬던 내가 그 불쌍한 장애인들 속으로 떨어졌으니 인생이 비참해 죽을것 같았는데, 그때 태수가 왔지. 그런데 그 장애인이 사람으로 보이는 거야. 불쌍한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 태수는 나한테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줬지, 충격적으로." 나는 이 말이 참 좋았는데, 그 순간 경석이 ‘그냥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 P216
나는 짐승 같은 현실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러나 요즘의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 좋은 비장애인이나 좋은 이성애자가 되고 싶다는 말처럼 이상하게 들린다. 이제 나는 좋은 동물이 되고 싶어졌다. 40년을 살면서 한번도 배워보지 못한 그것이 앞으로 살아갈 생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 P221
"인간도 동물이다. 우리는 동물을 위한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한 세대 안에 이룰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슬로건이었다. 모르는 단어가 하나도 없는데 이토록 낯설고 아름답고 혁명적인 조합은 처음 보았다. 새로운 세상을 품은 그들이 온다. 가슴이 뛴다. - P232
내가 충격을 받았던 건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들 옆에 서자 세계가 온통 문제투성이로 보여서 나는 정말로 충격받았다. 내가 타고 온 버스도, 지하철도, 내가 다닌 학교도 모두 문제였다. 나는 마치 중력이 다른 행성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말하자면 그건 경쟁하는 세계에서 연대하는 세계로, 적응하는 세계에서 저항하는 세계로, 냉소나 냉담보다는 희망을 더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공동체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 가장 좋은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나자신일 것이다. 중력이 다른 세계에선 다른 근육과 다른 감각을 쓰면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노들은 나에게 가르어주었다. 다르게‘ 관계 맺을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 P247
나의 글쓰기 선생님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같은 표현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글쓰기란 ‘굳이 말로 설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물권의 세계에 눈을 뜬 뒤 나는 번번이 글쓰기에 실패한다. 도저히 기존의 언어로는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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