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공간 모리스 블랑쇼 선집 2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 그린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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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은 매혹의 위협이 있는 고독을 긍정하는 공간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부재라는 위험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시간의 부재 속에는 끝없는 새로운 시작이 군림한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되고, 나와 관계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익명의 것이 되어 무한히 흩어진 가운데 무수히 반복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러한 매혹 아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에 의해서 언어 안에서 절대적인 공간과의 접촉 아래 머무르는 것이다. 그곳에서 사물은 이미지가 된다. 또한 거기서 어떤 형상을 암시하는 이미지는 형상이 없는 것에 대한 암시가 되고, 부재 위에 그려진 형태의 이미지는 부재의 형태 없는 존재가 된다. 더 이상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때, 아직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때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불투명하고 공허한 열림이 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왜 이러한 본질적인 고독, 그 속에서 감추어진 것이 드러난다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이 고독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 박혜영 번역의 책세상 판으로 읽고 있다.. 주석이 불가능한,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아름다운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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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별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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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출신 작가의 책을 읽는 것은 항상 어떤 긴장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1973년 9월 11일>이라는 숫자는 마치 '주홍글씨'와 같은 <낙인>처럼 그들의 몸에 새겨져, 어떤 이야기를 하든 그 욱신거리는 상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드러내든지, 아니면 감추든지..

 

1973년 9월 11일, 쿠데타군의 집중포화를 받던 대통령궁(모네다궁)에 남은 칠레 대통령, 선거로 선출된 최초의 사회주의자라 불리던 아옌데는 라디오를 통해 국민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한다..

 

역사적인 순간을 맞은 지금, 저는 인민들의 충정을 제 목숨으로 보답하려 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칠레 인민들의 존엄한 의식 위에 뿌린 씨앗은 결코 파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들이 무력을 장악했으니, 우리를 짓밟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회적 변혁의 과정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범죄행위로도,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 편이며,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민입니다.

 

아옌데는 노동자, 여성 동지, 전문 직업인, 그리고 투쟁을 지원했던 청년들에게 각각 짧은 고마움의 인사를 남긴 뒤, 칠레의 인민들에게 마지막 고별사를 남기고 결국 대통령궁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인민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희생돼선 안 됩니다. 저들에게 압도당해서도, 살육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저들의 모욕을 참지도 말아주십시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 머지 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

 

당대 숨죽이며 상황의 추이를 목격하고 있던 칠레의 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떤 심정으로 그 라디오 방송을 들었을까.. 물론 쿠데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떠나야 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고, 학살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칠레가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다시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쿠데타군의 무력에도 굴하지 않고, 대통령궁에 끝까지 남았던 아옌데, 그리고 소수의 전사들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부터 7년 후, 대한민국 남쪽의 조그만 도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쿠데타를 주도했던 세력들이 파견한 무장 계엄군이 도청을 포위했을 때, 소수의 전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도청에 남았고, 바로 그들로 인해 한국의 정치사는 쿠데타 세력들의 의도와는 달리 새롭게 전개될 수 있었다.. 목숨을 걸었던 그들의 용기, 그리고 죽음은 쿠데타 세력들에게, 그리고 그 상황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치명적인 "부끄러움"의 흔적을 남겼고 그 <부끄러움>이 일종의 혁명적 감정으로 이후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전해지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하나의 신화를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전 <80년 오월이 남긴 부끄러움이라는 정서가 이후 한국 현대사에 미쳤던 정치적 영향>이라는 전혀 아카데믹하지 않은-뜬구름 같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글을 쓰면서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은 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시내에 울려퍼졌다는 확성기의 목소리였다..

 

존경하는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도청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도청을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볼라뇨의 작품세계-그러고보니 <칠레의 밤> 이후 겨우 두 번째 작품이지만-를 형성하는 근원적인 정서는 바로 그 <부끄러움>, 혹은 그러한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념을 지켜냈던 이들이 있었다는 데서 비롯되는 <프라이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레 사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공식적인 장에서 상영된 <칠레 전투>를 본 후 어떤 여대생이 우리에게 이런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럽다며 울먹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 그런 자부심.. 누군가의 피가 묻은.. 그래서 부끄러운.. 그런 자부심..

 

물론, 역사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닌 <소설가> 볼라뇨의 작업은 과거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닌, 픽션을 통한 재구성이었다.. <칠레의 밤>에 등장하는 것처럼 그 혼란했던 시기 책의 세계에만 파묻혔던 신부의 독백을 기록하거나, 아니면 시인이자 공군 중위, 그리고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했던 한 남자의 악의 연대기를 쓰는 작업은 바로 그 픽션화의 산물이었다..

 

왜, 그가 당대 현실의 주인공들이 아닌, 이런 주변부에 속하는 인물들에 관심을 가졌는지를 따져묻는 것은, 볼라뇨의 작품세계 전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진 다음의 작업일 것이다.. 당분간은 볼라뇨의 세계를 계속해서 추적해나가기로 하자..

 

<부적>,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세계로..

 

 

cf. 그러고보니 얼마 전 쿠데타군이 아닌 주권의 담지자인 국민의 힘으로, 그리고 엄정한 헌법의 심판으로 <대통령궁>에서 떠나야 했던-그것도 며칠이나 반불법점거를 한 끝에- 한 전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어떤 메시지도 이야기하지 않은채, 자신의 소수의 지지자들 품에서 웃음을 흘리며 개인집으로 돌아갔다.. 그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보면서 뭔가 마음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것이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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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데올로기 동아시아 라이브러리 2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윤여일 옮김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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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 이데올로기>가 번역 출간되었다..

이런 시대에 다케우치에 대한 글을 계속해서 번역해내고 있는 역자에게 우선 경의를 표한다.. 과연 어느 정도의 독자들이 다케우치의 글에 내재하는 아포리아를 읽어내는데 그 바쁜 시간을 할애하려 할까.. 분명히 다케우치의 글은 그다지 '친절한' 글이 아니다.. 더구나 전후 일본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그의 글은 왜곡될 소지도 다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은 그의 맹우였던 마루야마 마사오가 도달한 정도의 '보편성'을 획득해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상'이라는 영위에서 다케우치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가 있다..

만약 다케우치 요시미에 대한 글을 쓰게 된다면, 첫 문장을 이렇게 쓰고 싶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다루기 힘든 사상가이자, '위험한' 사상가이다..

-여기서 '위험한'이라는 형용사는 물론 다케우치 자신이 오카쿠라 텐신이라는 근대 일본의 사상가를 논하는 글의 첫문장에서 텐신을 평하면서 썼던 형용사이기도 하다. 물론 이 형용사가 다케우치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사일지도 모르겠다-

그 '위험함'은 바로 그가 '일본 낭만파', '아시아주의', '근대초극론' 등 전후 일본이 팽개쳐놓은 금단의 영역 내부에서 사고했던 사상가라는 데서 나온다..

"'사이비 문명'을 허위화해 가는 작용은 사이비 문명의 내부에 있는 자만이 담당할 수 있으며, 밖에서 힘을 빌려와서는 할 수 없다"는 감각은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찾기 힘든 다케우치 특유의 독특한 자리이다..

 

예를 들어 전후 일본에서 파시즘의 한 갈래(公娼)로 비판받는 일본 낭만파에 대해, 다케우치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전후에 출현한 문학평론들이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부 일본 낭만파를 불문에 붙이고 있는 양상은, 특히 일본 낭만파에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까지 알리바이 제출에 바쁜 양상은 조금 기묘한 일이다."라는 감상을 피력하면서 "비판대상의 발생근거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비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근대 초극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1942년에 열린 몇 차례의 좌담회에서 유래한 이 논의는 전후 일본에서 <대동아전쟁>의 악명높은 이데올로기이자 주술로 간주되곤 했다. 물론 근대의 촉극 좌담회는 분명 1942년이라는 시점에서 보더라도 시대착오적이고, 또 그다지 깊이 있는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는 다소 '허술한' 논의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다케우치는 전후에도 이 논의가 다시 소환되고 회고되는 상황을 주시하면서 "사상으로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묻혀 있는 기억이 아직 살아남아 곳곳에서 원한과 회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은 이 책 <일본 이데올로기> 역시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민중은 바보라서 도조(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총리이자, A급 전범)에게 속았고, 내버려두면 또 속을테니 "정말이지 위험"하다고 마쓰모토는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과연 민중은 도조에게 속을 만큼 바보였다. 그러나 속은 덕분에, 도조를 대신한 '민주주의' 지도자를 함부로 믿지 않을 만큼은 바보가 아니게 되었다. 또 속는 게 아닐지를 의심할만큼 영리해졌다. 그렇게 영리해진 게 지도자의 눈에는 반대로 "도조의 재탕"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속는 데 넌더리가 나서 의심하고 있는데, 이제는 그렇게 의심하는게 나쁘다며 바보 취급하니 민중은 속상하다. 결국 지도자라는 건 모두 못됐다고 여길 것이다. 나는 그리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민중의 진정한 각성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민중이 지도자들만큼 도조를 무조건 신봉한 것은 아니다. 민중의 비협력은 도조조차 알고 있었다. 그 저항이 성장해 오늘의 '민주주의'를 불신하게 되었는데, 그 저항의 계기를 붙들지 않고 도조에게 굴복한 권위주의의 면만을 바라보고서 '민주주의'를 위에서 내리 눌러 저항을 뭉개려 한다면 도조의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확실히 이런 문체로는 보편성을 획득하기 힘들다.. 아니 문체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런 위치 감각은 전후 일본에서든, 아니면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다. 아마 어느 '진영'에서든 제대로 이해받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사상이라는 '영위' 자체가 원래 그렇게 고독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감각은 결코 정치가가 가끔씩 침바르듯 말하는 '선의'와 같은 그런 수준의 깊이가 아니다..

다케우치의 아포리아가 아포리아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우리가 저 머나먼 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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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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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를 넘길 것 같아, 리뷰로 대체한다..

100자평으로 후기를 남기는 것의 오만함을 경계하면서..

800페이지가 넘는 책에 대해 100자평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꼬박 사흘에 걸쳐 끝까지 읽다.

이 정도의 집요하면서도 치열한 사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젊은 연구자들을 배출할 수 있는 일본 사상계의 풍요로움에 일단 경의를 표한다. 이는 무엇보다 번역된 텍스트들을 어느 정도 신뢰하면서 인용할 수 있는 수준의 풍토가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적 경지이다.. 

예전에도 어딘가에 쓴 바 있지만, Dits et ecrits가 번역된 사회와 번역되지 못한 사회의 차이는 분명하다. 푸코의 텍스트들을 시계열적으로 논할 수 있는 학문적 풍토는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라는 저자의 '비범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더구나 르장드르의 저작 한 권 번역되지 못한 사회에서 어찌 논의가 전개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책에서 사사키가 가장 몸을 낮추고 글을 쓰고 있는 장 역시 르장드르를 다루고 있는 2장이다.. 아직 2차연구들이 많이 소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사키 역시 그의 논의를 충실히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후기 푸코의 아포리아에 대한 집요한 추궁은 이제 우리가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수준의 결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도 가치가 있다.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권력을 시계열순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푸코의 강의록이 출간되면서 어느 정도 이해가 공유된 것 같다.. 통치성의 문제의식도.. <다이어그램, 장치, 몽타주>에 대한 절 역시 르장드르의 몽타주론(?)을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하면 참 쉽지만, 이 논의를 끌어내기 위해 푸코의 텍스트들을 시계열순으로 꼼꼼이 읽어나가면서 추리소설을 쓰듯이 집요하게 추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라캉, 르장드르, 푸코라는 사실 어느 하나 범접하기 어려운 세 저자를 묶어내면서 저자가 이끌어내는 결론은 힘이 조금 많이 떨어진다..

그래.. 블랑쇼를 인용하며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야전과 영원>이라고 붙인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왠지 그 가벼움은 역사의 진공상태, 무풍지대와 같은 전후 일본사회라는 토양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사상이 정말 <강철같은 페시미즘>을 거친 것인지는 의문이다..

 

사상(?)이 진정 투쟁의 무기였던 사회에서는 이러한 가볍고 안이한 결론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사회에서도 사상은 종종 무미건조한 교조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치열한 현실을 견뎌낼 수 없는 지적 유희로 치부되어 등한시되어버린다.. 우리는 아주 가끔 사상이 원석처럼 빛을 발하는 시기를 이후에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18세기 중반, 혁명 전야의 프랑스나 19세기 중후반의 러시아 혹은 20세기 초의 빈과 같은.. 하지만 사상은 그 위험함 때문에 혁명 이후, 혹은 반혁명을 거치면서 가장 극렬하게 탄압을 받았다..

과연 사상 자체를 위해서는 어떤 사회가 더 나은 사회일까.. 물론 그것은 가치판단의 영역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도 아주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아시아 침략을 용인해버린, 나아가 전시체제에 협력해버린 자신들의 나약함을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 전개되던 시기가 있었다..

왠지 후지타 쇼오조오의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를 읽고 싶어졌다..

 

cf. 저자의 논의를 둘러싼 격투는 서평과 같은 <장치>가 아닌 다른 개입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저자가 바라는 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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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3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03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 교양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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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혁명운동사에서 소비에트를, 그리고 스탈린주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전세계 인민들에게 유토피아와 악몽을 동시에 주었던 그 공과 과를 과연 누가 평가할 수 있을까..

 

스페인 내전의 경과를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점은 프랑코의 칼이 공화국을 둘로 가르고 마침내 그 심장에 칼을 꽂기 전에 이미 공화국은 내분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무정부주의 vs. 공산주의.. 파시즘의 위협 앞에서 공화국을 수호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어느 노선이 옳았는가에 대한 답을 앤터니 비버는 교묘히 피해간다. 패자에 대한 감정적 연대 속에서 공산당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심지어 혁명을 위해 함께 싸웠더 과거의 동지들로부터 무장해제를 당하거나 심지어 반역죄와 같은 무고죄로 처형당해야 했던 아나키스트들에게 좀 더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듯 하지만, 아나키스트의 낭만주의적 전술이 1930년대 당시의 현대전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도 공정하게 기술하고 있다..

어쩌면 저자에게 역사란, 그가 인용하는 W. H. Auden의 말처럼, "패자에게 "아, 가엾어라!"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패자를 돕거나 용서할 수는 없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당연히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의 소위 '민주주의 국가'들의 불간섭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물론 저자 역시 이 부분을 몇 차레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부분은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

뭇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병사들의 노골적인 개입, 그리고 스페인 내전에서 실질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독일 콘도르 군단(비행대)와 같은 화려한 팀플레이에 비해, 서구의 '소위' 민주주의 국가들은 공화국의 운명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당시 그들이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파시즘>이 아니라 <공산주의>였기 때문일까.. 아니, 프랑코적인 권위주의 체제가 그들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더 들어맞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내전은, 그것도 이념의 충돌에 의해 빚어지는 내전은, -누가 승리하든-, 그 사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생채기를 낸다.. 스페인, 한국, 칠레.. 이 나라들은 모두 근대사에서 내전과 그에 버금가는 쿠데타를 겪었고, 그 상처는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에도 아물지 않은 채 계속해서 고통을 주고 있다.

몇 개월째 지속되는 촛불집회, 그리고 이를 저지하고자 나선 정체불명의 <반촛불집회>(태극기집회?)를 보며 그런 생각이 부쩍 들었다.. 얼마 전 심지어 군대에 <궐기?>를 호소하는-한 마디로 쿠데라를 권유하는 <반촛불집회> 참가자들의 무시무시한 선동을 보면서 그들의 행동을 단지 <광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레드 컴플렉스>, 그리고 그 공포를 밑바닥에서 만들어내는 감정의 구조에 대해 우리 사회가 깊이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감정의 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양자 사이의 이성적인/합리적인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절망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탄핵이 되든, 되지 않든 이 사회의 분열의 고랑은 당분간 메워질 수 없을 것 같다.. 따라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그 밑바닥의 감정의 구조를 밝혀내고, 이를 통해 이해의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 학문의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선의>를 이야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물론 그 어려운 분석 작업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다..  방법론조차도 떠오르지 않는다.. 공동작업이 아니면 불가능할텐데.. 과연 선입견을 버리고 선뜻 시작할 사람들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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