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백한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9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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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월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 재독서의 영예. ˝어떤 책들은 무슨 이유로 그런 영예를 얻게 됩니까?˝ 이사야 벌린은 말한다. ˝독자를 매혹하는 능력이지요. 계속 찾게 되는 책들은 그 지적 사고 혹은 아름다움 때문에 경외하게 됩니다. 재독서의 본질상 언제나 모순을 경험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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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혁 3 : 19세기의 역사풍경 한길그레이트북스 178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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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오스터함멜의 <대변혁> 장정을 마치다..

원래 작년 연말 10여일이라는 시간 동안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는데, 사정상 3권 15장에서 중단하고, 다른 일정 때문에 이어가지 못하다가 설 연휴에 마지막 3장과 결론을 읽었다.

한글책 총분량 2,407페이지.. 어찌됐건 대작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뭔가 마지막까지 다소 산만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저자가 전체사를 아우르는 체계와 구조를 세우지 못한 채, 장대한 19세기사의 풍경에 압도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서두에서 언급된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현대세계의 탄생>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홉스봄의 19세기사 3부작(혁명-자본-제국)과 비교해본다면..

홉스봄의 천재적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논외로 하더라도-역사와 이야기를 동일하게 'histoire'라고 부르는 프랑스보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영국의 역사학자들이 한 수 우위라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심지어 저자는 독일어권이다-, 혁명(이중혁명), 자본, 제국이라는 3개의 키워드로 장기 19세기의 세 국면을 구획하고 압축적으로 이 시대를 분석해들어가는 홉스봄의 서사에 비해, 오스터함멜의 서사가 집약적이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3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쌓인 개별 연구사들의 축적, 그리고 더 이상 유럽중심주의가 통하지 않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중동과 아시아까지 포괄해야 하는 부담의 무게를 무시할 수는 없다.

장소를 유럽(그리고 북아메리카)에 한정했기 때문에 수직적이고 시계열적으로 글을 쓸 수 있었던 홉스봄에 비해, 오스터함멜의 저작은 저자 자신도 강조하고 있듯이 수평적이고 횡적이다.그리고 기억과 시간, 공간을 다루는 1부 근경과 정주와 이주, 도시, 프런티어, 제국과 민족국가, 강대국체제, 혁명, 국가 등 19세기 근대의 굵직굵직한 테마를 다루는 2부 전경의 구성은 충분히 탁월하다.. 다만 전세계를 아우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저자가 속해 있는 연구환경의 포지션상,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는 힘들고(한 권의 별도의 책으로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레퍼런스의 거의 전부가 영어와 독일어권 학술서다), 또 3부 개별 주제들의 구성은 다소 산만하며, 장기 19세기를 다섯 개의 특징-생산효율의 비대칭적 상승, 유동성의 증가, 상호관계 강화의 비대칭성, 평등과 등급 제도의 대립, 해방-으로 정리하는 결론은 지나치게 짧다..

그 다섯 가지 지표들 중에서도 <상호관계의 강화와 비대칭성>은 분명 기존의 다른 저작들과 달리 수평적이고 횡적인 이 책의 시점이 포착해낸 특징임에 분명하다. 저자 역시 3부의 16장(지식: 증가, 농축, 분포)와 17장(문명화와 배제)을 통해 그 지표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 상호관계를 보다 더 역동적으로 구성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물론 또 그렇다고 저자에게 아쉬움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포지션의 제약이라는 것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고, 경계를 넘나들며 상호복수적인 시선들을 모두 담아낸다는 것은 한 저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최상급 내공이다. 오히려 저자가 넘겨준 바톤을 이어받아, 비유럽 세계에서 응답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그 응답이 다시 또 다른 응답을 부를 때, 즉 더 이상 한쪽 방향성의 벡터만으로 움직여지는 정반합이 아닌, 메아리의 다성성이 확보될 때, 우리는 진정 길었던,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게는 특히 가혹했던19세기와 영원히 작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반향과 응답들이 이루어질 때, 저자 역시 분명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예전의 '좋았던' 시대를 추억하며 '영웅으로서의 인류학자'란 제목의 글을 레비스트로스가 쓴 적이 있지만, 이미 '영웅으로서의 역사학자'의 시대도 한참 지나가버린 21세기 20년대의 사회에서 한 개인이 이런 전체사를 쓴다는 시도 자체가 돈키호테적인 것일 수도 있다.. 더구나 모두 자기만의 조그만 연구주제에 갇혀 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전문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우리 학계에서 이런 작업은 적어도 당분간은('당분간'이 그 뜻 그대로 길지 않은 시간이길 바라지만) 결코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대작을 앞에 두고 이런 저런 말들을 꺼내는 것 자체가 한심스럽고 죄송스러울 따름이지만..

 

그럼에도 쓰는 사람은 쓰는 사람으로서의 할 일이 있고.. 읽는 사람은 읽는 사람으로서의 할 일이 있는 법이니까.. 계속 읽고 쓰는 수밖에 없다..  

 

 

19세기는 1914년 이후 발생한 재난을 위해 길을 닦아 놓았다. 한나 아렌트 등은 19세기는 이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세기가 받들었던 일부 전통과 사상, 예컨대 자유주의, 평화주의, 노동조합주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1945년 이후에도 폐기되지 않았고 또한 추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1950년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1910년-버지니아 울프는 인류의 본성이 바뀐 해라고 탄식했다-은 아득히 먼 시점이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본다면 1910년은 가장 최근에 겪은 전쟁의 공포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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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라는 이데올로기 트랜스 소시올로지 29
마이클 레이섬 지음, 권혁은 외 옮김 / 그린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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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근대화론'은 무엇이었을까.

냉전시대 소비에트와의 싸움에서 미국이 정력적으로 만들어냈던 이데올로기이자 정책이기도 했던 '근대화' 이론의 가장 성공적인/예외적인(거의 대다수의 사회에서 실패했다는 점에서) 모범생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한국South Korea에서 근대화론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깊이 있게 검토해야 할 주제임에 분명하다.. 근대화이론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전통' 사회와 문화를 물질적 자원, 합리적 조직 및 사회구조의 입증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지도하는 힘은 제국주의 국가와는 다른/예외적인, 즉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체현하는 미국사회에서 나온다는 믿음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한국사회는 해방 이후부터 적어도 1990년대까지 근대화론의 세례를 흠뻑 받은 미국 유학파 엘리트들에 의해 그 틀이 만들어진 사회이다. 한국전쟁의 '혈맹'으로 민주주의의 영원한 모국인 미국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80-90년대 초반 학생운동의 일시적인 반미 성향을 제외한다면, 지금까지도 가장 친숙한 '우방'이자, 지적 스승일 것이다. 물론 80-90년대 사회과학의 영향으로 역사적으로 미국이 걸어온 제국주의적 속성이나, 해방 8년사 시기 분단의 고착화 과정에서 미국의 많은 의심쩍은 행동들에 대한 인식들이 만들어지고 논의되어 온 것은 분명하다.. 근대화론의 사도들인 교수들에 맞서 맑시즘과 제 3세계 민족해방론으로 무장한 학생들이 세미나를 조직해가며 근대화론을 비판하며, 새로운 변혁이론을 만들어내던 시기들은 존재했다.. 하지만 공론과 심정의 영역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반미를 외치며 짱돌을 던지다가도 코카콜라를 마시고 맥도날드를 먹었고(코카콜라를 먹기를 거부했던 시절도 있었고, 그 분들의 의기를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 사회구성체론을 역설하다가, 미국 유학을 떠난 뒤 돌아와서는 그래도 미국 시스템이 가장 훌륭한 것 같다는 모순에 찬 독백을 토로하며 진보 이론을 모색하기도 했다..

 

어쩌면 사회과학의 시대라는 환상이 소멸해버린, 그리고 한국경제의 질적 도약, K-방역의 성공과 함께 찾아온 '선진국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지금에야말로, 우리 사회를 만들어낸 '근대화 이론'이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적어도 과거 중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도배되어 있던, 그래서 질리도록 달달 외웠던 근대화론의 '교리'를 넘어서는 근대화론의 '장치들'(dispositifs)이 실제로 만들어낸 세상에 대한 '앎'(knowledge)이..

 

그런 점에서 근대화론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역사에 대해 다룬 이 책은 그러한 앎을 만들어내는 도입의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케네디 정부가 주도한 세 가지 정책-진보를 위한 동맹, 평화봉사단, 베트남 전략촌-을 꼼꼼히 분석하면서, 그 이데올로기의 입안자들의 사상적 배경과 그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문화적 이미지와 수사를 검토하고 있다..

 

특히 당시 한국사회와 관련하여 단연 흥미로운 테마는 <평화봉사단>일 것이다. 지금은 어느덧 잊혀져버렸지만, 한국에도 꽤 많은 평화봉사단 단원들이 파견되었고, 그들은 한국사회의 도시와 농촌으로 파고들어가, 여러 근대화 사업들을 함께 하다가 귀국했다. 우리에게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로 잘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나, 한국의 초기 농촌 인류학에서 중요한 민족지를 썼던 빈센트 브란트도 평화봉사단 출신이었다.

저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 책의 주목적은 그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수사였기 때문에, 실제로 평화봉사단원들은 누구였는지, 그들은 자신들이 파견된 세계 각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그리고 평화봉사단의 공식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실제 삶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과 괴리들을 발견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에서 부수적으로 다루어진다..(레퍼런스에서 언급된 Fritz Fischer, Making Them Like Us: Peace Corps Volunterrs in the 1960's, 1998이라는 책이 흥미로워 보인다.) 또 실제로 이데올로기 정책사에서 본다면 '스테레오타입으로 규정된 타자'일수밖에 없는 저개발 사회의 사람들(우리의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일텐데)은 '파란 눈'의 그들을(비유가 좀 그렇긴 한데, 평화봉사단원중에 백인과 비백인의 비율은 어느 정도였을까?)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와 같은 보다 더 개인적으로 흥미로워 보이는 주제들 역시회고록의 일부 인용 외에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사실, 저자에게 어디까지 기대해야 하겠는가.. 이런 주제야말로, 근대화이론의 가장 성공적인 모범생이자, 여전히 '테이크 오프'라는 환상이 지배하는 사회의 '연구자들'이 해야 할 과제가 아니겠는가.. 항상 그렇지만, 해야 할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데.. 모두들 너무 바쁘다.. 

 

 

 

 

코넬대학의 인류학자들은 2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페루 지역 마을 조사를 통해 "대학을 갓 졸업하고 단지 3개월의 훈련을 받았을 뿐인 미국 청년들이 사회 발전에 중대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인류학자들은 정치 및 사회적 서비스, 여가 활동의형태, 지역 공동체 내에서의 상업 활동 등을 평가하는 "발전 척도"를 사용하여 수도 리마에 100점 만점을 부여하고, 시골 지역 공동체들과 리마의 상대적인 격차를 측정했다. 이 연구는 자원봉사자들이 파견된 15개 마을과 파견되지 안은 5개 마을을 분석한 결과, 평화봉사단이 "전통적인" 세계를 변화시켰다고 결론내렸다. ... "진보"와 "근대성"이란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문제는 변화에 대한 양적 분석 밑으로 사라진 후, 결코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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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의 시선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 동아시아 모더니티 5
존 어리.요나스 라슨 지음, 도재학.이정훈 옮김 / 소명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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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사회학의 중요한 고전이 번역된 것은 실로 기쁜 일. 하지만 번역이 많이 아쉽다. 역자가 밝히듯 일본어 ‘중역‘의 한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저자명이나 외래어 등을 일본 가타카나 발음 그대로 표기한 것도 인문사회과학서로의 책의 가치를 떨어뜨린다(손태그? 파스티셰? 플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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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 재팬,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 - 팽창을 향한 야망과 예정된 결말
브래드 글로서먼 지음, 김성훈 옮김 / 김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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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디로 향하는가: 헤이세이 30년의 기록>을 읽은 후, 내친 김에 브래드 글로서먼의 <피크 재팬: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을 이어 읽다.. 그러고보니 이번 주 초에 읽은 R. 맥그리거,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와 시기에 있어서나, 대상에 있어서, 그리고 접근방법에 있어서도 다소 겹치는 책이다..

 

구미 출신의 소위 '일본통', 국제문제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일본 사회 인식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 책의 저자가 1970-80년대에 일본에서 살았다면, <일등국가 일본Japan as Number One>과 같은 책을 썼을 것이다(실제로 하버드 교수가 쓴 동명 저서가 있다)..

당대 구미 학계에서 나오던 <일본론>의 주류가, 일본의 경제적 풍요를 부러워하고/질투하면서 그 경제적 잠식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양가감정이 뒤섞인 것들이었다고 한다면, 2010년대 이후의 <일본론>은 "너희들.. 어떻게 된 거니.. 왜 이렇게 된 거야.. 뭐가 문제니.. 내가 분석해줘?"라고 걱정해주면서, 일본형 시스템이 갖는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주적인) 중국의 부상과 같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그래도 (중국보다는 믿을 수 있는) 너네들이 좀 버텨줘야 하지 않겠니"라고 온정의 시선으로 다독여주는 텍스트들이 대세가 아닌가 싶다..

 

이 책 역시 1990년대 중반 버블 붕괴 이후 변화하는 국제사회의 현실 속에서 갈 길을 잃어버린 채(잃어버린 10년+ 또 10년 하면서) 방황하는 일본 사회에 불어닥친 쇼크들- 리먼 쇼크, 정치 쇼크, 센카쿠 쇼크, 동일본대지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는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내부적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현재적 전망을 제시하는 다소 '안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저자가 국제정치 전문가이다보니, 아무래도 내부적 문제들에 대한 검토 역시 자민당으로 대표되는(물론 3년간의 민주당 시절은 아마추어들의 막간극으로 처리되지만) 일본 정치시스템의 구조적 한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정치 이외의 다른 층위들에 대한 검토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당장 드는 의문은 그렇다면 80년대까지 일본 사회가 잘 나갔던 것은 일본 정치가 선진적이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항상 그 때도 일본 정치는 문제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글로벌 사회, 그리고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정치'의 영역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말인가? 이런 '엉뚱한' 문제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줄기차게 되풀이하는 <일본형 시스템> 자체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한데, 대개 그렇듯이 이 <일본형 시스템>이 마치 자동인형처럼 계속 설명 없이 등장하면서 문제를 정리해버리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 결과 80년대까지는 전세계적으로 상찬되던 <일본형 시스템>이 지금은 일본 사회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다소 이상한 결론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과연 일본형 시스템이란 것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지만, 나 역시 <한국형 시스템>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말이다..

 

책이 끝날 때 쯤에야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피크 저팬>으로 정한 이유를 말해주는데.. 쉽게 말하면 '지금'의 일본사회야말로, "잃을 것이 너무 많으며, 자신들이 서서히 침식되고 있다는 생각에 점차 물들어가면서도 큰 변화에서 오는 불확실성보다는 오늘날 누리고 있는 안락함을 선호하는 사회"라는 것인데.. 그래서 지금이 피크야.. 음.. 왠지 후루이치 노리토시와 같은 20대 사회학자가 썼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같은 모순형용의 패러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그러한 진단이 진정 옳은 것이라면, 정작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할 지점은 과연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일까 라는 부분일 것이고, 이는 정말 구체적 현장의 경험에 기반한 연구를 통해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일텐데.. 현재의 국제정치학적 방법론으로는 풀 수 없는 과제인 듯 싶다(그렇다고 국제정치학의 프레임이 무용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최근 현대 일본에 관한 책들을 읽고 나니 부쩍 일본에 가서 거리를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눈으로 그들의 삶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로 일본에 못 간지 벌써 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정말.. 백문이 불여일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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