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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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월 20일 규슈의 한 바닷가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남녀의 시체가 발견된다.. 소위 情死다. 죽은 남자는 당시 비리로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하던 한 관청의 실무대리. 직급은 낮지만 사실상의 실무를 담당하는 직원이었기 때문에 경시청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여자는 도쿄의 한 요리집의 여급..
사건이 일어나기 6일 전인 1월 14일 18시 그들의 규슈행이 도쿄역의 플랫폼에서 목격자들에 의해 목격된다. 도쿄발 하카다행 야간기차인 아사카제에 두 사람이 사이좋게 올라타는 것을 그 요리집의 단골인 한 남자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같은 요리집의 여급들이 목격한 것이다.. 목격자들이 있었던 곳은 13번 플랫폼, 그리고 두 사람이 승차한 아사카제가 정차해 있던 것은 15번 플랫폼..

너무나 통속적인 정사, 그리고 그들을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사건은 자살로 거의 굳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담당한 규슈의 한 시골 베테랑 형사의 한 마디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평일 저녁 6시처럼 혼잡한 시간대에 과연 13번 플랫폼에서 15번 플랫폼의 기차를 볼 수 있는가.. 기차시간표를 검색해보니, 그 시간대에 13번 플랫폼에서 15번 플랫폼의 기차를 볼 수 있는 것은, 즉 13번 철로와 14번 철로에 기차가 들어서지 않은 시간은 고작 4분.. 우연 치고는 너무나 절묘하지 않은가..

수사망은 14일의 현장을 목격한 인물로 좁혀진다.. 죽은 남자가 근무하는 관공서의 납품을 담당하는 회사의 사장, 그리고 비리 주범으로 지목되는 관공서의 장과는 개인적인 친분까지 있다(최근 마쓰모토 탄생 100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드라마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전전 중국전선에서 함께 생사를 나눈 상관/부하의 관계로 그려지고 있다.. 1957년의 일본, 사회파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마쓰모토의 작품에는 지난 전쟁의 흔적이 강하게 묻어나온다.. 예를 들어 마쓰모토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주인공 중의 하나는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항상 범죄의 대상, 혹은 범인이 되기 쉬운 '전쟁미망인'이다). 문제는 알리바이다..

두 사람의 사망시각은 대략 1월 20일 20-21시경.. 하지만 용의자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었다.. 이 시각 용의자는 도쿄에서 출발하는 야간기차를 타고 일본의 최북단인 홋카이도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21일 오후 하코다테와 삿포로 사이의 오타루 부근에서 기차에 그가 타고 있었다는 제 3자의 증언과 21일 20시 40분 경 삿포로역에서 그를 만났다는 신뢰할 수 있는 증언까지 있다.. 알리바이는 그야말로 완벽하다.. 적어도 20일 저녁 용의자가 일본 본토의 최남단인 후쿠오카에 있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정리해보자..

1. 20 저녁 8-9시 후쿠오카의 한 바닷가에서 남녀가 청산가리를 먹음(21일 오전 발견).
1.20 우에노발 급행 '도와다'로 21일 아침 아오모리 착.
1.21 아침 9시 50분 연락선(아오모리-하코다테)으로 하코다테 착. 연이어 하코다테발 급행 '마리모'로 20시 34분 삿포로 착.

이 작품의 묘미는 시행착오를 거듭해가면서 이상의 철벽같은 알리바이를 하나둘씩 깨트려가는데 있다.. 거기에는 독자들을 몰입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수첩을 꺼내어 기차 시간표를 끄적거리면서 시간을 계산하게 되는 것이다..
열차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추리소설에서 열차는 단골처럼 등장하는 무대이다..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떠올려보라.. 특히 기차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거의 예외없이 시간표대로 해당장소를 달린다는 점에서, 가장 결정적인 알리바이의 소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결정적이라는 믿음이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도 한다.. 전 열도가 거미줄처럼 엮어진 일본의 철도망에서는 때로 애매한 공백들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미묘한 4분의 공백이나, 상행선과 하행선의 교차 시간.. 혹은..


지금도 매달 발매되는 무려 천 여페이지에 달하는 <JR시간표>에는 (야간열차를 포함하여) 24시간 동안 일본 각지를 달리는 열차들의 타임 스케줄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가히 숫자들과 역이름으로 채워지는 풍경이다..개인적인 체험으로 보더라도 일본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때는 그 거미줄 같은 철도망을 확인하면서, 여행일정에 맞춰 기차시간표를 짜는 것이었다.. 현재 지점에서 목적지까지는 어떻게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 특급을 탈까, 아니면 보통을..그리고 중간에 열차를 갈아타는 지점에서는 바로 이어지는 열차를 탈 것인가, 아니면 내려서 1-2시간 주위를 돌아볼까.. 상행과 하행은 다른 노선(철로)을 이용해볼까.. 등등..

여기에는 철도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혹은 메타포)으로 존재하는 일본 사회의 특수성도 깔려 있다.. 60년대 미국 중심의 경제개발계획으로 철도보다는 고속도로 건설에 주력한 한국에서 철도는 도로의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거미줄같은 도로망을 철도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오르한 파묵의 터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이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식민지 시기를 제외하고는 소설에서 철도(혹은 기차)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근대 초기부터 철도 건설에 주력한 일본에서 철도는 근대의 상징으로서, 지금까지도 가장 친근한 운송수단이며, 그래서인지 (식민지 시기를 제외하고는 철도(혹은 기차)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그다지 없는 한국과 비교해보더라도) 철도는 문학작품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이다.. 일본의 국민소설가인 나츠메 소세키의 대표작인 <산시로>의 도입이 구마모토에서 도쿄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일본의 철도사업은 계속 이어져, 그렇게 넓지 않은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일본의 총 철로 길이는 아마 세계에서 다섯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이다(한 때, 근대화의 기준을 국토의 총 철로 길이로 계산하던 시절이 있었다.. 홉스봄의 책에 나왔던가).

또한 1970년 일본 고도성장의 정점에서 치러진 전국적인 축제였던 오사카 만국박람회(줄여 만박)에 맞춰, 도쿄와 오사카를 3시간에 주파하는 돗카이도 신칸센이 처음 운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리고 그 철도에 몸을 싣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사카 만박을 찾아왔다.. 공식방문자수만 해도 6천 4백만.. 일본 인구의 거의 절반이 오사카에 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만박에 의해 정비된 철도 인프라와 관광산업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Discover Japan>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말 그대로 일본의 숨은 아름다운 풍경들을 찾아다니자는 캠페인인데, 이 때부터 일본인들이 철도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의 오지들을 여행하러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볼프강 시벨부시가 이야기한 근대 철도여행의 역사(특히 파노라마로서의 차창의 발견)가 그 정점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점과 선>을 읽으면서, 사건의 열쇠이기도 한 기차시간표를 수첩에 써내려가노라니, 예전 일본 여행을 다니면서 기차 시간표를 보며 일정을 짜던 기억이 떠올라 괜시리 즐거워졌다.. 다시 한 번 옛날로 돌아가 묵직한 기차시간표를 들고 일본 열도를 한 번 돌아다녀볼 수는 없을까.. 뭐 <어떤 그리움>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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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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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몸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이다. 나의 존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나의 영혼뿐 아니라 나를 나이게 만드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책상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는 마치 내가 읽고 있던 책장들로부터 내 얼굴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그러한 강력한 힘 때문이었다. 그 빛은 나의 이성을 무디게 만드는 동시에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그런 책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일까. 젊었던 한 시절을 온전히 쏟아 부었던, 하지만 이제는 왠지 건드리는 것조차 겁나는 애증어린 원고를 ‘일단’ 떠나보내고 나서, 며칠 멍하니 앉아 있었다. 3주라는 유예 기간. 시간은 이미 가득 차 있기도 했고 텅 비어 있기도 했다.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새로운 인생>. 처음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이 책은 왠지 늦은 밤 인적 드문 역사의 플랫폼에서 야간열차를 기다리면서, 아니면 토사와 얼룩이 눌러 붙은 시트에 앉아 깜깜한 차창을 보며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표 한 장 들고 낯선 세계로 떠나는 그런 ‘치기 어린’ 여행을 지금도 할 수 있을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낯선 여행의 기록”에 매료된 것이 아닐까.

한 청년이 있었다. 어느 날 그에게 ‘운명과도 같이’ 한 권의 책이 찾아온다. 그리고 책을 읽어버린 ‘나’는 어제까지 친숙했던 이 세계에 더 이상 속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때마침 같은 책을 읽었던 한 여인(자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물론 ‘외사랑’이다. 그녀에게는 이미 연인(메흐메트)이 있었다. 오래 전에 그 책에 홀려 먼 여행을 떠나 돌아온, 이제는 ‘그 세계’의 존재를 믿지 않은 회의주의자. “난 그 세계를 찾아낼 거야” 라고 들떠 말하는 나에게 그는 경고한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욕망에서 그의 경고를 물리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거리에서 총을 맞아 쓰러지고 자난은 어딘가로 사라진다.

사라져버린 자난을 찾아, 또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주인공은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수단은 버스이다. 왜냐고? 대답은 간단하다. 근대화 계획을 수립하던 터키 정부가 철도 활성화 정책을 포기했기 때문에. 주인공의 즐거웠던 유년시절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르크프 아저씨’는 자신의 인생의 전부를 철도청에서 일했던, 철도가 터키를 부흥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 때문에 ‘소년소녀 꿈나무’들을 위해 철도 만화를 그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쳤던 철도가 점점 쇠퇴해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정년을 맞이했고, 또 어느 날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어린 시절 아저씨와 ‘나’는 기차역 이름 대기를 종종 하곤 했다. … 헤킴한, 퀴식헤프레,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때 아저씨는 캐러멜 하나를 주었고, 그 캐러멜을 입에 넣자마자, 나는 다음 역을 기억해냈다. “비라바”, “브라보” 세월이 흘러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나는 어느 날 밤 딸아이와 함께 기차역에서 그 놀이를 한다. 그 다음 역은? 딸아이에게 캐러멜을 주던 순간, 나의 머릿속엔 “비라바”라는 역 이름이 떠오른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그리고 나는 어린 시절 르프크 아저씨와 나눴던 그 다음 대화도 기억해냈다.

언젠가 책 한 권을 쓸 거란다. 주인공에게 네 이름을 붙일 거란다.
<페르테브와 피터>같은 책이요? 이렇게 묻고 있는 나의 심장은 쿵쿵 뛰었다.
아니 그림이 없는 책이란다. 그러나 너의 이야기를 쓸 거란다.

<
새로운 인생>의 기원?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을 찾아낸 메흐메트는 왜 이름을 ‘오스만’이라고 바꿨을까? 아니면 왜 주인공은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에 그렇게 매료된 것일까? 모든 의문들이 풀리는 지점. 또 그 ‘비라바’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마침내 메흐메트가 정착한 마을이자, 주인공이 그를 발견하고 총으로 쏘았던 바로 그 마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의 이야기다. 아직 우리는 버스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야 한다.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 사고, 죽음, 그리고 버스 사고의 현장에서 ‘나’는 운명적으로 그녀와 재회한다. “나는 ‘이 곳엔 어쩐 일이야?’라고 묻지 않았어. 그리고 내게 이곳엔 웬일이냐고 묻지 않았고. 왜냐하면 우리 둘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둘만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했던 한없이 두근거렸던 버스여행. 도시에서 도시로, 마을에서 마을로. 그 사이에 ‘나’는 자난과 함께 버스 안 운전석 위에 설치된 텔레비전 영화에서 ”천 번이 넘는 키스신“을 보고, 그 때마다 ”복잡하면서도 심오하고 격하고 의미 있는 뭔가“를 욕망한다. 그리고 다시 운명적인 사고를 겪으면서, 그들은 나린 박사를 만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흔한 청춘 로망이다. 여기에는 하루키적인 ‘상실’의 냄새도 강하게 풍긴다. “책을 쫒는 모험” 하지만 ‘메흐메트’, 아니 한 때의 ‘나히트’의 아버지이자, 어떤 ‘음모’의 중심인물인 ‘나린 박사’와 만나면서 이 여행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나린 박사’,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사상을 오염시키는 책과 글의 공격, ‘거대한 음모’에 대항하기 위해, “주의 깊고 인간적이며 겸손한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 조직은 우리가 “우리의 가장 위대한 보물”인 “기억”을 잃고 속수무책의 얼간이가 되지 않게 할 것이고, 그리하여 이 비참한 망각의 시간이 아무리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해도, 마침내 영광스럽게 “절멸의 위기에 놓인 우리 자신의 순수한 시간, 그 역사를 통치할 주권”을 새로이 쟁취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 그가 생각한 것은 모든 친구들에게, 물건들을, 그들의 손과 팔이나 다름없으며 시처럼 영혼을 완성시키는 그 진실한 것들을, 허리가 들어간 찻잔을, 기름병들을, 필통들을, 이불들을, 당신이 진실되게 만드는 그 어떠한 물건이든지 보존하는 것이었다. 책에 대한 그의 불타오르는 분노는 자신의 과업의 ‘계승자’가 되어야 할 유일한 아들이 책에 의해 오염되어 집을 버리고 결국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뜬 자신의 아들 때문이기도 하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그가 선택하는 길은 결국 책을 읽은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테러’라는 가장 비이성적인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나린 가문의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 역시 나중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히트’라는 이름의 그 아들은 결코 죽은 게 아니라,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자난’의 연인으로, 그가 몇 개월 전 대학 강의실에서 만난 메흐메트임을.

린 박사의 ‘조사원’들이 열심히 수집한 정보들을 토대로 나는 메흐메트를 찾아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지들에서 보았던 것은 한 때 책에 마음을 빼앗겼던 사람들의 그 이후의 삶들이다. 하지만 이제 여행의 목적은 바뀌어버렸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어버렸다. 자난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책에 나오는 세계와 나의 적을 찾고, 그리고 그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길을 지나오는 동안 나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렸다.”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나린 박사의 ‘조사원’들이 열심히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나는 메흐메트를 찾아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지들에서 보았던 것은 한 때 책에 마음을 빼앗겼던 사람들의 그 이후의 삶들이다. 그것은 내 여행의 목적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어버렸다. 자난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책에 나오는 세계와 나의 적을 찾고, 그리고 그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길을 지나오는 동안 나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렸다.”

나는 수많은 메흐메트들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어느 날 운명적으로 자신이 찾던 ‘메흐메트’와 재회한다. “다리를 꼬고 앉아 세상을 잊은 채 내가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평온함에 가득 차 신문을 읽고 있는”, 이제는 자신의 이름인 ‘오스만’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는 메흐메트를. 이제 책이 주었던 빛은 그에게서 사라지고 없는 것 같았다.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철자, 마침표 하나 빠트리지 않고 꼼꼼히 책을 베껴 쓰지만, 그가 이런 일과를 되풀이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도시의 부자들, 전통주의자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의 노력과 신념, 현신, 인내심을 존경하는 사람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고집하며 사는 바보가 자기들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만족하며 산다는 사실에 일종의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 속에서 ‘작은 전설’이 되기도 했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을 찾아낸 것이 아닐까.

신선한 빵을 치즈 조각과 함께 먹을 때, 그의 인생이 이미 자리를 잡았고, 책 속의 표현처럼 '정상궤도에 들어섰음'을 나는 보았다. 그도 나처럼 책 때문에 길을 나섰지만, 그 여정 속에서 그는 내가 발견하지 못한, 죽음과 사랑과 재앙으로 충만한 여행과 모험과 평화를 발견해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 영원히 변치 않을 어떤 균형을 찾아냈다. 내면의 평화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가 매일같이 손, 손가락, 입, 턱, 머리로 작은 동작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치즈 조각을 조심스럽게 깨물면서 찻잔 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의 차를 음미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가 찾았던 균형의 평온은 그에게 결코 끝나지 않을 영원한 시간을 주었다. 나는 호기심과 긴장 때문에 테이블 밑에서 다리를 떨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질투심에, 상실감에, 아니 어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폭발에,  ‘나’는 컴컴한 극장에 앉아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과 가슴에 대고 정면으로 세 방을 쏘았다.” 그리고 총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나린 박사의 자택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자난은 떠나고 없었다. 여행은 끝나고 만 것이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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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1926~1984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 1
디디에 에리봉 지음, 박정자 옮김 / 그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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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에리봉의 책을 읽다가 예전에 읽었던 푸코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몇 가지 적는다.. 에리봉의 책이 <마들렌>이 되어버린 셈이다..

 

1. 한국 사회에서 <푸코의 시대>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었다면, 아마 그 시기는 90년대 중후반일 것이다..  여전히 <다현사>나 <청년사>, <자본론>이 세미나 커리로 채택되던 시절에, 푸코는 왠지 묘한, 범접하기 어려운, 하지만 치명적인 유혹을 불러 일으키는 텍스트였다.. 물론 <광기의 역사>는 아직 축약본밖에 번역이 되지 않았고, <말과 사물>의 번역은 도저히 읽어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감시와 처벌>, <임상의학의 탄생>, <성의 역사>로부터 푸코를 처음 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2. 푸코가 친숙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철학자, 사상가의 저작에 비해 그의 텍스트는 초심자라도 자신의 관심과 열정만 있다면 그나마 <미끄럽게> 들어갈 수 있는 틈새들을 보여줬기 때문이다(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아마 맑스뿐일 것이다.. 들뢰즈의 <천의 고원> 역시 그런 점에서 친절한 텍스트이긴 하지만, 그래도 들뢰즈와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칸트, 니체, 그리고 카프카와 프루스트로 이어지는 그의 꼼꼼하고 치밀한 독해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때 한국 사회에 유행했던 <탈주 교도>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2.1 물론 그런 점에서 푸코도 예외는 아니다..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과 같은 전기 논의들(고고학)에 대한 이해 없이 계보학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고.. 또 그 때문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오류들에 대한 비판은 전문가들의 몫일테고, 자신의 삶과 바로 <접속>될 수 있는 사상적 텍스트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래서인지, 90년대 쏟아져 나온 푸코에 대한 개론서/소개서들 중 지금 읽을만한 것은 거의 없다.. 가끔씩 용케 이런 글들을 써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볼이 화끈거리는 경우도 많다.. 아주 소수의 예외가 있지만, <당파성>을 드러내는 것 같아 여기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

<광기의 역사>건 이 책(감시와 처벌)이건 간에 나의 모든 책들은 자그마한 연장통이다. 사람들이 권력제도를 단락시키거나 그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혹은 완전히 분쇄하기 위해서는 이 연장통의 뚜껑을 열고 마치 드라이버나 펜치를 찾듯이 거기서 어떤 문구, 어떤 관념, 어떤 분석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나에게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다.

 

3. 최근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 느릿하게나마 번역되고 있다.. 어찌 보면 한권 한권의 저작에 병적일 정도의 완벽성을 유지하고자 했던(그래서 <저자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글이 때때로 무색하게 느껴지는) 그의 결벽 때문에, 저작들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사유의 전환점들, 도약들, 그 과정의 고민들을 강의록을 통해서나마 엿볼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물론 그는 그 저작들이 출판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의록은 항상 그의 저작들과 함께 읽을 것..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그의 조각글들의 모음집인 <Dits et ecrits>가 번역되면 좋겠지만, 번역을 무시하다못해 멸시하는 한국 학계의 풍토에서(번역본 1권이 논문 1편만큼의 가치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런 책들이 번역될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악조건 속에서 묵묵히 번역을 해주시는 분들께 일단 경의를 표할 수밖에(그래서 아무리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너무나 <치명적>이지 않다면 번역자를 매도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일단 내 주의이다)..프랑스어 원본을 읽어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영어 번역본도 없다), 일단 일본어 번역본에 만족하기로 한다..

 

4. 푸코의 텍스트는 인용하기가 쉽지 않다.. 문장 하나하나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적이면서 번뜩이기 때문에, 인용했다가는 자신의 엉성할 글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지는 좌절감을 감내해내야 한다.. 또 그의 많은 이야기들이 이제 어느 정도 정설로 받아들여져버렸기 때문에 거기에 굳이 푸코를 인용해서 참고문헌 수를 늘릴 이유도 없다.. 보다 본질적으로 푸코의 텍스트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부분이나 방법론이라기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통찰력>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용이 불가능하다.. 그건 푸코 자신이 택한 글쓰기와도 대립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순적이지만 푸코를 인용한다..

역사적 대상에 직접 접근하여 그것을 자신이 정의하기 위해 스스로 찾아나서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자신, 우리의 사상, 우리의 행동에 대한 성찰에 실질적인 내용을 부여하는 유일한 수단이옸다. 그것은 또한 반대로 역사의 암묵적인 가설에 우리도 모르게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것은 또한 성찰에 새로운 역사적 대상을 주는 한 방식이기도 했다. ... 이제는 더 이상 역사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의 성찰인 것이다. 우리의 사유에 역사연구라는 훈련을 부과하는 방법이며, 또 한편으로는 역사연구에 개념적, 이론적 테두리의 변화라는 시험을 부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4.1. 나아가 푸코의 글에는 방법론이 없다.. 푸코의 글을 모방한 대다수의 글들(우리나라에도 한 때 붐이 일었던 <~의 탄생> 류의 책들)이 엉성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존경하는 스승으로부터 배운 <방법론은 초짜들만 강조하는 것이다>라는 금언을 소중히 간직해둔다..

 

5. 사람들은 계속 푸코를 읽을까.. 지금과 같이 효율성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푸코를 읽는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한가하게 푸코나 읽고 있다니.. 하는 질책들이 여기저기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랑시에르로, 바디우로, 아감벤으로 또 유행을 좇아 이리저리 휩쓸리느니 차라리 푸코의 텍스트를 다시 한 번 꺼내 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뭐 어차피 사상이 현실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사유>에 ABC가 있는 것도 아닐테니..

 

cf. 디디에 에리봉은 말년의 푸코를 그리면서, 그의 학문적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세 텍스트를 계속 거론하고 있다..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성의 역사 3: 자기에의 배려>, 그리고 푸코의 유언을 존중하여 아직 출간되지 못한, 하지만 조르주 뒤메질, 폴 벤느 등 그와 가장 가까웠던 지인들이 한 목소리로, 그의 마지막 기획의 전모를 드러내줄 저작이라고 말한 <육욕의 고백>.. 그가 죽은 지 30여년이 지나도록 아직 출간되지 않은 걸 보면, 살아 생전에 그의 마지막 저작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글쎄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그 <기획>의 마지막 저작을 읽고 안 읽고가 그리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책이 소중하던 시절, 책에 대한 욕망에 괴로워하던 장서각의 수도승들이 아니다.. 죽기 3개월 전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마지막 강연에서 짤막한 몇 마디로 강의를 마쳤다..

"자, 이 분석 작업에서 여러분들에게 아직도 할 말이 많은데, 하지만, 너무 늦었군요. 고맙습니다."

 

그렇다. 너무 늦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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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1926~1984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 1
디디에 에리봉 지음, 박정자 옮김 / 그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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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의 매력과 한계를 모두 보여주는 작품.푸코의 인간적인 면모, 그가 활동했던 당대 프랑스의 지적공간과 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 특히 학위논문(광기와 비이성) 청구심사장에 대한 풍경 묘사는 가히 압권. 하지만 푸코를 <고등사범> 안에 가두어버리는 듯한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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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깃발 아래에서 -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서지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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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의 노학자가 이렇게 `발랄한` 상상력의 책을 쓸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 저자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허먼 멜빌이라면 <정치적 천문학>이라고 불렀을, 혹은 벤야민이라면 <성좌적 글쓰기>라고 불렀을 시도를 저자는 멋지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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