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1926~1984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 1
디디에 에리봉 지음, 박정자 옮김 / 그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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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에리봉의 책을 읽다가 예전에 읽었던 푸코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몇 가지 적는다.. 에리봉의 책이 <마들렌>이 되어버린 셈이다..

 

1. 한국 사회에서 <푸코의 시대>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었다면, 아마 그 시기는 90년대 중후반일 것이다..  여전히 <다현사>나 <청년사>, <자본론>이 세미나 커리로 채택되던 시절에, 푸코는 왠지 묘한, 범접하기 어려운, 하지만 치명적인 유혹을 불러 일으키는 텍스트였다.. 물론 <광기의 역사>는 아직 축약본밖에 번역이 되지 않았고, <말과 사물>의 번역은 도저히 읽어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감시와 처벌>, <임상의학의 탄생>, <성의 역사>로부터 푸코를 처음 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2. 푸코가 친숙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철학자, 사상가의 저작에 비해 그의 텍스트는 초심자라도 자신의 관심과 열정만 있다면 그나마 <미끄럽게> 들어갈 수 있는 틈새들을 보여줬기 때문이다(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아마 맑스뿐일 것이다.. 들뢰즈의 <천의 고원> 역시 그런 점에서 친절한 텍스트이긴 하지만, 그래도 들뢰즈와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칸트, 니체, 그리고 카프카와 프루스트로 이어지는 그의 꼼꼼하고 치밀한 독해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때 한국 사회에 유행했던 <탈주 교도>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2.1 물론 그런 점에서 푸코도 예외는 아니다..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과 같은 전기 논의들(고고학)에 대한 이해 없이 계보학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고.. 또 그 때문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오류들에 대한 비판은 전문가들의 몫일테고, 자신의 삶과 바로 <접속>될 수 있는 사상적 텍스트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래서인지, 90년대 쏟아져 나온 푸코에 대한 개론서/소개서들 중 지금 읽을만한 것은 거의 없다.. 가끔씩 용케 이런 글들을 써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볼이 화끈거리는 경우도 많다.. 아주 소수의 예외가 있지만, <당파성>을 드러내는 것 같아 여기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

<광기의 역사>건 이 책(감시와 처벌)이건 간에 나의 모든 책들은 자그마한 연장통이다. 사람들이 권력제도를 단락시키거나 그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혹은 완전히 분쇄하기 위해서는 이 연장통의 뚜껑을 열고 마치 드라이버나 펜치를 찾듯이 거기서 어떤 문구, 어떤 관념, 어떤 분석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나에게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다.

 

3. 최근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 느릿하게나마 번역되고 있다.. 어찌 보면 한권 한권의 저작에 병적일 정도의 완벽성을 유지하고자 했던(그래서 <저자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글이 때때로 무색하게 느껴지는) 그의 결벽 때문에, 저작들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사유의 전환점들, 도약들, 그 과정의 고민들을 강의록을 통해서나마 엿볼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물론 그는 그 저작들이 출판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의록은 항상 그의 저작들과 함께 읽을 것..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그의 조각글들의 모음집인 <Dits et ecrits>가 번역되면 좋겠지만, 번역을 무시하다못해 멸시하는 한국 학계의 풍토에서(번역본 1권이 논문 1편만큼의 가치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런 책들이 번역될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악조건 속에서 묵묵히 번역을 해주시는 분들께 일단 경의를 표할 수밖에(그래서 아무리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너무나 <치명적>이지 않다면 번역자를 매도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일단 내 주의이다)..프랑스어 원본을 읽어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영어 번역본도 없다), 일단 일본어 번역본에 만족하기로 한다..

 

4. 푸코의 텍스트는 인용하기가 쉽지 않다.. 문장 하나하나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적이면서 번뜩이기 때문에, 인용했다가는 자신의 엉성할 글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지는 좌절감을 감내해내야 한다.. 또 그의 많은 이야기들이 이제 어느 정도 정설로 받아들여져버렸기 때문에 거기에 굳이 푸코를 인용해서 참고문헌 수를 늘릴 이유도 없다.. 보다 본질적으로 푸코의 텍스트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부분이나 방법론이라기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통찰력>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용이 불가능하다.. 그건 푸코 자신이 택한 글쓰기와도 대립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순적이지만 푸코를 인용한다..

역사적 대상에 직접 접근하여 그것을 자신이 정의하기 위해 스스로 찾아나서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자신, 우리의 사상, 우리의 행동에 대한 성찰에 실질적인 내용을 부여하는 유일한 수단이옸다. 그것은 또한 반대로 역사의 암묵적인 가설에 우리도 모르게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것은 또한 성찰에 새로운 역사적 대상을 주는 한 방식이기도 했다. ... 이제는 더 이상 역사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의 성찰인 것이다. 우리의 사유에 역사연구라는 훈련을 부과하는 방법이며, 또 한편으로는 역사연구에 개념적, 이론적 테두리의 변화라는 시험을 부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4.1. 나아가 푸코의 글에는 방법론이 없다.. 푸코의 글을 모방한 대다수의 글들(우리나라에도 한 때 붐이 일었던 <~의 탄생> 류의 책들)이 엉성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존경하는 스승으로부터 배운 <방법론은 초짜들만 강조하는 것이다>라는 금언을 소중히 간직해둔다..

 

5. 사람들은 계속 푸코를 읽을까.. 지금과 같이 효율성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푸코를 읽는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한가하게 푸코나 읽고 있다니.. 하는 질책들이 여기저기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랑시에르로, 바디우로, 아감벤으로 또 유행을 좇아 이리저리 휩쓸리느니 차라리 푸코의 텍스트를 다시 한 번 꺼내 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뭐 어차피 사상이 현실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사유>에 ABC가 있는 것도 아닐테니..

 

cf. 디디에 에리봉은 말년의 푸코를 그리면서, 그의 학문적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세 텍스트를 계속 거론하고 있다..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성의 역사 3: 자기에의 배려>, 그리고 푸코의 유언을 존중하여 아직 출간되지 못한, 하지만 조르주 뒤메질, 폴 벤느 등 그와 가장 가까웠던 지인들이 한 목소리로, 그의 마지막 기획의 전모를 드러내줄 저작이라고 말한 <육욕의 고백>.. 그가 죽은 지 30여년이 지나도록 아직 출간되지 않은 걸 보면, 살아 생전에 그의 마지막 저작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글쎄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그 <기획>의 마지막 저작을 읽고 안 읽고가 그리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책이 소중하던 시절, 책에 대한 욕망에 괴로워하던 장서각의 수도승들이 아니다.. 죽기 3개월 전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마지막 강연에서 짤막한 몇 마디로 강의를 마쳤다..

"자, 이 분석 작업에서 여러분들에게 아직도 할 말이 많은데, 하지만, 너무 늦었군요. 고맙습니다."

 

그렇다. 너무 늦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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