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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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몸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이다. 나의 존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나의 영혼뿐 아니라 나를 나이게 만드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책상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는 마치 내가 읽고 있던 책장들로부터 내 얼굴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그러한 강력한 힘 때문이었다. 그 빛은 나의 이성을 무디게 만드는 동시에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그런 책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일까. 젊었던 한 시절을 온전히 쏟아 부었던, 하지만 이제는 왠지 건드리는 것조차 겁나는 애증어린 원고를 ‘일단’ 떠나보내고 나서, 며칠 멍하니 앉아 있었다. 3주라는 유예 기간. 시간은 이미 가득 차 있기도 했고 텅 비어 있기도 했다.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새로운 인생>. 처음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이 책은 왠지 늦은 밤 인적 드문 역사의 플랫폼에서 야간열차를 기다리면서, 아니면 토사와 얼룩이 눌러 붙은 시트에 앉아 깜깜한 차창을 보며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표 한 장 들고 낯선 세계로 떠나는 그런 ‘치기 어린’ 여행을 지금도 할 수 있을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낯선 여행의 기록”에 매료된 것이 아닐까.

한 청년이 있었다. 어느 날 그에게 ‘운명과도 같이’ 한 권의 책이 찾아온다. 그리고 책을 읽어버린 ‘나’는 어제까지 친숙했던 이 세계에 더 이상 속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때마침 같은 책을 읽었던 한 여인(자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물론 ‘외사랑’이다. 그녀에게는 이미 연인(메흐메트)이 있었다. 오래 전에 그 책에 홀려 먼 여행을 떠나 돌아온, 이제는 ‘그 세계’의 존재를 믿지 않은 회의주의자. “난 그 세계를 찾아낼 거야” 라고 들떠 말하는 나에게 그는 경고한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욕망에서 그의 경고를 물리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거리에서 총을 맞아 쓰러지고 자난은 어딘가로 사라진다.

사라져버린 자난을 찾아, 또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주인공은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수단은 버스이다. 왜냐고? 대답은 간단하다. 근대화 계획을 수립하던 터키 정부가 철도 활성화 정책을 포기했기 때문에. 주인공의 즐거웠던 유년시절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르크프 아저씨’는 자신의 인생의 전부를 철도청에서 일했던, 철도가 터키를 부흥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 때문에 ‘소년소녀 꿈나무’들을 위해 철도 만화를 그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쳤던 철도가 점점 쇠퇴해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정년을 맞이했고, 또 어느 날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어린 시절 아저씨와 ‘나’는 기차역 이름 대기를 종종 하곤 했다. … 헤킴한, 퀴식헤프레,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때 아저씨는 캐러멜 하나를 주었고, 그 캐러멜을 입에 넣자마자, 나는 다음 역을 기억해냈다. “비라바”, “브라보” 세월이 흘러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나는 어느 날 밤 딸아이와 함께 기차역에서 그 놀이를 한다. 그 다음 역은? 딸아이에게 캐러멜을 주던 순간, 나의 머릿속엔 “비라바”라는 역 이름이 떠오른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그리고 나는 어린 시절 르프크 아저씨와 나눴던 그 다음 대화도 기억해냈다.

언젠가 책 한 권을 쓸 거란다. 주인공에게 네 이름을 붙일 거란다.
<페르테브와 피터>같은 책이요? 이렇게 묻고 있는 나의 심장은 쿵쿵 뛰었다.
아니 그림이 없는 책이란다. 그러나 너의 이야기를 쓸 거란다.

<
새로운 인생>의 기원?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을 찾아낸 메흐메트는 왜 이름을 ‘오스만’이라고 바꿨을까? 아니면 왜 주인공은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에 그렇게 매료된 것일까? 모든 의문들이 풀리는 지점. 또 그 ‘비라바’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마침내 메흐메트가 정착한 마을이자, 주인공이 그를 발견하고 총으로 쏘았던 바로 그 마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의 이야기다. 아직 우리는 버스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야 한다.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 사고, 죽음, 그리고 버스 사고의 현장에서 ‘나’는 운명적으로 그녀와 재회한다. “나는 ‘이 곳엔 어쩐 일이야?’라고 묻지 않았어. 그리고 내게 이곳엔 웬일이냐고 묻지 않았고. 왜냐하면 우리 둘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둘만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했던 한없이 두근거렸던 버스여행. 도시에서 도시로, 마을에서 마을로. 그 사이에 ‘나’는 자난과 함께 버스 안 운전석 위에 설치된 텔레비전 영화에서 ”천 번이 넘는 키스신“을 보고, 그 때마다 ”복잡하면서도 심오하고 격하고 의미 있는 뭔가“를 욕망한다. 그리고 다시 운명적인 사고를 겪으면서, 그들은 나린 박사를 만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흔한 청춘 로망이다. 여기에는 하루키적인 ‘상실’의 냄새도 강하게 풍긴다. “책을 쫒는 모험” 하지만 ‘메흐메트’, 아니 한 때의 ‘나히트’의 아버지이자, 어떤 ‘음모’의 중심인물인 ‘나린 박사’와 만나면서 이 여행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나린 박사’,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사상을 오염시키는 책과 글의 공격, ‘거대한 음모’에 대항하기 위해, “주의 깊고 인간적이며 겸손한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 조직은 우리가 “우리의 가장 위대한 보물”인 “기억”을 잃고 속수무책의 얼간이가 되지 않게 할 것이고, 그리하여 이 비참한 망각의 시간이 아무리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해도, 마침내 영광스럽게 “절멸의 위기에 놓인 우리 자신의 순수한 시간, 그 역사를 통치할 주권”을 새로이 쟁취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 그가 생각한 것은 모든 친구들에게, 물건들을, 그들의 손과 팔이나 다름없으며 시처럼 영혼을 완성시키는 그 진실한 것들을, 허리가 들어간 찻잔을, 기름병들을, 필통들을, 이불들을, 당신이 진실되게 만드는 그 어떠한 물건이든지 보존하는 것이었다. 책에 대한 그의 불타오르는 분노는 자신의 과업의 ‘계승자’가 되어야 할 유일한 아들이 책에 의해 오염되어 집을 버리고 결국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뜬 자신의 아들 때문이기도 하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그가 선택하는 길은 결국 책을 읽은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테러’라는 가장 비이성적인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나린 가문의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 역시 나중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히트’라는 이름의 그 아들은 결코 죽은 게 아니라,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자난’의 연인으로, 그가 몇 개월 전 대학 강의실에서 만난 메흐메트임을.

린 박사의 ‘조사원’들이 열심히 수집한 정보들을 토대로 나는 메흐메트를 찾아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지들에서 보았던 것은 한 때 책에 마음을 빼앗겼던 사람들의 그 이후의 삶들이다. 하지만 이제 여행의 목적은 바뀌어버렸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어버렸다. 자난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책에 나오는 세계와 나의 적을 찾고, 그리고 그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길을 지나오는 동안 나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렸다.”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나린 박사의 ‘조사원’들이 열심히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나는 메흐메트를 찾아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지들에서 보았던 것은 한 때 책에 마음을 빼앗겼던 사람들의 그 이후의 삶들이다. 그것은 내 여행의 목적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어버렸다. 자난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책에 나오는 세계와 나의 적을 찾고, 그리고 그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길을 지나오는 동안 나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렸다.”

나는 수많은 메흐메트들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어느 날 운명적으로 자신이 찾던 ‘메흐메트’와 재회한다. “다리를 꼬고 앉아 세상을 잊은 채 내가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평온함에 가득 차 신문을 읽고 있는”, 이제는 자신의 이름인 ‘오스만’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는 메흐메트를. 이제 책이 주었던 빛은 그에게서 사라지고 없는 것 같았다.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철자, 마침표 하나 빠트리지 않고 꼼꼼히 책을 베껴 쓰지만, 그가 이런 일과를 되풀이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도시의 부자들, 전통주의자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의 노력과 신념, 현신, 인내심을 존경하는 사람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고집하며 사는 바보가 자기들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만족하며 산다는 사실에 일종의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 속에서 ‘작은 전설’이 되기도 했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을 찾아낸 것이 아닐까.

신선한 빵을 치즈 조각과 함께 먹을 때, 그의 인생이 이미 자리를 잡았고, 책 속의 표현처럼 '정상궤도에 들어섰음'을 나는 보았다. 그도 나처럼 책 때문에 길을 나섰지만, 그 여정 속에서 그는 내가 발견하지 못한, 죽음과 사랑과 재앙으로 충만한 여행과 모험과 평화를 발견해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 영원히 변치 않을 어떤 균형을 찾아냈다. 내면의 평화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가 매일같이 손, 손가락, 입, 턱, 머리로 작은 동작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치즈 조각을 조심스럽게 깨물면서 찻잔 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의 차를 음미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가 찾았던 균형의 평온은 그에게 결코 끝나지 않을 영원한 시간을 주었다. 나는 호기심과 긴장 때문에 테이블 밑에서 다리를 떨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질투심에, 상실감에, 아니 어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폭발에,  ‘나’는 컴컴한 극장에 앉아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과 가슴에 대고 정면으로 세 방을 쏘았다.” 그리고 총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나린 박사의 자택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자난은 떠나고 없었다. 여행은 끝나고 만 것이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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