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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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월 20일 규슈의 한 바닷가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남녀의 시체가 발견된다.. 소위 情死다. 죽은 남자는 당시 비리로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하던 한 관청의 실무대리. 직급은 낮지만 사실상의 실무를 담당하는 직원이었기 때문에 경시청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여자는 도쿄의 한 요리집의 여급..
사건이 일어나기 6일 전인 1월 14일 18시 그들의 규슈행이 도쿄역의 플랫폼에서 목격자들에 의해 목격된다. 도쿄발 하카다행 야간기차인 아사카제에 두 사람이 사이좋게 올라타는 것을 그 요리집의 단골인 한 남자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같은 요리집의 여급들이 목격한 것이다.. 목격자들이 있었던 곳은 13번 플랫폼, 그리고 두 사람이 승차한 아사카제가 정차해 있던 것은 15번 플랫폼..

너무나 통속적인 정사, 그리고 그들을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사건은 자살로 거의 굳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담당한 규슈의 한 시골 베테랑 형사의 한 마디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평일 저녁 6시처럼 혼잡한 시간대에 과연 13번 플랫폼에서 15번 플랫폼의 기차를 볼 수 있는가.. 기차시간표를 검색해보니, 그 시간대에 13번 플랫폼에서 15번 플랫폼의 기차를 볼 수 있는 것은, 즉 13번 철로와 14번 철로에 기차가 들어서지 않은 시간은 고작 4분.. 우연 치고는 너무나 절묘하지 않은가..

수사망은 14일의 현장을 목격한 인물로 좁혀진다.. 죽은 남자가 근무하는 관공서의 납품을 담당하는 회사의 사장, 그리고 비리 주범으로 지목되는 관공서의 장과는 개인적인 친분까지 있다(최근 마쓰모토 탄생 100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드라마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전전 중국전선에서 함께 생사를 나눈 상관/부하의 관계로 그려지고 있다.. 1957년의 일본, 사회파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마쓰모토의 작품에는 지난 전쟁의 흔적이 강하게 묻어나온다.. 예를 들어 마쓰모토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주인공 중의 하나는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항상 범죄의 대상, 혹은 범인이 되기 쉬운 '전쟁미망인'이다). 문제는 알리바이다..

두 사람의 사망시각은 대략 1월 20일 20-21시경.. 하지만 용의자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었다.. 이 시각 용의자는 도쿄에서 출발하는 야간기차를 타고 일본의 최북단인 홋카이도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21일 오후 하코다테와 삿포로 사이의 오타루 부근에서 기차에 그가 타고 있었다는 제 3자의 증언과 21일 20시 40분 경 삿포로역에서 그를 만났다는 신뢰할 수 있는 증언까지 있다.. 알리바이는 그야말로 완벽하다.. 적어도 20일 저녁 용의자가 일본 본토의 최남단인 후쿠오카에 있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정리해보자..

1. 20 저녁 8-9시 후쿠오카의 한 바닷가에서 남녀가 청산가리를 먹음(21일 오전 발견).
1.20 우에노발 급행 '도와다'로 21일 아침 아오모리 착.
1.21 아침 9시 50분 연락선(아오모리-하코다테)으로 하코다테 착. 연이어 하코다테발 급행 '마리모'로 20시 34분 삿포로 착.

이 작품의 묘미는 시행착오를 거듭해가면서 이상의 철벽같은 알리바이를 하나둘씩 깨트려가는데 있다.. 거기에는 독자들을 몰입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수첩을 꺼내어 기차 시간표를 끄적거리면서 시간을 계산하게 되는 것이다..
열차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추리소설에서 열차는 단골처럼 등장하는 무대이다..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떠올려보라.. 특히 기차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거의 예외없이 시간표대로 해당장소를 달린다는 점에서, 가장 결정적인 알리바이의 소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결정적이라는 믿음이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도 한다.. 전 열도가 거미줄처럼 엮어진 일본의 철도망에서는 때로 애매한 공백들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미묘한 4분의 공백이나, 상행선과 하행선의 교차 시간.. 혹은..


지금도 매달 발매되는 무려 천 여페이지에 달하는 <JR시간표>에는 (야간열차를 포함하여) 24시간 동안 일본 각지를 달리는 열차들의 타임 스케줄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가히 숫자들과 역이름으로 채워지는 풍경이다..개인적인 체험으로 보더라도 일본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때는 그 거미줄 같은 철도망을 확인하면서, 여행일정에 맞춰 기차시간표를 짜는 것이었다.. 현재 지점에서 목적지까지는 어떻게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 특급을 탈까, 아니면 보통을..그리고 중간에 열차를 갈아타는 지점에서는 바로 이어지는 열차를 탈 것인가, 아니면 내려서 1-2시간 주위를 돌아볼까.. 상행과 하행은 다른 노선(철로)을 이용해볼까.. 등등..

여기에는 철도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혹은 메타포)으로 존재하는 일본 사회의 특수성도 깔려 있다.. 60년대 미국 중심의 경제개발계획으로 철도보다는 고속도로 건설에 주력한 한국에서 철도는 도로의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거미줄같은 도로망을 철도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오르한 파묵의 터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이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식민지 시기를 제외하고는 소설에서 철도(혹은 기차)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근대 초기부터 철도 건설에 주력한 일본에서 철도는 근대의 상징으로서, 지금까지도 가장 친근한 운송수단이며, 그래서인지 (식민지 시기를 제외하고는 철도(혹은 기차)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그다지 없는 한국과 비교해보더라도) 철도는 문학작품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이다.. 일본의 국민소설가인 나츠메 소세키의 대표작인 <산시로>의 도입이 구마모토에서 도쿄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일본의 철도사업은 계속 이어져, 그렇게 넓지 않은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일본의 총 철로 길이는 아마 세계에서 다섯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이다(한 때, 근대화의 기준을 국토의 총 철로 길이로 계산하던 시절이 있었다.. 홉스봄의 책에 나왔던가).

또한 1970년 일본 고도성장의 정점에서 치러진 전국적인 축제였던 오사카 만국박람회(줄여 만박)에 맞춰, 도쿄와 오사카를 3시간에 주파하는 돗카이도 신칸센이 처음 운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리고 그 철도에 몸을 싣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사카 만박을 찾아왔다.. 공식방문자수만 해도 6천 4백만.. 일본 인구의 거의 절반이 오사카에 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만박에 의해 정비된 철도 인프라와 관광산업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Discover Japan>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말 그대로 일본의 숨은 아름다운 풍경들을 찾아다니자는 캠페인인데, 이 때부터 일본인들이 철도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의 오지들을 여행하러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볼프강 시벨부시가 이야기한 근대 철도여행의 역사(특히 파노라마로서의 차창의 발견)가 그 정점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점과 선>을 읽으면서, 사건의 열쇠이기도 한 기차시간표를 수첩에 써내려가노라니, 예전 일본 여행을 다니면서 기차 시간표를 보며 일정을 짜던 기억이 떠올라 괜시리 즐거워졌다.. 다시 한 번 옛날로 돌아가 묵직한 기차시간표를 들고 일본 열도를 한 번 돌아다녀볼 수는 없을까.. 뭐 <어떤 그리움>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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