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스터리츠 을유세계문학전집 1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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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기억들의 퇴적들로 이루어진 비통할 정도로 아름다운 산문. 독일 출신의 작가가 아우스터리츠라는, 나치로부터 어머니를 잃고 홀로 영국으로 보내진, 아픈 과거를 지닌 한 유대인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어떤 감각일까.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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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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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리뷰를 옮겨온다..

나는 이 책을 일본어로 처음 읽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을 구할 수 없다는 물리적 상황 때문이었다.. 최근 수업때문에 번역본을 다시 읽었지만, 2년 전과 지금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다.. 단, 아감벤의 저작이 남겨놓은 것들(remnants)이 불러일으킨 또 다른 파문들이 있지만, 그 파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적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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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책을 읽을 때 곤혹스러운 부분 중의 하나는, 읽고 싶은 책이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서를 입수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2시간 정도의 시간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을, 6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는가.. 물론 자신의 글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본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느끼듯이 '과연 번역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은 원서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류의 인간들을 항상 경멸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서경식의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을 원어로 읽고 있다.. 한국어 번역본을 떠올리며(물론 쉽게 구하기는 힘들지만)  다소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의 책은 왠지 일본어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책들에 비해 그다지 망설임 없이 일본어 책을 집어든 이유는 작가 자신이 이전의 저작에서 종종 언급해온 <모어의 문제>가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 2세>라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역사적으로 주어진 신분때문에, <조선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를 모어로서 사용하고, 또 그 언어로 사유할 수밖에 없는 작가 자신의 고민은 같은 동화 유대인이자,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 프리모 레비와 장 아메리의 차이를 사유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탈리아의 <동화유대인>으로 자라난 프리모 레비에게 있어 단테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상징되는 <이탈리아문화>야말로 이탈리아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의 기초를 이루는 기반이었다. 그 때문에 파시스트의 반유대조치라는 매개에 의해 이탈리아 사회로부터 <불순물>로 분류되어 배출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오히려 <야만적인 파시즘>에 대한 <문명적>인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었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그 정체성은 단순히 한 민족, 한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인문주의 내지 계몽주의의 문맥에서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었다(129-130)..

이에 비해, 아메리의 경우는 달랐다..
아메리는, 인간은 누구나 고향을 갖는다, 단 <끊임없이 그것을 잃어버리기 위하여>라고 말하면서, 그 말대로 진정한 고향상실자로서 죽었다. 고향이란 특정한 토지나 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어이자, 문학이나 음악, 문화 그 자체이다. 자신의 몸에 배어 있는 모어, 자신의 감성이나 지성을 만들어준 문학, 무엇보다 강하게 자극해 들어오는 회화나 음악, 정신의 근거가 되는 문화 그 자체가 어느 날 돌연, 자신을 배척한다면 어떻게 될까. 수용소에서 직업을 물으면, 고지식하게 <독일문학자>로 대답했던 수인이 나치 친위대에 반죽음을 당하도록 구타당한 에피소드를 아메리는 말하고 있다. 독일 유대인의 경험이란 실로 그러한 것이었다(132)..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 그는 자기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만약 내가 부나와 같은 생지옥에 떨어진다면, 프리모 레비의 단테에 해당하는 의지의 구석이 내게는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가 떠올리는 그 의지의 구석 역시 결국 억압자와 같은 언어를 쓰는 일본의 문학작품 일람표인 것이다.. 자신은 일본국민화를 거절하지만 일본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의 수인이라는 인식.. 이러한 인식은 자신의 형들이(서승, 서준식) 당시의 서슬퍼런 박정희 체제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어린 나이에 모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유를 모어를 스스로 선택하고자 하는 결단이라는 식의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늦게나마 조선어를 배웠지만, 여전히 일본어로 사유하고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괴로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의 책을 번역이 아닌 일본어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물론 내 일본어 실력이 여전히 지식과 정보의 획득 이상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언어에 담겨 있는 고민과 격투의 흔적을 번역본 이상으로 잘 읽어내는데는 역시 실패했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 사람의 문체에 깃든 사유와 감정에 교감하며, 그 책의 작가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험을 '아주 가끔씩' 하게 되는데(그나마 지금 떠오르는 이는 김현과 기형도 정도지만), 서경식도 그런 작가 중의 한 명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들을 쥐어짜내는 듯한, 한없이 여리면서도, 예민한 이런 여성적인 글을 쓰는 작가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래서인지 연구회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 키가 작으면서 상당한 비만에 얼굴이 시커멓고 험악하게 생긴 아저씨를 눈 앞에 대하면서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 그를 접하고 또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버린 그의 얼굴표정과 그 표정에 서린 분노,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슬픔 비슷한 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복잡다단한 감정들과 자신이 전후 일본사회와 싸워나가기 위해 체득해간 이성적 사고가 서로 응결되면서 이런 글쓰기가 나오는구나.. 물론 그의 글은 가끔씩은 질릴 정도로 독자를 힘겹게 하기도 한다..그는 절대로 타협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샌 감은 있지만, 서경식의 책은 프리모 레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에게 공감하며, 또 그를 통해 자신과 한국의 감옥에서 기나긴 옥중투쟁을 해나갔던 형들의 경험을 교차시키며 이해하고자 한 보기 드문 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특히 그 중에서도 레비의 자살에 대해 사유하는 장(<단순명쾌함>)은 많은 울림을 던져준다..

내게 있어 프리모 레비는 <인간>의 척도였다.. 말하자면 그야말로 오디세우스였던 것이다. 그를 보라. 인간은 역유토피아를 살아남아, 귀환해서 증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를 한층 보편적인 것으로 드높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당시 옥중에 있던 나의 형제에게도, 나아가 내 자신에게도 언젠가 인간의 세계로 생환해서 증언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예전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명쾌>했던 것일까(124-125)..

그에게 프리모 레비는 역유토피아를 살아남은 오디세우스, 그리고 긍정적 삶의 체현자의 한 전범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같은 생존자이자 증언자인 장 아메리와도 달랐다.. 그는 1986년 출간된 한 저서의 한 장을 자살한 장 아메리에 대해 할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 자신의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프리모 레비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단순명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윤리가 그렇게 간단히 정립될 수 없음을 그의 죽음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적어도 아감벤 역시 이 문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감벤의 <아우슈비츠>는 프리모 레비에 대한 가장 성실한 주석의 한 작업이었다.. 그의 책에 자극을 받아, 프리모 레비를 읽게 되고, 다시 그 길은 서경식에게까지 이어졌다.. 일단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은 여기까지다.. 아직 그의 책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과연 레비의 자살로부터 다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서경식의 글에서, 또 그의 얼굴에서 나는 종종 죽음의 냄새를 맡곤 했다. 나의 후각이 정확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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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수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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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레비나스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너무 착하다>는 것이었다. 홉스적인 사회에서 레비나스와 같은 타자론이 과연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여전히 회의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레비나스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효과>를 만들어내나보다. 우치다의 책은 바로 그 효과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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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의 책 밀란 쿤데라 전집 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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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맞는 오랜만의 주말 오후..
한동안 미뤄두었던 책정리를 다시 하다가, 낯익은 표지의 소설 한 권을 꺼내들었다..
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의 책>, 정민용 역, 문학사상사(4판, 1995)
천사들이 원을 지어 춤을 추면서 하늘 위로 떠오르는데, 그 아래 그림자로 악마가 웃고 있는 꽤 유니크한 표지가 인상적이었던 소설이다..

사실 이 책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95년 대학교에 막 들어와서 <서양문명의 역사>라는 수업의 첫 과제물로 보고서를 쓰기 위해 쿤데라의 <농담>을 하품을 참아가며 읽던 한 봄날의 주말 오후.. 기숙사에 있던 한 친구가 방으로 찾아왔다.. 지방의 같은 고등학교에 함께 재수를 하고, 서울로 올라온 친구였다. 잠깐 그 기숙사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 곳은 지방 출신 아이들이 서울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지방 유지들이 돈을 모아(아마 거기에는 지방세도 들어갔겠지만) 만든 기숙사였다.. 태극기와 '새마을 깃발'이 나란히 걸려 있던 그 곳은 아침 6시 기상/아침운동, 저녁 11시 귀사, 그리고 화요일마다 정체불명의 '귀빈'들이 와서 수감생 전체를 대상으로 '정신교육'을 실시했던 소위 '학숙'이었다.. 90년대 중반의 신입생 시절에 11시 귀가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덕분에 기숙사 옆에 있던 한 공원에는 새벽 5시 기숙사가 문을 열 때쯤 은근슬쩍 들어가기 위해 술취한 사생들이 벤치에 앉아 잠을 청하기도 했다.. 1개월 기숙사비 10만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 그리고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자는 어줍짢은 '효심' 때분에 어쩔 수 없이 살았던 곳이었다.. 뭐 어쨌거나의 이야기지만.. 어찌됐건 그 때 녀석은 졸린 눈으로 <농담>을 읽고 있던 나에게, 쿤데라의 소설을 그렇게 재미없게 읽다니.. 하면서 자기 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고 왔다.. 그 책이 바로 <웃음과 망각의 책>이다..

두 책의 편집/제본의 영향도 있었겠지만(내가 가진 책은 예전 지호출판사 판의 <농담>이다), 작가의 자전적 체험을 풀어서 쓴 <농담>에 비해,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인 <웃음과 망각의 책>은 훨씬 재미있었고, 또 유쾌했고, 또 에로틱했다.. 물론 여기에는 책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면서, 녀석이 지어내는 특유의 <킬킬>거리는 웃음이 왠지 소설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등학교때부터 녀석은 소위 <왠만큼 공부하는 축에 속하는> 모범생 부류와는 조금 달랐다.. 수능/본고사 1세대이기도 한 덕분에, 고 3이 되서도 <한국근대소설>이나 <수필, 평론집>을 다이제스트본으로 읽는 것이 고작이었던 시절(그래도 그나마 학력고사세대에 비하면 행복한 것일까)에도, 녀석은 <카오스이론>이니 <악마어사전>이니 심지어 <프린키피아>를 꺼내 읽으면서 종종 특유의 <킬킬>거리는 웃음을 짓곤 했다(물론 새로운 수능/본고사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지방의 일선 교사들로서는 학생들이 읽는 책에 대해서 그다지 '자신있게' 제재를 가할 수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기 때문에, 고 3 교실에서 이런 책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가능한 이야기였겠지만). 그 이후 당시 꽤 번역되어 있던 쿤데라의 소설들도 빠짐없이 읽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90년대 초중반은 하루키의 해이자 쿤데라의 해이기도 한 듯 싶다.. 90년대 후반이 넘어가면서 그들의 소설들은 왠지 거품이 빠진 듯 예전에 가졌던 생명력을 상실해버렸다..

(그런 점에서 하루키가 세계명작화되고, 쿤데라의 전집이 만들어지는 현상에 대해서는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녀석의 독서편벽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1학년 여름, 학회 세미나때문에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이니 <프랑스혁명사>를 끙끙대며 읽을 때도, 녀석의 책장에는 로트레아몽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과학 관련 서적, 그리고 각종 판타지 서적들이 꽂혀 있었다.. 로트레아몽이라니 뭐 이건 <졌다>라고 말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교가 달라 서로서로 만나기가 쉽진 않았지만, 가끔 녀석이 다니는 학교 주변(신촌)의 왠지 모를 포스가 느껴지는 바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서울에서는 <녹두거리>밖에 모르던 나로서는 <문화적 충격>을 받기도 했고, 또 덕분에 지금 내 책장에도 녀석이 추천해준, 평소의 나라면 절대 손이 가지 않을 장르의 책들이 몇 권 꽂혀  있기도 하다.. 하긴 김용의 <소오강호>를 보면서도 문자를 쓰는 녀석이었으니 "끕'이 조금 달라도 달랐다..

군대, 복학.. 나름 바쁜 시간들을 보내다보니 녀석이랑 만나는 횟수도 점차 뜸해졌다.. 그러던 중 녀석은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몇년 방황하더니 다시 시험을 보고 지방의 <한의대>에 들어갔다.. 이런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소위 <자모모임>, 즉 고등학교 시절 맺어진 어머니들의 네트워크에 의해서였다.. 고향에 내려가면 어머니는 종종 누구네 집 아이는 어떻게 됐더라 라면서 소식을 전해주곤 했던 것이다.. 그런 '끈끈한' 네트워크 덕분에 녀석과 다시 연락을 하게 됐고, 1년에 두세번 고향에 내려가면 그때마다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리고 2007년 가을 한국을 떠나면서 간헐적이던 연락은 다시 끊어졌다..

얼마 전 집에 내려갔더니 어머니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녀석이 행방불명되었다.. 학교들 다니던 중에도 1-2달 정도 잠적을 했던 경력이 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벌써 1년 반이 넘었다는 것이다.. 어느 지방에서 그를 본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죽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30이 한참 넘은 아들을 어디 가서 어떻게 데려오겠는가 하는 것이 친구의 어머니의 이야기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어떤  무엇이 30대 중반의 <삶의 무게>를 내팽겨치고 , 이렇게 자취를 감춰버리게 한 것일까..

녀석은 지금도 실종중이다..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웃음과 망각의 책>을 보면서, 녀석의 그 <킬킬>거리는 웃음이 불현듯 몹시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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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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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다. 사실 대중적인 책이기도 하고, 내용이나 분석 수준이 평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번역의 문제’였다. 물론 장남인 아이히만에게 형이 있다는 식의 번역은 애교로 봐준다 하더라도, 국가이성(raison d'état)을 ‘국가적 이유’로 번역하는 건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또 문장 자체의 주술구조가 얽히는 문제는 한 번 정도 윤문을 해줌으로써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래도 번역자에게 감사하며 책을 읽을 수밖에는 없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제 3제국의 역사, 그리고 제 3제국의 유대인정책에 대한 내 지식의 빈곤도 하나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처음부터 이 책의 대중적인 성격을 염두에 두었던 듯(원래 이 책은 미국의 <뉴요커>라는 잡지에 실린 저자의 연재 칼럼을 재편집한 것이다) 상당히 평이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그 때문인지 전문적인 역사서술이나 사회과학적 서술이 갖는 논리성과 엄격함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능하다면 아렌트도 책 속에서 언급하고 있는 라울 힐베르크의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이 엄청난 볼륨의 거작은 다행스럽게도 최근 아주 훌륭한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다고 한다. 언제쯤 읽을 수 있을까)를 책을 옆에 끼고, 아렌트의 책을 읽는다면 훨씬 윤곽이 잘 잡히지 않을까.. 물론 레비의 책도 참고가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참고 도서가 늘어난다면 당연히 시점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2차 대전 발발 직전에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계 유대인 지식인, 즉 홀로코스트를 체험하지 않은, 시오니즘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자 한 사회과학자가 홀로코스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벤야민의 친구이자 시오니즘의 대표적 권위자기도 한 게오르그 숄렘과의 공개 왕복서한은 잘 알려져 있다. 거기서 숄렘은 ‘사랑스러운’ 한나에게, “같은 민족인 유대인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한나의 응수는 “이런 사랑은 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나는 그런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으며, 둘째 내 자신이 유대인인 한 유대인을 사랑하는 것은 괴이하다는 것,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뭐,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네 지식계에서도 그런 논쟁 자체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금 더 지저분해지고 감정적으로 화하겠지만... 어쨌든 여기서는 그 논란의 문제를 아렌트가 제기하는 1)악의 평범함이라는 문제와, 2)예루살렘 재판의 문제라는 지점으로 간단히 정리해보도록 한다.

 

 

1. 악의 평범함(banality of evil):

악의 평범성은, 예루살렘의 재판정에 섰던 아이히만의 행위와 증언을 계속 접하는 과정에서 아렌트가 추상화해낸 표현으로, 사실 이 책은 아이히만 재판이라는 세기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바로 이 개념 때문에 전세계적인 논란이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 표현은 책의 마지막에 단 한 번 나온다(물론 논쟁 이후에 씌어진 「후기」에서는 조금 더 자세히 고찰되지만). 그것도 마치 신탁과 같이.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349). 과연 악의 평범함, 혹은 진부함이라는 말을 아렌트는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평범한’이라는 형용사를 이렇게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무수히 많은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유대인문제 전문가(이주의 달인) 아이히만은 결코 ‘괴물’(푸른 수염의 사나이)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다」라고. 그렇다면 아이히만이 이런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행위를 그렇게 일상적으로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렌트는 이를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의 결여, 나아가 사고능력의 결여에서 찾고 있다. 사고능력의 결여는 결코 그의 지능이 낮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사는 체제나 환경에 대해 인식할(비판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 즉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fulness)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의 결여를 아렌트는 증언 도중 끊임없이 ‘공허한’ 관청용어에 집착하는(“저는 관청용어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의 이런 행위는 그 이면에 다른 끔찍한 생각들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그렇게밖에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하는 능력의 부족(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106). 악의 평범함은 바로 이러한 무사유를 일컫는 말이다.

특히 아이히만의 언어구사능력(무능력)을 설명함에 있어 제 3제국의 언어규칙을 언급하는 대목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학살’을 ‘최종해결책’, ‘소개’, ‘특별취급’으로 표기하거나, 죽음의 수용소로의 ‘이송’을 ‘재정착’으로 표기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러한 언어규칙이 고안된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이 규칙은 이 문제 처리에 본질적이었던 아주 다양한 많은 협조체제가 이루어짐에 있어 질서와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거짓말 체계의 통상적 효과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살상과 거짓말에 대한 그들의 오랜 ‘정상적인’ 지식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150). →**전전 제국 일본의 경우를 떠올린다면 침략의 이데올로기로 동원된 아시아주의의 미사여구들을 이러한 언어규칙의 예로 볼 수 있을까. 이런 각종 미사여구들을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의 행위가 아시아에 대한 침략인지 해방인지 애매해져버리는 상황이 전전 일본에서도 자주 나타났던 것이다. 이는 ‘침략’이라는 단어 대신 ‘진출’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현대 일본사회에도 강고히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심, 이상주의는 우리가 그 말을 떠올리게 되는 일반적인 양상과는 다른 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이 때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아이히만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아버지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97)을 의미한다. 또 그는 양심에 대해서도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그 일이란 수백 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78-79). 다시 말하면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종전 무렵 유대인 처리 문제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갖도록 만든 것은 그의 광신이 아니라 바로 그의 양심이라는 점이다(223). 이는 비단 아이히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 3제국이라는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니, 악의 평범함이라는 문구를 극단적으로 사유한다면, 이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문명화된 나라들의 법에서는 비록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성향이 때로 살인의 충동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추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땅의 법은 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대량 학살 조직자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너는 살인할 지어다”라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제 3제국의 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악을 인식하게 되는 특질(유혹이라는 특질)을 빼앗아버렸다. … 그들은 그러한 유혹에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배워버렸던 것이다(226-227).

 

2. 재판의 문제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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