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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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다. 사실 대중적인 책이기도 하고, 내용이나 분석 수준이 평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번역의 문제’였다. 물론 장남인 아이히만에게 형이 있다는 식의 번역은 애교로 봐준다 하더라도, 국가이성(raison d'état)을 ‘국가적 이유’로 번역하는 건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또 문장 자체의 주술구조가 얽히는 문제는 한 번 정도 윤문을 해줌으로써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래도 번역자에게 감사하며 책을 읽을 수밖에는 없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제 3제국의 역사, 그리고 제 3제국의 유대인정책에 대한 내 지식의 빈곤도 하나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처음부터 이 책의 대중적인 성격을 염두에 두었던 듯(원래 이 책은 미국의 <뉴요커>라는 잡지에 실린 저자의 연재 칼럼을 재편집한 것이다) 상당히 평이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그 때문인지 전문적인 역사서술이나 사회과학적 서술이 갖는 논리성과 엄격함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능하다면 아렌트도 책 속에서 언급하고 있는 라울 힐베르크의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이 엄청난 볼륨의 거작은 다행스럽게도 최근 아주 훌륭한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다고 한다. 언제쯤 읽을 수 있을까)를 책을 옆에 끼고, 아렌트의 책을 읽는다면 훨씬 윤곽이 잘 잡히지 않을까.. 물론 레비의 책도 참고가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참고 도서가 늘어난다면 당연히 시점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2차 대전 발발 직전에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계 유대인 지식인, 즉 홀로코스트를 체험하지 않은, 시오니즘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자 한 사회과학자가 홀로코스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벤야민의 친구이자 시오니즘의 대표적 권위자기도 한 게오르그 숄렘과의 공개 왕복서한은 잘 알려져 있다. 거기서 숄렘은 ‘사랑스러운’ 한나에게, “같은 민족인 유대인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한나의 응수는 “이런 사랑은 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나는 그런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으며, 둘째 내 자신이 유대인인 한 유대인을 사랑하는 것은 괴이하다는 것,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뭐,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네 지식계에서도 그런 논쟁 자체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금 더 지저분해지고 감정적으로 화하겠지만... 어쨌든 여기서는 그 논란의 문제를 아렌트가 제기하는 1)악의 평범함이라는 문제와, 2)예루살렘 재판의 문제라는 지점으로 간단히 정리해보도록 한다.

 

 

1. 악의 평범함(banality of evil):

악의 평범성은, 예루살렘의 재판정에 섰던 아이히만의 행위와 증언을 계속 접하는 과정에서 아렌트가 추상화해낸 표현으로, 사실 이 책은 아이히만 재판이라는 세기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바로 이 개념 때문에 전세계적인 논란이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 표현은 책의 마지막에 단 한 번 나온다(물론 논쟁 이후에 씌어진 「후기」에서는 조금 더 자세히 고찰되지만). 그것도 마치 신탁과 같이.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349). 과연 악의 평범함, 혹은 진부함이라는 말을 아렌트는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평범한’이라는 형용사를 이렇게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무수히 많은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유대인문제 전문가(이주의 달인) 아이히만은 결코 ‘괴물’(푸른 수염의 사나이)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다」라고. 그렇다면 아이히만이 이런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행위를 그렇게 일상적으로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렌트는 이를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의 결여, 나아가 사고능력의 결여에서 찾고 있다. 사고능력의 결여는 결코 그의 지능이 낮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사는 체제나 환경에 대해 인식할(비판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 즉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fulness)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의 결여를 아렌트는 증언 도중 끊임없이 ‘공허한’ 관청용어에 집착하는(“저는 관청용어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의 이런 행위는 그 이면에 다른 끔찍한 생각들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그렇게밖에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하는 능력의 부족(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106). 악의 평범함은 바로 이러한 무사유를 일컫는 말이다.

특히 아이히만의 언어구사능력(무능력)을 설명함에 있어 제 3제국의 언어규칙을 언급하는 대목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학살’을 ‘최종해결책’, ‘소개’, ‘특별취급’으로 표기하거나, 죽음의 수용소로의 ‘이송’을 ‘재정착’으로 표기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러한 언어규칙이 고안된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이 규칙은 이 문제 처리에 본질적이었던 아주 다양한 많은 협조체제가 이루어짐에 있어 질서와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거짓말 체계의 통상적 효과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살상과 거짓말에 대한 그들의 오랜 ‘정상적인’ 지식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150). →**전전 제국 일본의 경우를 떠올린다면 침략의 이데올로기로 동원된 아시아주의의 미사여구들을 이러한 언어규칙의 예로 볼 수 있을까. 이런 각종 미사여구들을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의 행위가 아시아에 대한 침략인지 해방인지 애매해져버리는 상황이 전전 일본에서도 자주 나타났던 것이다. 이는 ‘침략’이라는 단어 대신 ‘진출’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현대 일본사회에도 강고히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심, 이상주의는 우리가 그 말을 떠올리게 되는 일반적인 양상과는 다른 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이 때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아이히만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아버지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97)을 의미한다. 또 그는 양심에 대해서도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그 일이란 수백 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78-79). 다시 말하면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종전 무렵 유대인 처리 문제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갖도록 만든 것은 그의 광신이 아니라 바로 그의 양심이라는 점이다(223). 이는 비단 아이히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 3제국이라는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니, 악의 평범함이라는 문구를 극단적으로 사유한다면, 이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문명화된 나라들의 법에서는 비록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성향이 때로 살인의 충동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추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땅의 법은 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대량 학살 조직자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너는 살인할 지어다”라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제 3제국의 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악을 인식하게 되는 특질(유혹이라는 특질)을 빼앗아버렸다. … 그들은 그러한 유혹에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배워버렸던 것이다(226-227).

 

2. 재판의 문제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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