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기획 - 혁신관료와 일본 전시국가
제니스 미무라 지음, 박성진 옮김 / 소명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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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전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암살>이라는 영화를 보러갔다..

천만이라는 숫자의 관객들이 봤다는 영화를 보시고 싶어하는 부모님의 간청과 천만 관객의 영화를 극장에서는 그다지 보고 싶어하지 않는 내 성향 사이에서 다소 주저하다가, 결국 두 분과 함께 극장에 갔다..

뭐, 역시나 진부한 스토리에, 이제는 익숙한 배우들의 애드립, 어느 비평가의 말처럼 <토포스의 나열>에 불과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2시간 20분 동안 열심히 봤다.. 때때로 뭉클한 구석도 있었다.. 해방 이후 70여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과거청산은 커녕 독립군의 후손들이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는 <부끄러움>의 코드를 건드리고 있었다..

 

아놔.. 이렇게 풀어야 할 역사가 아닐 터인데.. 우리는 언제쯤 <비분강개>에서 벗어나 좀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36년 식민지 역사와 해방 8년사, 그리고 이후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을까.. 물론 이렇듯 뒤틀려버린, 그래서 "나라를 빼앗겨도 절대 독립운동하면 안 된다"는 조소와 체념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비분강개>는 인간적인, 또 소중한 감정이지만, 그 시대를 냉철히 인식하는 지성적 언어가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해방 70주년에 대한 내 나름의 기획으로, 어제에 이어 오늘 읽은 책은..

제니스 미무라, <제국의 기획: 혁신관료와 일본전시국가>(박성진 역, 소명출판, 2015)..

 

2002년의 학위논문을 10년에 걸쳐 상당부분 수정, 보완해서 완성했다는 말에 걸맞게(그런데 역자는 종종 사소한 실수를 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공을 깎아내리고 있다.. 서문의 역주에 웨더헤드 동아시아연구소가 컬럼비아대학에 있는 연구기관이라고 밝혔으면서, 역자후기에는 코넬대학교에 있다고 쓴다던가, 구마모토 5고라고 썼다가 구마모토 2고라고 쓴다던가.. 이런 사소한 실수는 출판사가 충분히 편집과정에서 잡아줄 수 있는 것들임에도.. 소명출판..아..)

그 꼼꼼한 주석을 보더라도 굉장히 탄탄하게 씌어진 책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1930년대 이후, 즉 15년 전쟁기 제국 일본의 테크노크라트들의 기획에 대한 역사적 평가이다.. 저자는  동아시아 공영권, 대아시아주의와 같은 구상이 흔히 지적되는 것처럼 군국주의의 허황된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정학, 그리고 사회적으로 포괄적이고 기능주의적 사회를 지향한 진보적 개념들을 과학기술과 발전시킨 일종의 테크노-파시즘적 구상 속에서 표출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테크노 파시즘을 간단히 요약하면 통제를 통한 자유의 성취, 조직을 통한 혁신의 창출, 공동체를 통한 자율성의 추구, 수직적 계층을 통한 지위 향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저자 자신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당대 제국 일본을 끌고 나갔던 테크노크라트들의 기획은 결국 그들이 보수주의적 자본주의 현상유지 지지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전쟁에 지면서 결과적으로 좌초되고 말았지만, 그들의 기획이 가진 이상주의적 속성까지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저자는 1930년대 만주국 건설에 참여했던 테크노크라트들의 사상적 배경이나 실제 기획, 그리고 이들이 결국 1930년 후반 본토 일본으로 돌아와서 참여했던 혁신주의적 기획에 대해 치밀하게 서술하고 있다..

 

조금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목은 역시 이들 테크노크라트의 <실체>, 즉 그들이 슬로건으로 내뱉었던 <말>이 아니라, 그들의 기획과 당대 역사적 현실 사이의 <접점>이다.. 저자는 그들이 남긴 보고서나, 논설, 그리고 그들이 이후 남긴 회상기 등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떤 기획을 하고자 했는지, 그 <의도>는 아주 상세히 그리고 있지만, 실제 그들의 모습을 그려내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만주에서 관동군과 자본가, 그리고 혁신관료라는 집단은 사상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도대체 어디까지가 혁신관료인가.. 또 아시아(의 인민)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정말 질적으로 관동군이나 보수주의적 자본가들과 달랐던 것일까.. 만주국의 역사를 과연 혁신관료들의 보고서를 통해서 제대로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제국 일본의 군국주의를 무능력한 악의 축으로 재단해버리는 기존의 편견에 맞서, 전시기 제국의 기획자들은 제국을 경영하기 위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규명하는데 첫 번째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전전과 전후 일본은 일면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까지 함께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워낙 다양하고 두터운 연구성과들에 의해 뒷받침된 논지라 반박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 역시 미국의 일본계 연구자로서 저자가 갖는 포지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이 제국 일본의 역사를 훨씬 다층적으로 보게 해준다는 점도 분명하다..또한 그렇다고 저자가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분명히 이러한 신체제가 갖는 반동성, 공격성, 배타성, 수직성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이런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지지만은 않는 이유는 왠지 이러한 시도 역시 과거 제국 일본에 대한 일종의 노스탤지어로 소비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 때문이다.. 예전 간단히 리뷰를 적은 바 있는 가타야마 모리히데의 책 <미완의 파시즘>과 이 책이 같은 계보에 속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억측일까..

 

영화 <암살>에서 보듯, 우리는 식민자에 대해 하나의 표상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것 역시 하나의 만들어진 기억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식민자들은 다양한 얼굴들을 가지고 있다.. 그 얼굴은 때로는 사회주의와도 인도주의와도, 또 근대주의의 모습을 띠고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다양성에 주목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식민자>라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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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라는 이데올로기 - 일본 전후를 둘러싼 기억의 노이즈
고영란 지음, 김미정 옮김 / 현실문화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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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5일

전후 70주년

해방 70주년(도대체 <광복>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언제 출현했고, 또 성원권을 얻은 것일까.. 물론 <광복>이 아니라 <건국>을 기념해야 한다고 공개석상에서 공영방송 사장이 발언하는 나라에서 <광복>이라는 말도 감지덕지하며 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전후라는 이데올로기: 일본 전후를 둘러싼 기억의 노이즈>(고영란, 현실문화, 2013)을 읽었다..

 

타이틀이 퍽이나 매력적인 책이었다.. 이 책을 샀던 것도, 그리고 바로 오늘 이 책을 꺼내들어 읽었던 것도 책의 제목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종종 그러하듯이 기대는 배신을 수반하는 법이다..

 

물론 전후 일본사회, 특히 1945년부터 60-70년, 즉 일본 사회가 가장 역동적이던 시절에 대한 정보가 매우 빈약한, 그래서 저 무시무시하고 가증스러운 <대일본제국>과 너무도 소프트하고 사랑스러운 현대 일본 대중문화 사이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은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들었던 한 가지 의문은 왜 이 책에 굳이 <전후라는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을 썼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데올로기와 같은 논쟁적인, 그리고 다의적인 개념을 쓰기 위해서는 적어도 책의 서두에서 어느 정도 서술을 해줘야 함에도, 이 책은 아무런 언급 없이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제목을 보고 책을 구입한 이들에게 <낚였다>는 실망감을 줘서는 안 되는 법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아주 거칠게 요약한다면, 일본 사회에서 종종 신화화되는 <전후>의 균질화된 기억과는 다른 전후의 표상들을 <부락민>, <재일> 등 일본 사회 내의 소수자/타자의 기억들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연구자답게 저자는 소설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있다.. 

특히 전시기 일본 제국 내에서 작동하는 위계/차별의 정치에서, 부락민과 조선이 차지하던 위치가 전후 어떤 방식으로 소거되는지, 또 패전 직후 일본 공산당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공투라는 신화 속에 가려진 양자 사이의 갈등과 모순이 1955년 6전협의 결정으로, 재일조선인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공민'의 자격을 얻게 된 이후, 다시 말하면 각자의 에스닉 아이덴티티가 부여된 이후 어떤 방식으로 망각되고 비가시화되는지, 당대의 문학 텍스트들을 기존의 문학사적 정전 읽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어냄으로써 그려내고 있다..

 

물론 일본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한국인 연구자의 위치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다만 그 물음이 그다지 신선해보이지는 않는다는 점.. 더구나 그 위치성이 (구)제국의 학계가 (구)식민지 출신 연구자에게 할당해주는 자리와 겹쳐진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전후 비판이 전후 일본의 균질화된 기억에 그다지 커다란 균열을 가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 문제다.. 

더구나 서사가 응집적이지 못하고 산만해서 저자가 던지려고 하는 메시지가 종종 <생소한> 인용 텍스트들 사이에 끼어, 잘 전달되지 못한다는 점도, 이 책이 가진 약점이다..

 

굳이 한국어판을 내고자 했다면, 한국 독자들을 위해 구성상의 변화를 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을텐데, 일본 독자를 위해 쓴 책을 그대로 번역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도 아쉬운 점이다..

 

8월 15일이 아니었으면, 전후 70주년이 아니었으면 조금 더 부드럽게 평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미 해는 지고 있고, 오후까지 가독성이 떨어지는 책을 읽느라 기력을 소진해버린 내 마음은 황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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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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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소 책을 보내준 저자의 환대에 대한 응답이 너무 늦어버렸다..

잠깐, 그것은 정말 보답을 바라지 않는, 절대적 환대였던 것일까..

아니면 증여/선물gift이었던 것일까..

 

1.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아마 내가 여전히 <절대적 환대>에 대해서 회의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순수한' 혹은 '절대적' 환대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에 "다만 이 불가능성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현실적인 (조건부의) 환대는 이 불가능한 환대의 그림자 속에서 일어나며, 이 불가능성과 관계맺음으로써 스스로를 변형의 가능성 앞에 개방하기 때문이다." 정도의 주석을 달면서, 엉거주춤 합의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절대적 환대가 여전히 가능함을 주장하며, "만일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나'는 어떻게 '우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내가 '우리'에 속하는지 아닌지 나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저자의 목소리가 여전히 순진무구하게 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있기에 환대가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2. 만약 선물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더 간단해진다. 그 룰에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잘 정리한 것처럼, 선물교환의 성립조건은 1)증여와 답례에 시간적 간격이 있어야 하며, 2)증여된 물건과 답례품이 달라야 한다는 것. 즉 선물 교환은 지연과 차이(둘 다 불어로 difference이다)에 의해 이중적으로 규정된다.. 문제는 그 시간적 간격이 너무 벌어져버렸다는 점에서, 즉 너무 늦었다는 점에서 1)은 이미 어긴 것 같고, 증여된 물건에 비해 답례품이 너무 약소하다는 점에서, 2)의 성립조건도 간당간당하다는 점이다. 차이는 있지만, 너무 차이가 나도 문제가 아닌가.. 흠..

물론 부르디외의 논리는 너무 <전략적 사유>에 빠져 있어서, 가끔씩 사람들이 갖게 되는 <순수성>마저 전략처럼 읽어버리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왜냐하면 선물은 가끔씩 <은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글이었다.. 일단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주제가 서로 긴밀히 얽혀들어가는 짜임새 있는 구성과 그 구성을 채워주는 유려한 문체가 좋았다.. 마치 어린 시절 책을 많이 읽어 아는 것이 많은 누나/언니가 어린 동생들에게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법/말투가 사유의 소프트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자의 논의는 푸코, 부르디외, 고프먼 등등 많은 텍스트들에 대한 성실한 비판적 독해를 통해 만들어진 단단한 것이고, 마지막 장(7장)에서 공리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가히 전투적이다.. 그것은 예전 어느 학회에서 사회생물학(?) 논자들과 맞서 싸우던 저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편 논리적 궁지를 끝까지 파헤치기 보다는, 그냥 의뭉스럽게 넘어가버리는 부분이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또 어찌 보면 그 궁지는 인문사회과학적 사유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런 식의 처리 방법도 하나의 기술techne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또 책 중간에 간간이 수긍하기 어려운 대목들도 보이지만,-예를 들어 한국과 중국의 사회에 대한 논의나, 혹은 태아를 환대할 권리는 엄마에게만 있다는 주장 등- 그것은 저자와, 혹은 책을 읽은 다른 누군가와 충분히 이야기하며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이기에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다.. 내 책읽기가 평소의 까칠함에서 벗어나 다소 기울어져 있는(편향적인)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빛을 발하는 부분은 풍요로운 <주석들>이다.. 주석들에서 간간히 터져나오는 비평적 사유는 본문을 압도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어서 위태롭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저자가 엄청난 독서가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유가 본문을 따라가면서도, 잠시 벗어날 때 만들어지는 주석의 자리는 이 책의 색깔을 훨씬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특히 경상도 출신이고 강남에 거주하며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60대 남자에 대한 정신분석이나, 제주도에서 택시기사와 승객 사이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미묘한 관계성에 대한 분석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난다..

 

오랜 세월에 걸쳐 깊어진 사유들이 켭켭이 쌓여 만들어진 노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무겁지 않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가볍게 돌파하는 신공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 무엇보다 그간 한국 사회에 침투해온 아감벤 류의 <비관주의>에 단호히 맞서 <사회적인 것>, 그리고 <절대적 환대>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 역시 이 책이 가진 미덕이다..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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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손아람 지음 / 들녘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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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영화였다..

일단 원작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그 정도면 합격점 이상이었다..

며칠 간판을 올리지도 못한 채 이 영화가 결국 상영관을 찾지 못해 조기종영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무서운 것인가 보다..

 

매스미디어에 아무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종종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프레임에 갇히고 만다..

2009년 겨울의 용산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중산층 시민의 평온한 일상이 자본의 놀음에 의해 한순간에 붕괴될 수 있다는 위기적 사건을 미디어는 법을 어기는 철거민들의 떼거지로 바꿔냈고, 실제로 그 해 겨울의 참사에 대해 시민들은 놀라울 정도로 침묵했다..

이미 MB에게 표를 준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집단심리가 작동했던 것일까.. 그래서 나는 용산 참사에 대한 사람들의 그 냉정함과, 그 해 여름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 이후 애도정국에서 보여준 그 과도한 열정 사이에서 놀라워했다. 도대체 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소수의견>은 그 무렵 읽었던 소설이었다..

일단 1년이 겨우 지난 시점에서 이 사건을 픽션화할 수 있는 힘이 놀라웠고, 또 무엇보다 당대의 시점에서 젊은 작가가 느꼈던 고민들이 여과없이 드러나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이 작품에 적절한 비평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소설적 완성도에 대한 전문적 비평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지금 우리 사회 앞에 저질러져버린 <악>, 프리모 레비가 말했던 것처럼, 그런 잘못이 존재한다는 것에, 그런 잘못조차 존재하는 이 만물의 세상 속에 돌이킬 수 없이 자신이 끌어들여졌다는 것에, 그리고 자신의 선한 의지는 아무 것도 아니거나 턱없이 부족하고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것에 가책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부끄러움의 소산으로서 이 작품을 읽어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래서 소설 중반부에 <연민>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다소 안타까웠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그래서 더욱 더 영화에서는 안타까웠던) 대목은 , 경찰특공대원이었던 아들을 잃은 한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하지만 그 역시 경찰과 대치중이던 현장에서 아들을 잃고 지금은 피고석에 서 있는 한 철거민 아버지와 함께 자리한 법정에서 했던 참고인 진술 장면이었다.. 죽은 특공대원의 아버지는 철거민 아버지를 위해 진술한다..

 

아들이 죽고 나서 저는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누가 아들을 죽였는가, 그게 아니라 왜 아들이 죽었는가를요. 저는 누가 아들을 죽였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걸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박재호씨는 그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박재호 씨는 누가 아들을 죽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같은 아버지된 자로서 그 슬픔과 분노에 공감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박재호씨가 제 아들을 죽이게 된 건 피치 못할 상황에서의 실수였을 거라고요. 저는 박재호 씨가 처벌 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진술을 마친 그에게, 만약 피고가 정당방위라면 경찰인 당신의 아들이 혹시 현장에서 피고인의 아들을 죽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냐는 검사의 가학적인 질문이 던져진다. 그는 울먹이며 말한다. "네 그렇습니다. 제 아들이 그 아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만족합니까." 아들을 기리는 그 울음은 세상에 유일무이한 슬픈 울림을 가졌다. 그 유일한 울림을 이해하는 또 한 명의 아버지가 공명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증오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픽션에 불과하다고, 혹은 값싼 감상이나 섣부른 화해라고 폄하하고 싶지 않다.. 두 아버지가 만나 자식을 잃은 슬픔에 공감하고 애도를 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식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갔는지에 대한 서로의 공감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뉴스나 르포가 아닌 소설이 만들어내는 힘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이 대목을 감정적으로 처리하기보다, 조금 더 명료하게 그 메시지를 전달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족이지만, 이 소설이(영화가) 잘 만들어진 법정 드라마라는 비평계의 평가에는 일부 동의하지만, 왠지 거기에는 한 가지 물음이 더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혹시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법정>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그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제작된 사회 비판적 성격의 영화는 거의 모두가 법정에서 결말을 맺는다.. <또 하나의 약속>, <변호인>, <부러진 화살>.. 또 뭐가 있더라.. 그리고 영화는 대개 피해자들에게 아주 조그만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이 너희들에게 남겨진 최소한의 희망이라는 것처럼..

 

악의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리street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남겨진 것은 이제 법정, 더구나 자신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판사와 검사, 변호사들이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한통속인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그곳뿐인가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더구나 그 곳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감내할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가.. 우리는 어느새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에 포섭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의 힘은 여기까지다.. 어쨌거나 <나는 (결국) 변호사요>라는 주인공에게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결코 무리하게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신화적인(진짜 만들어진 신화일 지도 모르는) 80년대에 대한 작가의 교묘한 거부의 몸짓이 있다.. 그것이 90년대 혹은 그 이후 세대의 한 정치적 표현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차피 세계에 던져진 이상, 그 텍스트는 저자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운명을 가지고 이 세계를 유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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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만들기 -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재현의 정치학
이남희 지음, 이경희.유리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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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씌어졌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산만하고 밋밋하다. 70-80년대 한국 사회사, 나아가 소위 `운동권`의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바깥에서 본 풍경의 스게치에 머무른다는 느낌. 내적 의미를 탐구하기보다는 서구 이론으로 <정리>하려는 성급함 때문일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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