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견
손아람 지음 / 들녘 / 2015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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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영화였다..

일단 원작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그 정도면 합격점 이상이었다..

며칠 간판을 올리지도 못한 채 이 영화가 결국 상영관을 찾지 못해 조기종영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무서운 것인가 보다..

 

매스미디어에 아무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종종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프레임에 갇히고 만다..

2009년 겨울의 용산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중산층 시민의 평온한 일상이 자본의 놀음에 의해 한순간에 붕괴될 수 있다는 위기적 사건을 미디어는 법을 어기는 철거민들의 떼거지로 바꿔냈고, 실제로 그 해 겨울의 참사에 대해 시민들은 놀라울 정도로 침묵했다..

이미 MB에게 표를 준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집단심리가 작동했던 것일까.. 그래서 나는 용산 참사에 대한 사람들의 그 냉정함과, 그 해 여름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 이후 애도정국에서 보여준 그 과도한 열정 사이에서 놀라워했다. 도대체 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소수의견>은 그 무렵 읽었던 소설이었다..

일단 1년이 겨우 지난 시점에서 이 사건을 픽션화할 수 있는 힘이 놀라웠고, 또 무엇보다 당대의 시점에서 젊은 작가가 느꼈던 고민들이 여과없이 드러나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이 작품에 적절한 비평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소설적 완성도에 대한 전문적 비평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지금 우리 사회 앞에 저질러져버린 <악>, 프리모 레비가 말했던 것처럼, 그런 잘못이 존재한다는 것에, 그런 잘못조차 존재하는 이 만물의 세상 속에 돌이킬 수 없이 자신이 끌어들여졌다는 것에, 그리고 자신의 선한 의지는 아무 것도 아니거나 턱없이 부족하고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것에 가책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부끄러움의 소산으로서 이 작품을 읽어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래서 소설 중반부에 <연민>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다소 안타까웠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그래서 더욱 더 영화에서는 안타까웠던) 대목은 , 경찰특공대원이었던 아들을 잃은 한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하지만 그 역시 경찰과 대치중이던 현장에서 아들을 잃고 지금은 피고석에 서 있는 한 철거민 아버지와 함께 자리한 법정에서 했던 참고인 진술 장면이었다.. 죽은 특공대원의 아버지는 철거민 아버지를 위해 진술한다..

 

아들이 죽고 나서 저는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누가 아들을 죽였는가, 그게 아니라 왜 아들이 죽었는가를요. 저는 누가 아들을 죽였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걸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박재호씨는 그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박재호 씨는 누가 아들을 죽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같은 아버지된 자로서 그 슬픔과 분노에 공감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박재호씨가 제 아들을 죽이게 된 건 피치 못할 상황에서의 실수였을 거라고요. 저는 박재호 씨가 처벌 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진술을 마친 그에게, 만약 피고가 정당방위라면 경찰인 당신의 아들이 혹시 현장에서 피고인의 아들을 죽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냐는 검사의 가학적인 질문이 던져진다. 그는 울먹이며 말한다. "네 그렇습니다. 제 아들이 그 아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만족합니까." 아들을 기리는 그 울음은 세상에 유일무이한 슬픈 울림을 가졌다. 그 유일한 울림을 이해하는 또 한 명의 아버지가 공명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증오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픽션에 불과하다고, 혹은 값싼 감상이나 섣부른 화해라고 폄하하고 싶지 않다.. 두 아버지가 만나 자식을 잃은 슬픔에 공감하고 애도를 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식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갔는지에 대한 서로의 공감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뉴스나 르포가 아닌 소설이 만들어내는 힘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이 대목을 감정적으로 처리하기보다, 조금 더 명료하게 그 메시지를 전달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족이지만, 이 소설이(영화가) 잘 만들어진 법정 드라마라는 비평계의 평가에는 일부 동의하지만, 왠지 거기에는 한 가지 물음이 더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혹시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법정>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그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제작된 사회 비판적 성격의 영화는 거의 모두가 법정에서 결말을 맺는다.. <또 하나의 약속>, <변호인>, <부러진 화살>.. 또 뭐가 있더라.. 그리고 영화는 대개 피해자들에게 아주 조그만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이 너희들에게 남겨진 최소한의 희망이라는 것처럼..

 

악의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리street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남겨진 것은 이제 법정, 더구나 자신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판사와 검사, 변호사들이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한통속인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그곳뿐인가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더구나 그 곳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감내할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가.. 우리는 어느새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에 포섭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의 힘은 여기까지다.. 어쨌거나 <나는 (결국) 변호사요>라는 주인공에게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결코 무리하게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신화적인(진짜 만들어진 신화일 지도 모르는) 80년대에 대한 작가의 교묘한 거부의 몸짓이 있다.. 그것이 90년대 혹은 그 이후 세대의 한 정치적 표현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차피 세계에 던져진 이상, 그 텍스트는 저자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운명을 가지고 이 세계를 유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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