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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
이상민 지음 / 푸른물고기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세상이 변한 걸까, 내가 변한 걸까. 예전 같았으면 이런 작품을 접하곤 '그러니까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지 말아야지'...하는 지극히 '권선징악'적인 착한 교훈을 품으며 가슴을 쓸어 내렸을텐데, 이상하다. 당장이라도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어디선가 환생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복수의 드라마를 꿈꾸고 있지는 않을 지...그나마 그동안 남에게 해꼬지 하며 살아오지 않았다는 생의 이력에 안도의 한숨을 쉬어보기는 커녕, 복수의 영혼들은 지금쯤 어떻게 칼날을 갈고 있을지...마치 복수의 그날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마음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만큼 사회가 흉흉해지고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인가.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은 결코 소름끼치는 공포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결의를 다지는 도덕적 사회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작품이 굳이 의미상 '업(業)'이라는 단어를 채택하지 않고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karma)라는 종교적 단어를 제목으로 한 것은 역으로 종교적 색채를 띠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카르마는 불교의 우주원리이자 윤회의 법칙으로 업장(業藏), 업보(業報), 인연(因緣),숙명(宿命)등과 유사하게 사용되는 꽤 근사한 용어이다. 일례로 어떤 일의 결과를 놓고 '그것은 우리들의 업보입니다' 하는 것과 '그것은 당신과 나의 카르마 때문입니다'하는 것을 비교해본다면 같은 뜻이라도 종교적 색채의 유무를 결정짓는 선택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생에서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카르마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카르마를 대신 지려는 각오의 결과이다. 당신의 행위를 돌이켜 보거라. 그것이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 지를, 오늘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내일, 또는 모레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과응보의 우주적 법칙이다."

영혼의 마법사라 불린 다스칼로스의 견해는 좀 더 인간적이고 매력적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카르마를 대신 지려는 각오'는 한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심금을 울리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꼭 남녀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부모, 자식, 친구로서 사랑을 주고 받는다. 그 말은 누구라도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의 죄값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아무리 방어운전을 한다 해도 교통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는 논리와 같을 것이다. 즉,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불공평하게 억울할 수 있다는 공평함을 깨우쳐 주는 진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내가 억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세상은 잔인하게 불공평한 곳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만 싶다. 적어도 전생이나 후생을 생각지 않고 오늘 내가 살아 있는 현생에서만큼은 죽도록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라면 내가 억울한만큼 남도 억울하지 않음이 늘 억울한 존재들 일 것이니까.

이 소설의 작가는 다행히도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의 억울함이 아닌, 과거에 치명적인 잘못을 해버린 사람들의 억울함을 보여주고 있기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한 죄값을 확실하고 뒤끝있게 치루어 준다. 원인도 모르고 결과도 알 수 없는 과정만 극대화된 작품들 속에서 그런 것들이야 말로 오늘을 사는 방식이며 현대인의 자화상이라는 이 시점에 '전설의 고향'식 복수코드와 드라마틱한 연출방식은 어쩌면 정석대로 진부해서 희소성을 획득하고 마는 우연적 행운마저 묻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선사한 착한 전개와 그 결말에 성실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극적인 차별화 요소 없이 차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공포추리 소설로서 진부하다거나 인물, 서사의 전개가 흥미롭지 못하다거나 문학적으로 차별화되는 요소가 없다라는 뜻은 아니다. 몇 가지 극적인 성취를 꼽자면 탄탄한 구성과 이야기 자체의 오락성, 그에 수반하는 어줍지 않은 주제전달과 몰입도 일 것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아마도 멈출 수 없는 속도감일 것이다. 공포영화를 보다보면 몇 가지 법칙을 접하게 되는데 그중에 하나가 아마도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만한 장소에 그것도 벌벌 떠는 겁쟁이 배우가 혼자 나서는 죽어 마땅한 발걸음일 것이다. 도대체 왜? 그냥 있거나 다른 사람과 같이 갈 것이지...나는 이 작품의 시놉시스를 접하고 밤에는 읽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한 꼭 그날 밤 바보처럼 책장을 펼쳤다. 그리곤 시시각각 엄습하는 공포감 때문에 중간에 책을 덮을 수가 없어 그냥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책을 덮고 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독서를 하고 말았다. 사람들과 동떨어져 으슥한 곳을 혼자 걸어가던 얼치기 배우와 무서워 책을 덮지 못한 내가 다를 건 없었다. 그치나 이치나 미칠 것 같은 두려움에도 너무나 궁금한 호기심은 똑같았나 보다. 다행인건 나는 죽지 않았다는 것, 그리곤 책을 덮으며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는 것. 무서워 죽을 뻔했네 !

등장인물이 적지 않다. 먼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대립구조가 크게 나누어 진다. 졸업을 앞두고 추억을 만들기 위해 단행한 폐교여행(나로선 절대 이해불가한)의 참가자들인 효진, 정희, 인경, 현숙, 민선의 아릿따운 아가씨들과 상류층 자제들로 구성된 골프 동아리 모임의 회장선출 기념 여행을 떠나게 된 젊은 귀족집단의 영석, 환곤, 종욱, 성태, 윤철이 그 주인공이다. 소설은 효진을 비롯한 여학생들이 폐교에서 한명씩 돌아가며 공포이야기를 하던 중 우연히 자신들 외에 한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비슷한 시각 젊은 귀족들은 우연히 '영흥산장'이라는 으슥한 곳에 도착하고 때마침 폐교에서 봉변을 당한 한 여학생이 그들에게 납치된다. 물론 이 여학생은 그야말로 억울하고 참혹하게 살해 당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여학생의 죽음이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는 것, 여학생의 죽음의 앞뒤로 비밀스런 사연들이 얽히고 설키게 된다. 여학생이 폐교에서 산장으로 오기까지의 비밀스런 배경(출생의 비밀), 산장에서 여학생이 당한 일(권력자의 폭력), 그 후 처리를 위해 폐차장으로 도착한 후 그곳 사람들과의 우발적인 사건들(사건의 확장)이 등장인물의 기억의 홍수를 터뜨리는 동안 우리들은 여학생의 영혼이 얼마나 한스러웠을지 열심히 공감하게 된다.

또 하나의 대립구조는 효진과 영석부부를 축으로 한 사건의 중재 및 해결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들이다. 정신과 상담의 신도와 같은 병원의 미선이 복수를 막아 보려 애쓰는 측이라면 여학생의 혼을 10년 동안 키우는 숙주로서의 영매 원희는 복수를 시행하려는 상대측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그 마지막 결투를 온전한 인간 대 원한을 가진 혼으로 하지 않고 참신하게도 미선이라는 채널러(channeler)를 내세워 살인사건 당일 또 하나의 희생자가 여학생의 혼을 막아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면서 소설을 한층 더 복합적이고 품위있게 위치시킨다. 그리고, 불륜남편이면서 불임부부였던 영석과 효진 내외에게 임신이라는 소망이 결국 그들에겐 내세의 불행을 암시하는 카르마였음을 깨닫게 한다. 자칫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식의 청춘호러물이 될 뻔 한 서사가 인연이나 업보같은 보편적이고도 무거운 주제를 얹으면서도 너무 빤하지 않고 세련되게 전개됨, 그 자체가 상당히 파워풀하게 느껴졌다. 전방위 글쓰기를 해왔다는 작가의 이력과 영상관련 컨텐츠, 스릴러 장르에 대한 창작열이 이루어온 결과라 생각되고 이야기 꾼으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연과 그것을 숨가쁘게 좇아가는 카메라 장면묘사는 한여름밤의 서늘한 추억으로 남을 듯하다. 또 하나, 이렇게 끔찍하고도 소름끼치는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무섭게 버티고 앉아 책장을 넘길 수 있었던 건 죄를 지은 자들이 죄값을 치르는 꼴을 끝까지 보겠다는 의지와 기대감도 한몫 했음을 이제야 실감한다.

카르마...내 인생은 지금 어떠한 업보로 고통받고 있는지, 현세에 내가 저지른 업보가 또 후세엔 어떠한 업보로 이어질지...잠시 큰맘 먹고 거울 앞에 앉아보아야 할 듯하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도 거울을 똑바로 볼 수 있다면 그것 역시 대단한 용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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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8-22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장르소설 엄청 즐기는 데...우리나라 작가가 쓴 건 또 잘 안 읽어요.
님의 리뷰를 보니,그리고'카르마'를 다뤘다고 하니 읽어보고 싶은걸요~^^
리뷰만큼 괜찮을까요?
 
<우울한 코브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 디 아더스 The Others 1
크리스토퍼 무어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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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잘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반나절만큼은 모든 감각의 방향성을 잃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그 느낌을 정확하게 잡아내기가 어려웠다. 이와 유사한, 예를 들면 컬트나 환타지, 괴물, 파충류, SF장르, 성인시트콤 등등 근처에서 맴도는 단어들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있게 한마디 내밀지 못하겠다. 그렇다고 흥미위주의 가볍고 트렌디한 소설은 아니다. 다른 세계, 다른 취향, 다른 감수성을 표방한다는 '디 아더스 the others' 문고의 첫 번째 작품이니 그 선정에의 대표성을 고려하더라도 혹시나 적절치 못한 비유로 선입견을 유발할지 몰라 상당히 조심스럽다. 다만, 이 책의 표지에 그려진 일러스트가 이런 내 심정을 대변한다 할 수 있겠다. 때로는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 한 장이 모든 걸 말해주기도 하니까.  


기왕 그림이야기 나왔으니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뭐랄까 대부분 보라색으로 여겨지는 어떤 마을에 사람들은 그 보랏빛 기운을 자신이 보라색이었기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차에 어느날 갑자기 카멜레온 같은 변온동물이 마을을 덮치자 그제서야 색깔에 눈뜬 사람들은 자신의 색을 찾아간다고 하면 어떨까. 그래서 마을은 다시 오렌지 빛으로 생생해졌다고 한다면. 보고 들은 것에 한해서만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내 상상력은 거기까지인 것이 안타깝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소설은 사람을 삼켜버리는 바다괴물이 등장한다고 하여 영화 '괴물'과 비슷하다거나 마을에 일어난 사건을 추적하는 경찰이 주요 인물이라 하여 범죄수사 혹은 추리물의 외화시리즈에서 그 뿌리를 찾는 다거나 화려한 컬러감과 SF적 환타지로 가상과 현실을 넘나든다 하여 팀 버튼 식의 허리우드 영화를 상상해선 안된다. 어디서 한번은 본듯한 소재와 구성, 연출은 시각적인 자극에 끈질기게 호소하면서 외향적으로 화려해 보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은 오히려 그러한 이야기를 끌어가는 밑바탕, 즉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혹은 보였던) 사람들의 정신적 건강과 잃어버린 내면을 찾아가는 고통과의 정면승부에 있다 할 것 이다. 작가는 이 진중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현대인의 감기 증상인 우울증을 차용하고 그냥 우습게 지나가고 말 이야기로 치부 되지 않기 위해 상당부분 의학적, 과학적 지식을 배경으로(그것도 자연스럽게) 선택한 듯하다.

작가가 많은 일(직업)을 해온 것 같고, 많은 사람(관계)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기발하고 엉뚱한 상상력은 여지껏 그가 살아온 방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끄덕임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제 넘지만 나는 그를(내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여) 환상으로도 현실을 끌어안는 '허그(hug)작가' 라는 닉네임을 붙여 드리고 싶다. 어쩌면 작품에서 괴물일지라도 피하지 않고 끌어안고 사랑해 버리는 누군가가 결국 우리 모두여야 하는 건 아닌지 어느날 갑자기 바닷 속에서 오천만년을 살다가 짠하고 나타난 괴물이 결국은 오천만년을 함께해 온 그때마다의 누군가가 마주했어야 하던 현실은 아니었을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에 작가의 특이한 이력과 다양한 체험에 그리고 그것의 결과인 이 작품에도 '꽤 괜찮은 결말'을 예상하고 싶다. 

냉소의 진화

나는 우울증으로 처방받은 항우울성 약제에 대한 금단현상에 대해서는 아는 체 할 수 있는 입장이다. 3년 전 수면제(사람들에겐 이렇게 말하였다)를 처방받아 얼마간 약으로 잠을 청했고, 약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스스로를 이겨보기 위해 약을 끊어도 보았기에 신체와 마음에 그 결과 어떠한 현상이 자각되는지 알고 있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초조감과 불안은 시간이 경과될수록 약을 끊어야 하는 이유와 의지를 잊게 하고 오로지 찰나의 고통은 다시 약을 복용하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신념만 더 확고해질 뿐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다시 약을 복용하게 되었을 때 그 패배감과 죄책감은 점점 자신을 자학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증상과 벌어지는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게 되는...감기약이나 생리통 진통제와 같이 가볍게 생각하여 복용했던 수면제(나는 끝까지 이렇게 말한다)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작가가 항우울성 정신의약을 복용한 적이 있는지, 그것으로 인한 금단증상을 겪어 본 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금단현상은 사람마다 같은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항우울성 약을 중단하면 성욕이 증가한다는 가설에서 모티브가 시작되고 그 상상력의 범위를 확장하는데 기어이 성공한다.

낯설지만 익숙해 보이는 파인 코브마을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세상을 부정하거나 약에 취해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과거가 있지만 어느 순간 어떤 일들을 계기로 그만 삶의 좌표를 잃어버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신적인 건강에 이상이 생겨버린다. 복잡한 도시를 피해 이곳에 왔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신과 의사의 처방에 따라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사실, 약을 복용하느냐 안하느냐 여부만 살짝 덜어낸다면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을 정도로 불가항력적이진 않다. 그만큼 현실세계에서도 드라마나 소설 이상의 초현실성을 이미 그 특성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건의 발단이 되는 베스 리앤더라는 주부의 자살과 그녀가 청소강박증이라는 결벽증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확실치 않은 신경전에 불과했다. 대마초에 의지하며 지난 8년간 제대로 된 사건을 맡지도 해결하지도 못했다는 경찰관 시오,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미친 여자 전직 B급 영화배우 몰리, 동네 사람들의 슬픔이 줄어 드는 것이 안타까운 술집마담 메이비스, 블루스 정신으로 자신을 자학하는 흑인 가수 캣피쉬, 스탠퍼드 대학에서 동물행동학 박사학위를 받고 쥐를 관찰하는 생물학자 게이브, 남편사후 코브 마을로 이사와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한 해경화 화가 에스텔, 돌고래같은 바다 포유동물에 비정상적인 성적욕망을 느끼는 약사 윈스턴, 그리고 비정상이라 생각되는 이러한 동네사람들의 상담을 맡고 있는 정신과 의사 밸을 등장인물로 하는 작품의 구성이 꼭 결국엔 하나로 이어지는 여러 개의 옴니버스 단편을 모아 만든 '러브 액츄얼리' 같았다고 한다면 내가 너무 낭만적인 것인가. 하여튼 이들 중 세 커플이 탄생하게 되는 로맨틱코미디의 플롯이나 일말의 잔혹성과 에로성을 가미한 눈요깃 거리를 생각한다면 저들의 정신없는 캐릭터들은 얼마든지 익숙하고도 남음이다.

여기서 정신이상이라고 표방되는 비정상적 징후나 증상들은 환각이나 망상, 와해된 언어, 조리에 맞지 않는 사고, 긴장형 행동, 정서적 둔마, 의욕감퇴등으로 나타나지만 사람들의 의식저변에 공통분모로 깔린 것은 '냉소주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정신과 주치의로 등장하는 밸은 정상인이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만 빼고는 모든 것을 다가진' 겉으로는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지독한 냉소주의자였다. 밸을 제외한 모든 환자들 역시 개인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세상과 타인에 냉소적 시선을 키워온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만연된 냉소가 호소하고 자극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사람이 아닌 지구상에서 가장 냉소적인 동물이었다. 코브 마을 근처 원자력발전소의 냉각 파이프에서 방사능 물질이 누출된 것은 바다동물에게 얼마나 큰 호기심이었을까. 바다괴물 스티브가 사람을 온혈동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는 아마도 파충류과의 냉혈동물(변온동물-밖의 체온에 따라서 몸의 체온이 변하는 동물)인 것으로 보여진다. 냉혈 동물인 파충류는 냉철하면서도 민첩하고 온혈 동물인 포유류는 따뜻하면서도 포용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냉소적 신호를 넘길 수 없었던 건 혹시 경쟁상대로서의 생존본능은 아니었을까. 너희 인간들은 냉소적이어선 안 된다는 경고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바다괴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대인의 냉소주의가 눈에 보이는 총체적 결과물로 무시무시한 생명력을 갖고 사람들 앞에 나타난 괴물 덩어리는 아니었을까.

미쳐야 행복한

오랜 기간 잠들어 있던 선사시대의 거대 괴물이 마을에서 찾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다괴물이 마을에 출현한 이후 마을에는 괴상하고 우습기도 하면서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실종되고(신문배달 소년을 꿀꺽한 건 심했지만) 환자들은 그 와중에 불어 닥친 이상야릇한 색정의 파도에 당황한다. 그런데 등장인물들 중 가장 제대로 미쳤다고 확실시 되는 전직 여배우 몰리는 이 바다괴물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며 변신지령을 내려주고 심정을 헤아려 준다. 그녀는 낡고 더러운 이동식주택 트레일러에서 자신이 주연한 <외지의 섹시한 여전사들>의 캔드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밤중에 칼부림으로 기술을 연마하는 애처로운 영혼이었다. 그러나 몰리가 판정 받은 정신분열증의 한 증상인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하위 문화적 기준에 맞지 않는 괴상한 믿음 혹은 마술적 사고'는 냉혈동물이던 바다괴물에 뜨거운 피를 가진 구원의 손길이 되며 진짜 마술과도 같은 러브스토리를 탄생케 한 일등공신이 된다. 몰리와 바다괴물 스티브가 나누는 사랑은 상당히 육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영혼적이다. 몰리가 스티브와 그리고 자기안의 또 다른 화자와 나누는 정신병적 대화는 철학적이기 까지 하다.

미칠 것이 없는 사람이 미쳐 버리는 건 아닐까. 무엇이든 자신이 처한 현실에 제대로 미치지 않고서는 사랑도 섹스도 행복도 없다는 뜻으로 느껴져 그중에 제일 미쳤다는 몰리의 상식을 뛰어 넘는 행동들은 오히려 초현실적이어서 너무나 현실적으로 피부에, 폐부에 다가왔다. 이 작품에서 그나마 정상적이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직업에 열정이 없었던 정신과 의사 밸은 자신의 환자 베스의 자살에 죄책감을 느껴 마을 전체에 항우울제 대신 가짜 약을 처방하는 것으로 속죄하려한다. 법과 질서에 청산유수인 보안관 버튼은 마을사람과 경찰들을 끌어 모아 비밀리에 마약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오로지 순수한 학문에의 열정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던 게이브 박사 정도만이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인물로 그려진 것을 보면 확실히 인생은 현실에 제대로 미치는 사람만이 같은 현실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미친행복'론이 틀린 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이제 이 작품의 제목인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의 모두에 주목하고 싶다. 원제는 결말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바다괴물의 이름만『The Lust Lizard Of Melancholy Cove』(우울한 코브마을의 섹시한 도마뱀) 외롭게 등장한다. 바다괴물이 돌아간 후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사랑을 하고 건강을 되찾으며 그들의 가게는 번창한다. 인간세계에서 꿈과 자의식을 경험한 것으로 보이는, 안개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스티브에게도 변화가 찾아온다. 냉혈동물이었던 바다괴물도 인간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온기 덕분인지 스스로 열을 창조 할 수 있게 되어 마침내 사랑을 잃은 슬픔을 딛고 암컷의 메시지를 신호로 감지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이제 그도 더 이상 냉소를 찾아 외로움을 유지 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암시하는 것이렸다. 모두에게 썩 괜찮은 결말이 맞았다.

올 여름은 무엇에 미쳤던가. 미치지 않은 사람에게만 여름이 감지 된 것은 아니었던가. 무지하게 덥기만 하였다면 우린 아마도 무엇엔들 미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나 역시 미치지 않고서는 이 여름을 날 수 없었기에 아직은 더 미쳐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서 더 미치고 싶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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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8-22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로 기준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요~
'우울한' 또는 '덜 우울한'을 나누는 기준,
'미쳤다'또는 '더 미쳐도 좋다'를 나누는 기준 에 대해서요.
기준이란 건 다수의 우리가 만들어 낸거 잖아요.

'다수의 우리'가 바뀌면 '기준'도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이 책도 책보다는 리뷰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걸요~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대체로 죽은 사람은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죽은 사람은 용서하고 싶다. 아니, 용서 받을 수 있다.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제외한다면 한 인간의 죽음은 사후 프리미엄에 자유롭지 못하다. 하물며 종교적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는 것은 최후의 순간이 비록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이 숭고하다고 느껴진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순교자'라는 종교적 죽음보다 사실 '민주열사'나 '전사자'를 익숙하게 배출해왔다는 점에서 한 인간의 죽음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는지 그리고 죽음에 대한 평가도 정치적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 어떠한 변동이 있어 왔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였는지 전쟁과 가난이라는 시대적 순명을 헤쳐 나온 우리들에게 '순교자'라는 아젠다는 그다지 매력적인 물음표로 선뜻 다가오지 않았었다.

올해 유난히도 한국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해 득세하고 있는 전쟁관련 영화나 문화 컨텐츠들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작품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매번 일방적인 '반공세대'였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획일적, 주입식의 교육이야 알고들 있는 폐해지만 구체적인 사건과 내용 속으로 들어가 보면 고정된 시각과 강요된 애국에 얼마나 머물러 있는지 특히 혼자만의 성찰을 요구하는 문학작품을 대할 때면 그만 얼굴이 달아 오른다. 더불어 문학에 있어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관련한 소재들은 결국 세상과 인간에 대한 보편적 진실을 질문하고 끝내 환기시킬 것이기에 이 또한 독서의 즐거움에 적잖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독자인 나로서는 선호하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전쟁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배경으로 종교라는 부담스런 주제를 얹어 놓은 이 작품이 내 호기심을 이끌었을 리는 만무했다.

재미교포 작가 김은국의 『순교자』는 먼저 접한 지인들의 이른바 '강추'로 엉겁결에 떠밀려 받아든 작품이었다. 대부분 '기대이상'이라는 평과 '완성도'면에서 후한 점수를 주었고 한국적인(?) 시각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사실 이러한 호평은 그냥 시간이 나서 맘 편하게 집어 들기에는 또 미안감이 없지 않기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우선순위에 밀려 여름의 끝자락에 겨우 턱걸이 하는 심정으로 작품과 대적했다. 그리곤 반신반의 하며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선택한 만큼 그 결과는 참 뿌듯했다. 한국계 최초의 노벨문학상 후보가 아니라 실제로 수상을 하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학계와 문단의 전문가들이 세계문학의 위대한 성과들을 소개하는「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테두리 안에 위치하게 된 배경에도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평양의 종소리

소설의 시작은 전쟁의 시작과 함께였다. 지금으로 보아도 지식인층에 속하는 대학강사였던 나(이대위)는 육군본부 정치정보국 대위라는 고위직에 편제 되면서 유엔군이 북한 수도 평양을 점령함에 따라 평양으로 파견대 본부를 옮기게 된다. 그 후 소설의 배경은 폐허로 회색도시가 된 평양이 주 무대가 된다. 주인공이 바라보고 오가는 길엔 언제나 쓰러져 가는 교회의 십자가, 시체처럼 솟아있는 종루와 함께 휑뎅그레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 위로 흩날리는 눈가루는 더할 수 없는 쓸쓸함과 허무를 자아낸다. 시종일관 화자의 눈에 비친 이 풍경은 이국적이고도 비밀스러운 작품의 배경으로 각인되며 진실을 찾아가는 내면의 동선을 유도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내게 있어 평양은 어찌되었건 38.5도를 기점으로 북측에 위치하는 북한의 도시였기에 북쪽의 도시, 북한의 사람들, 북한의 종교인들은 모두 한결 같이 공산주의자일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오류를 수정할 길 없었던 고착된 도시이다. (우리로선)작품의 배경이 (서울, 혹은 남한이 아니고)평양이었다는 사실, 주인공은 전쟁이 실행되는 참혹한 현장 속에서가 아닌 좀 더 바깥에서 그 현장을 내려보는 듯한 관점으로 사건을 묘사하는 방식, 사건의 발단과 경과, 결과가 주로 누군가로부터 전해 듣고 보고받음으로써 서사가 구성되는 방식 등은 이 작품을 상당히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끝까지 동요하지 않는 주인공의 중립적 시선 역시 독자로 하여금 냉정한 판단을 잃지 않게 하는 주도면밀하고 촘촘한 작품이었다. 이 부분은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과 종교라는 보편적 소재를 다루면서 될 수 있으면 많은 부분 작가의 개입 없이 독자들로 하여금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려한 작가의 의도로 읽혀졌으며, 그 결과 한국전쟁이라는 구체적이고도 특수한 사건을 전 인류의 보편적 진리와 결부시켜 오랫동안 주목받는 세계문학의 반열에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그 완성도와 성과가 확실해 보이는 작품이었다. 

진실게임, 그후

생각해보니 이 작품은 누구나 가져보았고 가질만한 질문이 결국 대답으로 자리하는 어찌 보면 불친절한 매력을 지닌 작품인 듯하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작품의 시작과 동시에 모여들던 한 지점에서 종착역에 이르면 어느덧 위치이동이 불가피 했음을 깨닫게 되는 조금은 언짢은 소설이기도 하다.

전쟁 직전 평양에서 공산군 비밀경찰에 체포된 열네 명의 목사 중 열두 명은 총살당했고, 두 명의 목사는 살아남았다. 중요한 건 모두 죽지는 않았다는 데 있다. 즉, 총살당한 비극보다는 살아남은 의혹에 포커스가 맞춰 지면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찾고자 하는 진실을 좇아 가게 된다. 이 대위와 같은 소속의 선임격인 장 대령은 이 사건을 국가와 조직을 앞세운 대의명분과 여론형성에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지금으로 본다면 자신이 처한 임기 중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공무원이 일단 발생한 사건이기에 어떻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론이 매듭지어 지길 바라는 심정일 것이다. 장 대령은 자신이 바라는 결과대로의 진실을 얻으려 하고 진상파악의 임무를 위해 일선상에 이 대위를 배치한다. 희생당한 열 두명의 목사 중 한명인 박 목사의 아들이면서 이 대위와 친구인 박 군은 보다 개인적인 진실을 찾고자 신목사와 대질한다. 아들을 무신론자라 업신여기고 아들에게 광신도로 인식된 박 목사가 최후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신에 대한 허무로 인간의 나약함을 느꼈는지 박군은 아버지의 인간적인 최후를 그 진실로 기대하게 된다. 한편 신목사와 친구이면서 공산당 제보자라는 죄책감을 안고 있던 고 군목은 신 목사에게 총살당한 열 두명의 목사가 순교자가 아니라는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면서 기독교인들의 거짓자존을 폭로하라고 한다.

여기서 사건의 내막과 진상,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모두 파악하고 있는 이 대위는 열두 명의 목사가 순교자인지의 여부, 박 목사의 최후의 모습, 신목사의 증언의 향방 보다 더 선행하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당신의 신은 사람들의 고난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의 여부-을 던짐으로써 신목사의 인간적인 고뇌와 가장 내면적으로 대치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이미 발생한 하나의 사실에 알고자 하는 진실은 여러 개가 중첩되면서 작품 초반은 신목사가 왜 살아 남았는지가 아니라 왜 진실을 말해야 하는지(혹은 왜 말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 진실게임이 펼쳐진다.

우리는 여기서 각자 처한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극명했던 한 가지 사실이 여러 개의 층위로 쪼개져 개인에 요구된 진실로 분리될 수 있음을 목격한다. 국군 장 대령에게는 목사들 모두가 빨갱이 손에 죽었다는 비인간적 잔혹행위가 중요했고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 짓는 요인으로서의 진실만이 의미있음을 증명한다. 고 군목에게는 신 목사가 어떤 부끄러운 짓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해명하여 목사로서의 직업적 권위와 인간적 양심을 세우고자 했기에 종교인로서의 자격을 가늠하는 진실이 가장 중요했음을 암시한다. 박 군에게는 목사인 아버지가 자신과 같은 인간적인 고뇌를 가진 동일한 인간인지가 보다 중요했기에 그에게는 부친의 인간성을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로서만 진실이 의미 있었다. 이 대위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마술사의 연기를 바라보며 막연하게 추측이나 하고 있는 무력한 구경꾼 같다는 느낌'이 자신을 지배했기에 신이 있는가, 있다면 그는 인간의 고통을 알고 있는가에 대한 신의 역할과 종교의 실존적 의미를 대답하는 종교인의 양심적 대답만을 진실로 추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된 진실 그 무엇과도 상이한 반응으로서 신 목사는 침묵에서 거짓으로, 거짓에서 거짓고백으로, 그리고 끝내 거짓의 정당화에서 진실화로 자신만의 진실을 보여주며 진실게임을 회피함으로써 진실한 승자가 된다. 우여곡절 끝에 공산주의자들의 박해에 맞선 궁극적인 정신적 승리를 기리기 위한 합동추도예배가 개최된 후 장 대령, 고 군목, 박군의 심경변화와 그 후 전개되는 그들의 행보는 얼마간 신목사의 승리를 예감케 하는 반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평양을 사수 하지 않으려던 국군의 의도를 알고 끝까지 신 목사를 남한으로 피신시키려는 장 대령, 고 군목, 이 대위의 의지 역시 종교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존경과 신뢰를 보내는 것으로 자신들도 모르게 신 목사를 의지하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단서라 할 것이다. 결국 신 목사는 왜 진실을 찾아야 하는가 보다는 왜 희망을 찾아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질문하고 그 질문은 이미 질문함과 동시에 답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 스스로의 희망을 바라보게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종교인에게는 그가 보호해야 할 교회와 교회의 명예가 있고 군인에게는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할 명분이 있다는 장 대령의 명분론보다는 처참하게 실존하는 전쟁에 놓인 피해자들의 가난과 굶주림, 추위와 두려움, 절망을 견뎌내는 방안으로서의 희망을 뺏지 않기 위해 종교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신목사의 보다 현실적인 실리론이 정작 종교인으로부터 발화되었다는 점은 이 작품의 아이러니이자 반전요소일 것이다. 이는 전쟁의 중심에 서있는 군인이나 신앙의 중심에 위치한 종교인 이전에 생명의 보존에 대면한 인간으로서의 최선의 선택이 아닌 대안적 선택으로서의 종교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왜 전쟁소설이나 종교소설로 자리하지 않고 세계문학의 대열에서 박수 받을 수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문제의식이었다.

최선의 답안이 아닌 대안으로서의 선택을 이야기 하고 있기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살아갈 능력 보다는 살아내는 용기가 더 필요함을 일깨워 주었다고나 할까. 이는 옳고 그름을 밝혀내는 능력보다는 희망으로 삶을 포기 하지 말아야 할 용기를 강조한다고 생각되었다. 신 목사에게는 밝히고 나서 절망을 안겨줄 진실 보다는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할 현실이 더 중요했다. 열 두명의 목사가 순교자가 아니라고 증언 함으로써 진실의 수호자가 되기 보다는 그들을 순교자라 위증하면서 진실을 희망으로 끌어안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진실 대신 택한 희망의 옳고 그른 여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자 개개인의 십자가로서 평생 지녀야 할 숙제로 남겨진다. 

희망의 종소리

작품의 후반부에 신 목사가 이대위에게 '평생 신을 찾아 헤메었다'는 고백과 '나는 나의 십자가를 당신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있으니 우리는 죽을 때까지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대답의 진실은 순교자 처형의 진실 그 이상으로 눈물겨웠고 기독교인이 아닌 나도 한 인간으로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종교나 신에 대한 필요성 보다는 모든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야 한다는 고통과 마주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사형선고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내내 냉정함을 잃지 않던 이 대위의 울음이 무겁도록 가슴을 짓누르는 대목이었다.

순교자는 결국 누구 였을까. 외향적으로는 열 두명이 순교자였고, 내면적으로는 신목사가 순교자 였겠지만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순교자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특정한 종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살아갈 희망과 믿음을 저버려야 한다면 生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피 비린내와 참혹한 박해 없이도 전쟁과 종교와 인간에 대해 근원적인 생각을 정리해보는 내실있는 시간이었다. 비록 작가는 고인이 되었지만 이미 36년 전에 종교인으로서 전쟁의 참상을 겪은 증언자로서 작가적 역량을 이토록 유감없이 발휘한 그의 업적이 오랫동안 기억되리라 생각한다.

문득 작품 속 평양 거리가 떠오른다. 이 대위는 소설 시작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음산한 교회종소리에 가슴이 폐허가 되지만 마지막 장면에선 비로소 난민촌에서 들려오는 피난민의 고향의 노래를 들으며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종소리가 진실이었다면 고향의 노래는 희망이 아니었을까. 그 순간 내 마음 깊은 어딘가에서도 희망의 종소리가 깊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평양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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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8-1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헤르타 뮐러를 떠올렸었거든요~
근데,우리나라 작가 거네요~

리뷰가 너무 좋아 호기심 발동,장바구니에 넣습니다.

한사람 2010-08-15 19:4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주로 활동을 미국에서 하신 분이더군요
아마 후회하지 않으실거여요^^

감사합니다..


cyrus 2010-08-2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안녕하세요~^^~
방금 서재에 들어가보니깐 한사람님이 남기신 댓글이 두개나 있더라구요+_+
썰렁한 저의 서재를 찾아오신 것에 감사합니다ㅠㅠ
열린책들 카페에서의 인연이 여기서도 이어질줄이야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사람님 서재 즐겨찾기해놨어요^^ 자주 들릴께요ㅎㅎ
<순교자> 리뷰 잘 읽었습니다^^ㅋ 꼭 적립금에 당첨되셨으면 합니다~

한사람 2010-08-29 17:12   좋아요 0 | URL

닉네임이 어디서 많이 본듯 해서요 ㅋㅋ
썰렁한 열린책 카페에서 제 글에 댓글 달아주셨잖아요^^
전 세계문학쪽은 학창시절에 들쳐보다가...요즘은 거의
신간 위주로만 읽어요..cyrus 님은 고전쪽에 다양한 독서로
사유의 힘을 기르신것 같았어요..반가워요 !!!!!!!

 
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헤르타 뮐러를 처음 만난 것은 미안하게도 다른 책에 딸려온 '헤르타 뮐러에게 다가가기'라는 스페셜 북에서였다. 큰 기대 없이 들쳐보다 우연히 그녀의 데뷔작이자 문제작이었다는 <저지대>의 첫 번째 수록작품인 '조사弔詞'를 읽고 말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의 풍경, 어머니가 머리칼을 잘라 불에 태우던 장면, 그리고 한 소녀의 그로테스크한 꿈의 묘사는 단 몇 장만으로도 나의 머리에 전류를 가슴엔 혈류를 흐르게 할 만큼 강렬하고 매력적인 문장의 콜라주였다. 당시는 천안함의 진상조사가 한창 진행되어 결과발표를 앞두고 있던 시끄러운 정국이었는데, '조사弔詞'의 짧은 글을 읽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던 순간의 기억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탓일까. 그즈음 우연히도 그녀의, '북한은 역사와 문명에서 하차했다. 강제수용소 같은 북한에 비하면 루마니아는 역사의 작은 오점에 불과하다'는 강도 높은 비판이 비중있게 기사화 되면서 나는 그 어떤 정치인의 목소리보다 그녀의 한마디가 짜릿하게 오버랩 되었고 그것은 곧 나의 눈과 귀를 자연스레 그녀의 작품으로 이끌었다.

사람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강렬한 첫인상을 느끼고 큐피트 화살을 맞아 마법의 사랑에 빠지는 단계를 밟고 말았다. 나는 이미 감동을 깊게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은 그러한 내 믿음을 더 확고히 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곧 노벨 문학상 수상 후 많은 인터뷰 기사와 국내외 평판 및 추천의 글, 같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던 한국 교수의 축하글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때로는 너무 많은 정보와 평론을 미리 접하고 영화나 책을 읽는 것이 순수한 감상의 즐거움을 방해 할 때도 있고, 온전한 내 가치관이 아닌 미리 홍보된 시각으로 작품을 느끼고, 말하고, 평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마치 예습을 철저히 준비하고 본 수업에 임하는 학생처럼 예고편을 꼼꼼히 챙겨가며 그녀와 작품을 만나러 갈 만반의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녀의 많은 기사와 짧게 소개된 단편으로 이미 <숨그네>는 기존에 쉽게 볼 수 있는 서사의 형식과 언어감각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기에 만남은 순조로왔다. 레오가 축음기 상자 트렁크에 짐을 싸고서 가축 운반용 열차를 타고 떠나는 첫 장면은 눈부신 설원을 배경으로 하는 흑백의 고전영화처럼 차라리 낭만적이기 까지 했다.

'나'를 이탈시켜 '나'를 찾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인간관계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 혹은 주인공의 비참한 생활과 그로인한 인간적 고뇌를 전달하는 에피소드보다는 주로 변하지 않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호흡과 같이한 주변 사물-예를 들면 명아주, 시멘트, 신발과 의복, 빵, 벽돌, 냉각탑, 손수건, 삽, 뻐꾸기 시계, 모래, 슬래그, 스카프, 감자, 무연탄-들을 인간의 격格과 동일한 위치에 놓고 시점과 주체를 능숙하게 바꾸어가며 간접적으로 고통을 연상케 한다거나 어떻게든 결국에는 배고픔과 연계시키고 마는 세련된 언어작업들은 이미 사랑 할 준비가 되어있던 나로 하여금 점점 더 치명적인 그녀만의 매력의 늪으로 빠지게 만들었고 그 신선한 자극은 작품 초반부까지는 열렬히 지속되었다.

특히,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서 외부로 시선을 돌려 원래 있었던 자연이나 환경 속에 인물을 투여하고 그 속의 일원으로서 생의 의지를 재생시키는 방법은 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도 궁극에는 가장 역학적인 힘으로 주제를 전달하는 뼈아픈 미장센이었다.

"점호시간에는 부동자세로 서서 나를 잊는 연습을 했다....그리고 하늘을 보며 내 뼈를 걸어둘 만한 구름자락을 찾았다. 나를 잊고 하늘의 옷걸이를 찾으면 그것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p31

이는 '나'를 존재하는 공간에서의 실존적인 자아로 보지 않고 실존을 넘어서는 '개념(예를들면 민콥스키 철사같은)속 존재'로 인식한다거나 이미 백 년 전의 죽은 사람 혹은 어린아이로 까지 인식의 범위를 확장해 철저히 고통스런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이탈하는 것과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차적으로는 '나'에게서 나'를 이탈시켜 '나'를 죽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죽음이 아닌 재생이나 부활의 단계로의 끊임없는 진입과 그 시도라 이해하고 싶다.

'나'를 자르고 붙여서 '나'를 만들다

오로지 자신만을 뺀 그 나머지 수용소 내에 존재했던 모든 사물에 생명성을 부여하고 집요하게 그 속성을 시적으로 묘사하는 그녀만의 법칙은 분명 미학적 쾌감을 점진적으로 높여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러한 쾌감이 나아가서는 '감각의 전환'을 이용한 공감각적인 묘사로 보다 밀도 높게 안착될 지점에 연속적으로 도달하게 되면서 비로소 완성된 감각의 절정을 느끼곤 했다.

"다같이 눈을 뜬 채 누워 노란 조명등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마치 눈이 녹는 것 같았다. 눈 녹는 풍경 속에서 밤의 악취, 숲의 흙냄새와 썩은 나뭇잎 냄새가 우리를 뒤덮었다." p58

"그 집을 지나오면서 나는 눈을 감고 모카잔이라고 중얼거리며 머릿속으로 알파벳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열 개였다. 그러고 나서 열 걸음을 떼었다." p65

"하얀 토끼에서 노란 토끼가 튀어나오듯 불꽃이 튄다.그다음에는 노란 토끼에서 하얀 토끼가 튀어 나온다. 토끼들은 서로 갈기갈기 물어 뜯으며 두 화음으로 휘파람을 분다." p235

매일 만나고 보고 있어도 더 보고 싶은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단계를 그대로 밟아가듯 두단어 이상의 조합에 따른 '심장삽, 하조베, 감자인간, 대리형제, 양철키스'같이 다의적인 의미의 영혼의 단어들을 만나면서 크리스마스는 방에 초록색 전나무를 세우는 단어라는 그녀만의 단어사전에 익숙하게 길들여졌고 작품 중후반부로 가면서는 예상될만한 곳에서 이미 우리끼리 알고 있는 운율을 주고받으며 그녀의 '자유를위한날개'가 마침내 솟아오르는 것을 감격스럽게 확인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흑백의 무성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다가도 가끔씩 빛바랜 색조가 어디선가 스며들어 슬그머니 자리를 잡을 때가 있었다. 마치 흑백의 '쉰들러 리스트'에서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가 등장하던 그 장면처럼. 바로, 그녀의 글쓰기 비밀이라고 알려진 '낱말상자'의 위력은 내가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도 그것들이 튀어나와 때로는 데칼코마니 같은 극렬한 대칭의 미를, 때로는 한 폭의 수채화도 같은 서정적 예술미를 천연덕스럽게(원래부터 늘 그래왔던 사람처럼)형상화 하며 아무 말 할 수 없는 놀라움을 선사해 주었다. 그녀의 이 낱말상자 작업은 '글이란 아무리 세상없이 잘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몇 줄이라도 그 물적 바탕은 훈민정음 24글자를 이리저리 꿰어 맞추고 붙였다 떼었다 하는 것'이라던 김훈의 밥벌이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지겨움에 열렬히 동조하던 내 응원을 무색케 했다.

차라리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내가 독일인이었다면', 나의 모국어가 독일어이고 그녀와 함께 친구였던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와 같이 만들어낸 시적조어들을 내 머릿속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도 내 가슴에 단박에 새겨질 수 있었다면 하는 간절한 생각도 들었다. 우리말로 번역되어진 단어들에서도 두 사람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와 신음소리가 전해져 왔는데 만약 모국어로 작품을 만나는 상황이 되었다면 그들의 숨소리조차 내가 내뱉는 듯 하지 않았을까.

이대로 끝인가...

신기했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림을 지나쳐 와도 읽는 내내 낭만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에 대한 특별방송이 나오면 울리던 베토벤의 음악 때문이었을까. 주인공이 극도로 허기질수록 거꾸로 나는 더욱 언어적 쾌감에 배를 채우며 그녀만의 매력에 몰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물 흐르듯 아무런 반항 없이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만끽하며 책을 덮었을 즈음 오래지 않아 결국 이성과 감성의 불일치에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그녀만의 시선과 프레임, 즉 투명하지만 검은색의 한 겹이 실크 스크린과도 같이 덧대어지며 그녀와 나 사이에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했고 그 거리감은 어김없는 자책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기억은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애써 찾은 '낯설은행복'보다 왜 끝내 상처의 그리움으로 돌아가는가. 후반부 주인공이 귀향한 후 마을 속 자유에서 현기증을 느꼈듯이 나는 정신적으로 배고픈 천사가 되어있었다.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가족의 품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수용소에서 생사를 같이한 사람들을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본능적으로 외면하고 싶었던 주인공만큼이나 마주하기 싫었던 '우리의현실'.

감당할 수 있었다. 그녀가 복원해 낸 수용소의 모습은 별 어려움 없이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더 잔인한 만행이나 고문, 비인간적인 간수나 앞잡이들과의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 사건의 축을 이루는 배신과 갈등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지난시절 독립투사의 피로 새긴 혈서와 전쟁터에서의 비극과 독재정권하에서의 억압과, 그리고 수많은 외침과 투쟁의 시나리오에 우리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거나 혹은 그럴 수도 있을 법한 거의 모든 종류의 현실을 많이도 저장해왔다. 그러한 우리들의 데이터에 비하면 <숨그네>의 라이브러리는 오히려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줄지도 모르겠다. 가장 극적으로 보였던 사건도 우연한 '빵 도난사건'과 그로인한 동료들의 처절한 단죄, 10루브를 발견한 날 주인공이 먹어댄 음식을 죄다 토해버린 일, 감자를 273개나 싸가지고 수용소로 돌아오던 장면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내심 우리의 고단했던 과거와 한번 비교나 해보자는 마음이나 러시아수용소의 처절한 장면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이라도 가졌다면 그 실망감은 거의 배신감의 수준으로까지 확대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없었던 건 그녀가 비난한 북한이라는 나라와 같은 모국어를 쓰는 나라에 살고 있는 내가 이토록 나라의 독립이니 민주화 투쟁이니 하는 국가적 범위의 컨텐츠가 아닌 '배고픔'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을 극대화한 문장력에 신선한 감동을 받고 나서 그렇다면 이것이 끝인가, 이대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하는 끝내 허탈해져야 할 의심의 한구석이었다. 반사적으로 목을 곧추 세우고 정면을 바라보도록 교육받은 뇌구조가 결코 그녀의 조국보다 나을 것 없어 보이는 우리의 창의성 교육에 대한 열등감보다 더 두렵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또 그러한 사회에서 개인의 인권은 어떻고 평화와 복지는 어느 수준이고 하며 떠들고 살아왔구나 하는 내 자신에 대한 관조는 결국 그동안 쉽게 참을 수 없는 '단어'들을 향한 '무덤덤함' 이었다는 결론에 이르자 씁쓸해 지기까지 했다.

차라리 주인공 레오가 수용소가 아닌 우연적인 사건으로 인생 밑바닥의 거지신세가 되어 '뼈와가죽의시간'에 '배고픈천사'와 짝짓기를 하였다면 나는 오로지 문학적으로만 그 낱말의 향연에 동참하며 축제를 즐기는 입장이 되었을지 모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들의 '세계문학'이 아닌 동시대를 살고 있고 비슷한 아픔을 겪어낸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작품에 감동 받는 것이 현실의 고통과 거리를 둔 역사적인 면죄부에 동참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모든 것을 뛰어넘어 문학적 측면에서만 오로지 정서적인 우월감을 느끼고자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처음에 그녀를 향한 맹목적인 빠져듦의 시간을 지나와 자꾸만 그녀와 나와의 혹은 작품과 우리와의 관계 및 앞으로의 방향 같은 많은 연인들이 도달하게 되는 문제의식에 어쩔 수 없이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그녀의 가족사가 마치 한 가족 내에서도 형은 공산당 동생은 국군이 된 우리네 상처를 연상 하지 않는다고, 음산하고 억압적이던 가족 내 일상에서 마치 전쟁직후 50년대 우리나라 어느 마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던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동족상잔의 비극이나 독재 시절의 암울했던 과거사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아무도 나에게 비난하지 않을 것이지만 불행히도 나는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최근의 지방선거 때 민주당을 찍어주면 혹시나 좌파로 보일까봐 여론조사에서 거짓말을 하는 형국과 무엇이 다른가. 여권신장이라는 단어를 부부싸움에 사용하면 페미니스트로 몰릴까봐 입에 올리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던 그녀와 주인공처럼 어떤 경계선에 위치한 내 자신을 발견하고는 내 문제의식은 탈출구를 찾아 잠시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찾아 헤매다

또 다른 어떤 독자도 '응축된 시정과 산문의 진솔함으로 소외계층의 풍경을 묘사했다'는 노벨상 선정 이유처럼 비극에 옷을 입힌 그녀의 시적인 언어미와 아름다운 문장들에 놀라 극적인 감동을 받았다 할 것이며 박수를 건넬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문학의 힘에 압도만 당하는 비교적 운 좋은 독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나는 왜 순수한 감동마저 전달된 그대로 편하게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되었을까. '불편한 것은 넘치는 것이요, 편한 것은 결핍된 것' 이라면 넘치도록 강요받아온 애국과 민족에의 이데올로기가 오로지 시적인 감수성이나 옥구슬 같은 태초의 순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그녀의 감수성에 영향을 준 것들은 무엇이었을까.나는 잃어버린 내 감수성을 찾듯 그녀의 처녀성을 찾아 나섰고 결국 불행했던 유년의 기억과 죽음의 분위기로 음산했던 마을의 풍경을 담아내었다는 <저지대>를 조금은 절박한 마음으로 만나 보기로 했다.

마음의 굳은살이 세상과 스치며 온 만큼 단단하거나, 아직 가 닿지 못한 만큼만 말랑말랑하다면 좋겠다. 단순한 문학작품과의 교감에서도 이토록 서툰 나는 그저 독서에서조차 소심한 수용의 자세에 목이 멘다. 독일어를 한글자도 못 읽는 것은 창피하지 않으나, 문학어에 진정으로 울고 웃지 못하는 내가 창피하다. 영화 한편도 가치관과 취향에 따라 충분히 평은 엇갈릴 수 있지만 나는 그녀를 더 이해하고 내 의지로만 거리낌 없이 감동받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만 글을 썼던 그것처럼. 하나의 작품으로는 모자라다는 느낌도 들었고 어쩐지 작품 하나 읽어 놓고 수준 높은 언어의 예술성이라며 타성에 젖은 감탄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겸연쩍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불편한 마음 한구석을 무엇으로든 채워야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라난 마을로 돌아가 그녀의 어린 시절과 청춘을 만나고 왔다. <숨그네>보다 더 시적이고 더 풋풋했다고 느꼈다면 내가 이기적인 독자인걸까. 특히 그녀의 가족과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은 <숨그네>보다 더 몽환적이고 소용돌이 치는 원색적 묘사들로 가득했다.

인간이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치부를 숨기지 않고 어떻게 내재화하여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희망화 하는지 아주 세밀하게 알려주는 그녀의 자화상이었다. 간혹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구절이나 그녀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모호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미술관에서도 화가의 그림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하듯이 그럴 땐 눈을 감고 그저 그녀의 목소리를 느끼고만 싶었다. 한편의 시처럼, 음악이나 조각품 처럼. 이 작품을 먼저 읽었더라면 어땠을까도 생각했지만 나중에 읽어 전작을 소급해가며 끄덕이는 재미도 나쁘지 않았다. 비교적 분량이 긴 '저지대'를 뺀 나머지 단편들은 하나같이 호흡이 짧고 강렬하여 한편의 시와도 같았고, 그녀는 부인할 수 없는 시인이었다.

여기저기 헤매며 찾아본 그녀의 시집 <모카커피 잔을 든 창백한 신사들(Die blassen Herren mit den Mokkatassen), 2005>에 수록된 싯구절 '깃털집 안에 수탉 한 마리가 산다 / 토끼 한 마리는 모피집 안에 산다 / 물집 안에는 호수 하나가 살고 / 모퉁이 집에는 정찰대가 / 그곳 발코니에서 한 사람을 밀쳐버리고 / 라일락 나무를 넘어 / 그리고는 다시 자살이었다.'를 보면 <숨그네>의 한 장면이 쉽게 연상된다. <숨그네>가 소개되기 전에 유일하게 그녀의 짧은 글을 접할 수 있었던 <책그림책, 2001>에서도 그녀의 초현실적인 감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책장너머의 다른 세상을 응시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 속 사다리를 <저지대>에서 익숙했던 가족들과 함께한 식탁에서의 일상 속으로 가져와 결국 아버지가 천정너머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도구로 사용하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같은 책에 글을 실은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구름>이라는 글도 있었는데, 그림을 보고 쓴 글 한편을 읽고 그를 말하기는 어렵지만(국내에 소개된 다른 작품이 없었던 관계로)현상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나 작은 사물이라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시선과 객관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다른 작가들은 같은 작가의 그림을 해석할 때 유머나 작가로서의 깊은 사유, 혹은 에피소드를 적용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한곳에 치우치지 않는 공평함이나 정직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녀에게 오로지 진실만을 전해 주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싶은 무의식의 잣대일수도 있었음을 부인치 않겠다. 그의 시를 만날 수 있었다면 더욱 흡족했을지 모르나 나는 이쯤에서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들과 의구심에 혼자 퍼즐을 맞추어 가듯 나만의 스케치북이 완성되어가는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작품을 지나오면서 마음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정확하게 표현하긴 어려우나 나는 비로소 불편하던 마음이 얼마간 평화로와짐을 느꼈다. 한사람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 노력했고 그 결과로 만족감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스스로에 대한 부채감도 눈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마치 부모님, 사회가 가르쳐준 가치들로 내 사랑을 놓칠 수도 있었겠지만 상대를 알아가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다시 사랑을 되찾은 감격이라고 할까. 수용소라는 정치적 공간이 아닌 일상과 자연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문장과 단어들은 <숨그네>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가이드 역할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소설(또는 시)작업은 곧 그녀가 살아왔고, 살아가는, 살아가야 할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녀도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고 나의 부끄러움을 알까.

다시 상자를 열 그날까지

<숨그네>와 <저지대>에선 마치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으로 살아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찬가지로 살아남는 것이 글을 쓰는 일이고 낱말을 오리고 잘라 붙이는 것이 자유를 찾는 일이었던 그녀에게는 죽도록 글을 쓰고 끈질기게 낱말을 찾는 것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나에겐 이렇게 문학작품을 읽으며 어떠한 책임이나 의무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감동 받고 또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내 자신을 용서 하는 길이 아닐까.

그녀가 살아온 '상자같은마을'은 씻을 수 없는 가해자로서의 아버지의 관이기도 했고, 그녀가 서독으로 이주하기 위해 몸을 실었던 트럭이기도 했고, 레오의 축음기 트렁크 박스이기도 했고, 레오가 5년 동안 살아낸 검은색 수용소 이기도 했으며 끝내는 삶과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그녀가 이 모든 것을 담아낸 그녀의 낱말상자이기도 했다.

"상자안의 하늘은 검은색 에나멜로 칠해져있고, 끝이 뾰족한 별들로 장식되어있다. 쓰러질 때 충격이 덜하도록 바닥에는 무릎높이까지 솜이 깔려있다...나는 포개진 관이 든 상자에서 절대 나오고 싶지 않았다." 82P

그녀가 주로 검은색 옷을 입고 검은색 구두끈을 매는 것은 아버지 사후 남은 평생 검은색 옷만 입겠다던 어머니를 부정하지 않음이고, 독재와 맞서왔던 그녀만의 꿋꿋함을 기리는 제복 이자, 모든 자연과 동물과 식물이 검정색이었던 마을에 대한 향수이자,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에 대한 영원한 애도이자, 그녀 스스로 부활하기 위해 그녀가 버리고 죽인 것들에 대한 용서의 상징일 것이다.

오년 전인가 '워싱턴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방문했을 때 그 어떤 공간보다 목이 막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던 공간은 유품이나 유물, 모형 등의 증거로 실상을 알려주는 공간이 아닌, 아치형 천장에 양옆부터 오로지 가족의 빛바랜 사진들로만 높은 천고를 메우며 아무것도 전시 하지 않은 명상의 공간이었다. 마치 치밀한 각본처럼 미리 짜여진 듯한 그녀의 부모님과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운명을 그녀의 검은 앨범 속에서 뒤늦은 발걸음으로 애도하고자 한다.

다시 그녀가 그 아득한 낱말상자를 열어 '내 숨결을 그네 뛰게 할 마법의 작업'을 시작할 것으로 믿는다. 비로소 심장이 뛰면서 '한방울넘치는행복'에 미소 짓는 그날까지 나는 벅차게 기다릴 것이다. 그녀를 처음 만나던 그때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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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5 17: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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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가제 독고다이 김별아 근대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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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나 이 작품 참, 붉고, 뜨겁고, 비리다.

킬킬거리며 재미나게 읽어서는 안 될 이야기지만 두어 번은 빵시레 터진 웃음으로도 모자라 배를 잡고 뒹굴었다. 웃겨서도 웃고, 웃기지도 않아서 웃고, 웃을 수 밖에 없어서 웃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고 작가고 주인공이고는 온데 간데 없고 가슴이 도둑맞은 것처럼 헛헛해 졌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떠나 보내는 심정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애저녁에 흘러간 시간, 가버린 사람들 일텐데 미안함과 서글픔이 이렇게 뒤늦어도 되는 건지. 나도 그런대로 역사나 민족, 전쟁에 관한 이야기엔 그다지 호락호락한 독자는 아니건만 평소에 나름 쉬크한 시선은 어디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 한구석이 시크무레 짜르르 자려왔다. 김별아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영국시인 새뮤엘 존슨은 '작가의 가장 매력적인 힘 두 가지는 새로운 것을 친숙하게 만드는 것(new things familiar)이고, 친숙한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familiar things new)'이라 했던가. 내게는 무척이나 새롭고도 친근하게 느껴진 작품이니 위대한 작가의 말을 빌어 그녀에게 예를 표하고 싶다.

사투리나 비어, 속어, 은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문장이 참 찰지고 구수하다. 마치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나 시골마을에 등장하던 약장수의 구렁이 담넘어가듯 하는 기막힌 말빨은 요소요소에 해학이나 풍자, 희극적 장치를 전문적으로 배치하는 그녀의 세련된 글빨로 포장되면서 무엇보다 읽는 재미, 즉 소설의 흡입력에 가속도를 더해준다 할 수 있겠다.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꼭 그 시대의 사람(작가)이 동시대의 사람들(독자)에게 마치 일이 발생한 그 당시에(실시간 중계처럼) 이야기 해주는 것 같은 현장감은 작가의 섬뜩 하리만치 놀라운 이야기꾼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 시켜주었다. 새로웠지만 친근을 선사한 주요원인으로 생각한다.

또 하나,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라는 특수(?)가 문화, 예술 전반에 불어 닥쳐 역사, 전쟁이나 민족관련 컨텐츠를 넘치게 만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점에 나는 이 작품도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터라 그 연장선상에 있는 비교적 친근한 서사를 예견했었지만 그 나물에 그 반찬 쯤으로 생각했었던 독자적 쿠리터분함에 작가는 시원하게 찬물을 끼얹어 주었다. 그 역시도 이미 익숙한 컨텐츠를 신선하게 엮어내는 작가만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가미가제 독고다이』...가만히 제목을 두어번 읖조려 본다. 노랗게 뜬 보름달위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하얀 마후라를 둘러맨 청춘 위에 별처럼 떠있는 운명의 이름. 이 작품은, 아직은 일제 식민지였던 1940년대 태평양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하필 청춘이었던 한 젊은이가 어쩌다보니 일본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자살특공대원이 되기까지의 우연과 필연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어줄 되는 작품의 소재만 보아도 우리네 과거사가 늘 그래왔듯 참으로 기가 막히고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한편의 비극영화 일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작가는 남의 나라, 남의 전쟁에 목숨을 바쳐야 했던 이 기구한 비극적 서사를 가장 남루하고 희극적인 인물을 내세워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무엇보다도 희망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간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면서 자주 웃는다. 우습고 웃기고 웃다가 울다가 그렇지만 웃을 수 밖에 없고 그러기에 더 눈물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결국 배경과 소재는 비극적 상황이었으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피보다 진하고 뜨거웠다. 이 작품은 어쩌면 '피'에 관한 이야기 일 것이다. '피'로 이어져왔고, '피'에 맞선 '피'같은 이야기...역사적으로는 식민지라는 피할 수 없었던 시대의 '피'를, 신분으로서는 천민이라는 혈통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주어진 '피'를 가지고 태어나기도 했고 살아가면서 생사를 가르는 전쟁이나 운명적 사랑과 같은 '피'를 마주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피'를 끝까지 부정하며 도피했고, 누군가는 물보다 진한 '피'를 인정하며 받아 들였고, 또 누군가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피'를 내놓는다.

운명으로 정해진 피와 운명처럼 마주한 피와 운명을 헤쳐가야 할 피는 모두 붉었고, 뜨거웠고 비렸다. 하지만 그렇게 슬플 것만 같았던 그들의 '피'도 우리 가슴에 '별'이 될 수 있다니. 붉은 피가 하얀 별이 되는 '가미가제 독고다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 별이 되어 돋을새김한 이야기니 사설이 길었다. 피같은 별을 이제 어떻게 간직할까나.

이 작품은 사실, 주인공 하윤식이라는 젊은이가 일본의 전쟁에 징집되어 군대에 입대한 후 어떻게 자살특공대의 역할을 맡게 되는지 보다는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의 아버지, 어머니와 형, 그리고 그가 사랑한 여인과 관련해 먹이사슬 같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핵심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에 얽힌 가족史나 자신이 그 속에서 자라온 성장史에 포커스를 두지는 않는다. 물론 이야기 하는 화자는 가미가제독고다이가 되버린 '나' (하윤식)이지만 객관적인 시점에서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굉장히 깊고 예리하다. 즉, 인물 한명 한명에 대한 밀도 높은 묘사, 극적인 구성, 인물 분석에 대한 집중력과 통찰력 때문에 가족 구성원 이라는 연대감보다는 개별적 인물로서의 존재감이 더 부각되어 보였다. 이러한 배경은 하윤식이 천하의 날나리 난봉꾼 꼴통임을 아무리 자처해도 결국엔 모두를 위해 언젠가는 한방을 터뜨려 줄 것을 기대하게 되는 무의식적 기대감을 높이게 되고 마지막에 가서 그가 희생되더라도(희생된 사실을 확인하더라도)각오하겠다는 독자의 의지를 심어주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당연히 비극을 예상하고 울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독자들을 향해 또 한번의 반전을 시도하며 슬픔마저 계산적으로 준비하려했던 소심한 독자들을 향해 그래도 희망은 있는 것이라 돌이 아닌 '별'을 띄운다. 결국 우리는 울 준비를 하고 있던 차에 웃어야 할 상황이지만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배반아닌 배신감을 맞보며 희망을 가지지 않으려 했던 우리 자신에 패배감을 느끼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왜 ! 끝까지 살고자 하지 않았던가. 왜 희망을 찾지 않았던가. 웃기지도 않은 것들에는 그렇게 쉽게 웃어주었으면서 진짜로 웃어야 할 때 웃지 못하는 우리는 비겁하지 않았던가.

주인공이 살아 남아서 기쁘지 않은 최초의 작품이었다.

다시 피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쇠날이라는 이름의 할아버지가 백정이라는 천한 피를 결국 받아 들이게 되는 모티브가 된 것은 올미라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할머니와의 피섞인 입맞춤이었다. 이들은 소의 피를 보고 그 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피는 부정할수록 삶이 두려워질 수밖에 없는 멍에인 것이다. 하지만 올미는 겁간을 당해 피를 쏟으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시작려는 의지를 다짐한다. 올미의 의연함은 피(상처)에 대한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니라 아무리 천한 피로 태어났어도 무력과 권력으로 더러워진 피에만큼은 굴복하지 않겠다는 자의식의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올미의 피를 나눈 쇠날이가 비로소 자신의 백정신분을 받아 들이게 되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장면은 그들이 피를 섞어 낳은 아들이 훕시이고, 다시 훕시의 아들이 하윤식이 되는 것이니 만큼 면면히 흘러 내려온 호락호락하지 않은 민족으로서의 당당한 핏줄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라 할 것이다. 하윤식은 이러한 쇠날이 할아버지를 이해하는 유일한 핏줄로서 훗날 현옥과의 입맞춤(쇠날이와 올미의 그것처럼) 이후 비로소 삶에 대한 공포가 아닌 붉고 뜨겁고 압도적인 생에 대한 희망으로서 그 유전자를 꽃피운다.

훕시는 어떠한가. 그는 만세운동 때 눈앞에서 뿜어 나오는 동족의 피에는 무감했지만 자신이 백정의 핏줄인 것은 평생토록 부정해가며 혈통과 신분을 세탁하는데 피터지는 노력을 쏟는다. 돈은 없지만 양갓집 출신 신여성의 피를 수혈 받아 백정의 피를 희석시키려던 노력은 그 시대와 잘 어울리는 이해 할만한 발상이었다. 하윤식의 어머니인 최씨는 '피는 못 속인다'는 진리 앞에서 자신의 피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던 가장 위선적인 인물이었다. 단지 시기와 열등감을 느끼던 베스트 프렌드와 사귀던 남자 하계운(훕시)의 계산적 구애를 받아 들이며 겉으로는 열정의 피를 쟁취한 것 처럼 보이는 주인공으로 자존심을 회복하려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피(동맥)를 끊음으로써 수혈(결혼)에 대한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된다.

훕시와 최씨의 두 아들, 하경식과 하윤식을 보자. 훕시의 전처 아들인 경식은 자신의 혈통을 알기 전까진 고매하고 우아한 인격의 '주의자'로 허허로운 집안을 탈출하고자 했으나 자신의 피에 대한 비밀을 알고 부터는 오히려 자신을 기만하고 배반 하는 것으로 피를 자학한다. 혁명가로서 경식을 존경하며 위장부부로 행세해온 현옥에게 경식은, 아버지의 의처증과 폭력으로 얼룩진 가정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웃는 대신 새롭게 꾼 꿈이었다. 그녀는 경식의 아이를 임신하는 것으로 다음 세대의 희망의 피를 이어간다. 동생 윤식이 어린 시절부터 늘 자신의 별이었던 형의 여자 현옥을 사랑하게 된 것은 얄궂은 운명의 장난 이었을까. 우연적 필연이었을까. 열일곱살 때부터 인생의 폐허 속에서 자신을 부지기수로 망가뜨려온 윤식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잠복해온 희망의 핏줄은 간절히도 갈망하던 핏빛과 다르지 않았다. 현옥과 형을 위해 죽으려 했지만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두고 미치도록 살고 싶어지는 그의 뜨거운 핏기(血氣)에 가슴이 홧홧해진다.

일본 군대에서 우연히 조우한 자칭 조선민족 대표선수 시메스케(장성우)의 특공대 출격날 화장실에서 그를 위해 불러준 아리랑이 나지막히 들려온다. 시메스케는 엷게 웃고 있지만 왜 그런지 눈물이 난다는 쇠날이의 아들 훕시의 아들 윤식이는 어느 나라 어느 민족, 누구집의 아들이었는가. 고려시대 거란을 막으려던 충신 하공진의 후손인지 임진왜란 때 우연히 백정의 집안에 흘러들어 양자가 된 혈족의 후손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의 피도 우리처럼 누구보다도 붉었고 뜨거웠을 것이라는 것.

우연의 운명을 믿느냐 했다. 우연히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들의 어처구니 없고 생뚱맞고 기막힌 필연을 아느냐 했다. 우연적 필연이든 필연적 우연이든 피로 이어진 인연은 의미없는 피로 끝나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비장함이 생겨난다. 아비 없이 홀로 이 세상에 떨어진 사람도, 태어나 마주해야 할 운명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이 내게로 다가온 우연은 어떠한 필연으로 꽃피려나.

마음이 망망하다. 문득 윤식이 현옥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사한 연꽃 무늬에 쌓여있던 고무신이 향내롭다. 그녀처럼 우리도 포기 없는 삶을 지르밟고 한걸음 한걸음 비록 지옥같은 세상 일지라도 발걸음은 떼어봐야 하는 것일까.  

죽기직전까진, 삶과 죽음의 복불복이 끝나는 그 순간까진 멈추지 말고 걸어는 보아야 하지 않겠나.


작가의 능수능란한 의태어, 의성어 구사 솜씨가 참 신기하고도 매력적이어서 적잖이 흉내 내었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몇 번이나 사전에 검색해 봤다. 그동안 내 국어 실력이 형편없었음을 새삼 알게 되었고 덕분에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된 점 꾸벅 인사는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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