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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헤르타 뮐러를 처음 만난 것은 미안하게도 다른 책에 딸려온 '헤르타 뮐러에게 다가가기'라는 스페셜 북에서였다. 큰 기대 없이 들쳐보다 우연히 그녀의 데뷔작이자 문제작이었다는 <저지대>의 첫 번째 수록작품인 '조사弔詞'를 읽고 말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의 풍경, 어머니가 머리칼을 잘라 불에 태우던 장면, 그리고 한 소녀의 그로테스크한 꿈의 묘사는 단 몇 장만으로도 나의 머리에 전류를 가슴엔 혈류를 흐르게 할 만큼 강렬하고 매력적인 문장의 콜라주였다. 당시는 천안함의 진상조사가 한창 진행되어 결과발표를 앞두고 있던 시끄러운 정국이었는데, '조사弔詞'의 짧은 글을 읽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던 순간의 기억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탓일까. 그즈음 우연히도 그녀의, '북한은 역사와 문명에서 하차했다. 강제수용소 같은 북한에 비하면 루마니아는 역사의 작은 오점에 불과하다'는 강도 높은 비판이 비중있게 기사화 되면서 나는 그 어떤 정치인의 목소리보다 그녀의 한마디가 짜릿하게 오버랩 되었고 그것은 곧 나의 눈과 귀를 자연스레 그녀의 작품으로 이끌었다.
사람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강렬한 첫인상을 느끼고 큐피트 화살을 맞아 마법의 사랑에 빠지는 단계를 밟고 말았다. 나는 이미 감동을 깊게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은 그러한 내 믿음을 더 확고히 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곧 노벨 문학상 수상 후 많은 인터뷰 기사와 국내외 평판 및 추천의 글, 같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던 한국 교수의 축하글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때로는 너무 많은 정보와 평론을 미리 접하고 영화나 책을 읽는 것이 순수한 감상의 즐거움을 방해 할 때도 있고, 온전한 내 가치관이 아닌 미리 홍보된 시각으로 작품을 느끼고, 말하고, 평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마치 예습을 철저히 준비하고 본 수업에 임하는 학생처럼 예고편을 꼼꼼히 챙겨가며 그녀와 작품을 만나러 갈 만반의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녀의 많은 기사와 짧게 소개된 단편으로 이미 <숨그네>는 기존에 쉽게 볼 수 있는 서사의 형식과 언어감각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기에 만남은 순조로왔다. 레오가 축음기 상자 트렁크에 짐을 싸고서 가축 운반용 열차를 타고 떠나는 첫 장면은 눈부신 설원을 배경으로 하는 흑백의 고전영화처럼 차라리 낭만적이기 까지 했다.
'나'를 이탈시켜 '나'를 찾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인간관계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 혹은 주인공의 비참한 생활과 그로인한 인간적 고뇌를 전달하는 에피소드보다는 주로 변하지 않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호흡과 같이한 주변 사물-예를 들면 명아주, 시멘트, 신발과 의복, 빵, 벽돌, 냉각탑, 손수건, 삽, 뻐꾸기 시계, 모래, 슬래그, 스카프, 감자, 무연탄-들을 인간의 격格과 동일한 위치에 놓고 시점과 주체를 능숙하게 바꾸어가며 간접적으로 고통을 연상케 한다거나 어떻게든 결국에는 배고픔과 연계시키고 마는 세련된 언어작업들은 이미 사랑 할 준비가 되어있던 나로 하여금 점점 더 치명적인 그녀만의 매력의 늪으로 빠지게 만들었고 그 신선한 자극은 작품 초반부까지는 열렬히 지속되었다.
특히,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서 외부로 시선을 돌려 원래 있었던 자연이나 환경 속에 인물을 투여하고 그 속의 일원으로서 생의 의지를 재생시키는 방법은 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도 궁극에는 가장 역학적인 힘으로 주제를 전달하는 뼈아픈 미장센이었다.
"점호시간에는 부동자세로 서서 나를 잊는 연습을 했다....그리고 하늘을 보며 내 뼈를 걸어둘 만한 구름자락을 찾았다. 나를 잊고 하늘의 옷걸이를 찾으면 그것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p31
이는 '나'를 존재하는 공간에서의 실존적인 자아로 보지 않고 실존을 넘어서는 '개념(예를들면 민콥스키 철사같은)속 존재'로 인식한다거나 이미 백 년 전의 죽은 사람 혹은 어린아이로 까지 인식의 범위를 확장해 철저히 고통스런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이탈하는 것과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차적으로는 '나'에게서 나'를 이탈시켜 '나'를 죽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죽음이 아닌 재생이나 부활의 단계로의 끊임없는 진입과 그 시도라 이해하고 싶다.
'나'를 자르고 붙여서 '나'를 만들다
오로지 자신만을 뺀 그 나머지 수용소 내에 존재했던 모든 사물에 생명성을 부여하고 집요하게 그 속성을 시적으로 묘사하는 그녀만의 법칙은 분명 미학적 쾌감을 점진적으로 높여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러한 쾌감이 나아가서는 '감각의 전환'을 이용한 공감각적인 묘사로 보다 밀도 높게 안착될 지점에 연속적으로 도달하게 되면서 비로소 완성된 감각의 절정을 느끼곤 했다.
"다같이 눈을 뜬 채 누워 노란 조명등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마치 눈이 녹는 것 같았다. 눈 녹는 풍경 속에서 밤의 악취, 숲의 흙냄새와 썩은 나뭇잎 냄새가 우리를 뒤덮었다." p58
"그 집을 지나오면서 나는 눈을 감고 모카잔이라고 중얼거리며 머릿속으로 알파벳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열 개였다. 그러고 나서 열 걸음을 떼었다." p65
"하얀 토끼에서 노란 토끼가 튀어나오듯 불꽃이 튄다.그다음에는 노란 토끼에서 하얀 토끼가 튀어 나온다. 토끼들은 서로 갈기갈기 물어 뜯으며 두 화음으로 휘파람을 분다." p235
매일 만나고 보고 있어도 더 보고 싶은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단계를 그대로 밟아가듯 두단어 이상의 조합에 따른 '심장삽, 하조베, 감자인간, 대리형제, 양철키스'같이 다의적인 의미의 영혼의 단어들을 만나면서 크리스마스는 방에 초록색 전나무를 세우는 단어라는 그녀만의 단어사전에 익숙하게 길들여졌고 작품 중후반부로 가면서는 예상될만한 곳에서 이미 우리끼리 알고 있는 운율을 주고받으며 그녀의 '자유를위한날개'가 마침내 솟아오르는 것을 감격스럽게 확인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흑백의 무성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다가도 가끔씩 빛바랜 색조가 어디선가 스며들어 슬그머니 자리를 잡을 때가 있었다. 마치 흑백의 '쉰들러 리스트'에서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가 등장하던 그 장면처럼. 바로, 그녀의 글쓰기 비밀이라고 알려진 '낱말상자'의 위력은 내가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도 그것들이 튀어나와 때로는 데칼코마니 같은 극렬한 대칭의 미를, 때로는 한 폭의 수채화도 같은 서정적 예술미를 천연덕스럽게(원래부터 늘 그래왔던 사람처럼)형상화 하며 아무 말 할 수 없는 놀라움을 선사해 주었다. 그녀의 이 낱말상자 작업은 '글이란 아무리 세상없이 잘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몇 줄이라도 그 물적 바탕은 훈민정음 24글자를 이리저리 꿰어 맞추고 붙였다 떼었다 하는 것'이라던 김훈의 밥벌이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지겨움에 열렬히 동조하던 내 응원을 무색케 했다.
차라리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내가 독일인이었다면', 나의 모국어가 독일어이고 그녀와 함께 친구였던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와 같이 만들어낸 시적조어들을 내 머릿속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도 내 가슴에 단박에 새겨질 수 있었다면 하는 간절한 생각도 들었다. 우리말로 번역되어진 단어들에서도 두 사람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와 신음소리가 전해져 왔는데 만약 모국어로 작품을 만나는 상황이 되었다면 그들의 숨소리조차 내가 내뱉는 듯 하지 않았을까.
이대로 끝인가...
신기했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림을 지나쳐 와도 읽는 내내 낭만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에 대한 특별방송이 나오면 울리던 베토벤의 음악 때문이었을까. 주인공이 극도로 허기질수록 거꾸로 나는 더욱 언어적 쾌감에 배를 채우며 그녀만의 매력에 몰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물 흐르듯 아무런 반항 없이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만끽하며 책을 덮었을 즈음 오래지 않아 결국 이성과 감성의 불일치에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그녀만의 시선과 프레임, 즉 투명하지만 검은색의 한 겹이 실크 스크린과도 같이 덧대어지며 그녀와 나 사이에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했고 그 거리감은 어김없는 자책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기억은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애써 찾은 '낯설은행복'보다 왜 끝내 상처의 그리움으로 돌아가는가. 후반부 주인공이 귀향한 후 마을 속 자유에서 현기증을 느꼈듯이 나는 정신적으로 배고픈 천사가 되어있었다.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가족의 품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수용소에서 생사를 같이한 사람들을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본능적으로 외면하고 싶었던 주인공만큼이나 마주하기 싫었던 '우리의현실'.
감당할 수 있었다. 그녀가 복원해 낸 수용소의 모습은 별 어려움 없이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더 잔인한 만행이나 고문, 비인간적인 간수나 앞잡이들과의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 사건의 축을 이루는 배신과 갈등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지난시절 독립투사의 피로 새긴 혈서와 전쟁터에서의 비극과 독재정권하에서의 억압과, 그리고 수많은 외침과 투쟁의 시나리오에 우리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거나 혹은 그럴 수도 있을 법한 거의 모든 종류의 현실을 많이도 저장해왔다. 그러한 우리들의 데이터에 비하면 <숨그네>의 라이브러리는 오히려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줄지도 모르겠다. 가장 극적으로 보였던 사건도 우연한 '빵 도난사건'과 그로인한 동료들의 처절한 단죄, 10루브를 발견한 날 주인공이 먹어댄 음식을 죄다 토해버린 일, 감자를 273개나 싸가지고 수용소로 돌아오던 장면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내심 우리의 고단했던 과거와 한번 비교나 해보자는 마음이나 러시아수용소의 처절한 장면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이라도 가졌다면 그 실망감은 거의 배신감의 수준으로까지 확대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없었던 건 그녀가 비난한 북한이라는 나라와 같은 모국어를 쓰는 나라에 살고 있는 내가 이토록 나라의 독립이니 민주화 투쟁이니 하는 국가적 범위의 컨텐츠가 아닌 '배고픔'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을 극대화한 문장력에 신선한 감동을 받고 나서 그렇다면 이것이 끝인가, 이대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하는 끝내 허탈해져야 할 의심의 한구석이었다. 반사적으로 목을 곧추 세우고 정면을 바라보도록 교육받은 뇌구조가 결코 그녀의 조국보다 나을 것 없어 보이는 우리의 창의성 교육에 대한 열등감보다 더 두렵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또 그러한 사회에서 개인의 인권은 어떻고 평화와 복지는 어느 수준이고 하며 떠들고 살아왔구나 하는 내 자신에 대한 관조는 결국 그동안 쉽게 참을 수 없는 '단어'들을 향한 '무덤덤함' 이었다는 결론에 이르자 씁쓸해 지기까지 했다.
차라리 주인공 레오가 수용소가 아닌 우연적인 사건으로 인생 밑바닥의 거지신세가 되어 '뼈와가죽의시간'에 '배고픈천사'와 짝짓기를 하였다면 나는 오로지 문학적으로만 그 낱말의 향연에 동참하며 축제를 즐기는 입장이 되었을지 모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들의 '세계문학'이 아닌 동시대를 살고 있고 비슷한 아픔을 겪어낸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작품에 감동 받는 것이 현실의 고통과 거리를 둔 역사적인 면죄부에 동참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모든 것을 뛰어넘어 문학적 측면에서만 오로지 정서적인 우월감을 느끼고자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처음에 그녀를 향한 맹목적인 빠져듦의 시간을 지나와 자꾸만 그녀와 나와의 혹은 작품과 우리와의 관계 및 앞으로의 방향 같은 많은 연인들이 도달하게 되는 문제의식에 어쩔 수 없이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그녀의 가족사가 마치 한 가족 내에서도 형은 공산당 동생은 국군이 된 우리네 상처를 연상 하지 않는다고, 음산하고 억압적이던 가족 내 일상에서 마치 전쟁직후 50년대 우리나라 어느 마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던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동족상잔의 비극이나 독재 시절의 암울했던 과거사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아무도 나에게 비난하지 않을 것이지만 불행히도 나는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최근의 지방선거 때 민주당을 찍어주면 혹시나 좌파로 보일까봐 여론조사에서 거짓말을 하는 형국과 무엇이 다른가. 여권신장이라는 단어를 부부싸움에 사용하면 페미니스트로 몰릴까봐 입에 올리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던 그녀와 주인공처럼 어떤 경계선에 위치한 내 자신을 발견하고는 내 문제의식은 탈출구를 찾아 잠시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찾아 헤매다
또 다른 어떤 독자도 '응축된 시정과 산문의 진솔함으로 소외계층의 풍경을 묘사했다'는 노벨상 선정 이유처럼 비극에 옷을 입힌 그녀의 시적인 언어미와 아름다운 문장들에 놀라 극적인 감동을 받았다 할 것이며 박수를 건넬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문학의 힘에 압도만 당하는 비교적 운 좋은 독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나는 왜 순수한 감동마저 전달된 그대로 편하게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되었을까. '불편한 것은 넘치는 것이요, 편한 것은 결핍된 것' 이라면 넘치도록 강요받아온 애국과 민족에의 이데올로기가 오로지 시적인 감수성이나 옥구슬 같은 태초의 순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그녀의 감수성에 영향을 준 것들은 무엇이었을까.나는 잃어버린 내 감수성을 찾듯 그녀의 처녀성을 찾아 나섰고 결국 불행했던 유년의 기억과 죽음의 분위기로 음산했던 마을의 풍경을 담아내었다는 <저지대>를 조금은 절박한 마음으로 만나 보기로 했다.
마음의 굳은살이 세상과 스치며 온 만큼 단단하거나, 아직 가 닿지 못한 만큼만 말랑말랑하다면 좋겠다. 단순한 문학작품과의 교감에서도 이토록 서툰 나는 그저 독서에서조차 소심한 수용의 자세에 목이 멘다. 독일어를 한글자도 못 읽는 것은 창피하지 않으나, 문학어에 진정으로 울고 웃지 못하는 내가 창피하다. 영화 한편도 가치관과 취향에 따라 충분히 평은 엇갈릴 수 있지만 나는 그녀를 더 이해하고 내 의지로만 거리낌 없이 감동받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만 글을 썼던 그것처럼. 하나의 작품으로는 모자라다는 느낌도 들었고 어쩐지 작품 하나 읽어 놓고 수준 높은 언어의 예술성이라며 타성에 젖은 감탄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겸연쩍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불편한 마음 한구석을 무엇으로든 채워야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라난 마을로 돌아가 그녀의 어린 시절과 청춘을 만나고 왔다. <숨그네>보다 더 시적이고 더 풋풋했다고 느꼈다면 내가 이기적인 독자인걸까. 특히 그녀의 가족과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은 <숨그네>보다 더 몽환적이고 소용돌이 치는 원색적 묘사들로 가득했다.
인간이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치부를 숨기지 않고 어떻게 내재화하여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희망화 하는지 아주 세밀하게 알려주는 그녀의 자화상이었다. 간혹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구절이나 그녀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모호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미술관에서도 화가의 그림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하듯이 그럴 땐 눈을 감고 그저 그녀의 목소리를 느끼고만 싶었다. 한편의 시처럼, 음악이나 조각품 처럼. 이 작품을 먼저 읽었더라면 어땠을까도 생각했지만 나중에 읽어 전작을 소급해가며 끄덕이는 재미도 나쁘지 않았다. 비교적 분량이 긴 '저지대'를 뺀 나머지 단편들은 하나같이 호흡이 짧고 강렬하여 한편의 시와도 같았고, 그녀는 부인할 수 없는 시인이었다.
여기저기 헤매며 찾아본 그녀의 시집 <모카커피 잔을 든 창백한 신사들(Die blassen Herren mit den Mokkatassen), 2005>에 수록된 싯구절 '깃털집 안에 수탉 한 마리가 산다 / 토끼 한 마리는 모피집 안에 산다 / 물집 안에는 호수 하나가 살고 / 모퉁이 집에는 정찰대가 / 그곳 발코니에서 한 사람을 밀쳐버리고 / 라일락 나무를 넘어 / 그리고는 다시 자살이었다.'를 보면 <숨그네>의 한 장면이 쉽게 연상된다. <숨그네>가 소개되기 전에 유일하게 그녀의 짧은 글을 접할 수 있었던 <책그림책, 2001>에서도 그녀의 초현실적인 감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책장너머의 다른 세상을 응시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 속 사다리를 <저지대>에서 익숙했던 가족들과 함께한 식탁에서의 일상 속으로 가져와 결국 아버지가 천정너머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도구로 사용하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같은 책에 글을 실은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구름>이라는 글도 있었는데, 그림을 보고 쓴 글 한편을 읽고 그를 말하기는 어렵지만(국내에 소개된 다른 작품이 없었던 관계로)현상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나 작은 사물이라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시선과 객관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다른 작가들은 같은 작가의 그림을 해석할 때 유머나 작가로서의 깊은 사유, 혹은 에피소드를 적용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한곳에 치우치지 않는 공평함이나 정직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녀에게 오로지 진실만을 전해 주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싶은 무의식의 잣대일수도 있었음을 부인치 않겠다. 그의 시를 만날 수 있었다면 더욱 흡족했을지 모르나 나는 이쯤에서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들과 의구심에 혼자 퍼즐을 맞추어 가듯 나만의 스케치북이 완성되어가는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작품을 지나오면서 마음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정확하게 표현하긴 어려우나 나는 비로소 불편하던 마음이 얼마간 평화로와짐을 느꼈다. 한사람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 노력했고 그 결과로 만족감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스스로에 대한 부채감도 눈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마치 부모님, 사회가 가르쳐준 가치들로 내 사랑을 놓칠 수도 있었겠지만 상대를 알아가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다시 사랑을 되찾은 감격이라고 할까. 수용소라는 정치적 공간이 아닌 일상과 자연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문장과 단어들은 <숨그네>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가이드 역할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소설(또는 시)작업은 곧 그녀가 살아왔고, 살아가는, 살아가야 할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녀도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고 나의 부끄러움을 알까.
다시 상자를 열 그날까지
<숨그네>와 <저지대>에선 마치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으로 살아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찬가지로 살아남는 것이 글을 쓰는 일이고 낱말을 오리고 잘라 붙이는 것이 자유를 찾는 일이었던 그녀에게는 죽도록 글을 쓰고 끈질기게 낱말을 찾는 것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나에겐 이렇게 문학작품을 읽으며 어떠한 책임이나 의무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감동 받고 또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내 자신을 용서 하는 길이 아닐까.
그녀가 살아온 '상자같은마을'은 씻을 수 없는 가해자로서의 아버지의 관이기도 했고, 그녀가 서독으로 이주하기 위해 몸을 실었던 트럭이기도 했고, 레오의 축음기 트렁크 박스이기도 했고, 레오가 5년 동안 살아낸 검은색 수용소 이기도 했으며 끝내는 삶과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그녀가 이 모든 것을 담아낸 그녀의 낱말상자이기도 했다.
"상자안의 하늘은 검은색 에나멜로 칠해져있고, 끝이 뾰족한 별들로 장식되어있다. 쓰러질 때 충격이 덜하도록 바닥에는 무릎높이까지 솜이 깔려있다...나는 포개진 관이 든 상자에서 절대 나오고 싶지 않았다." 82P
그녀가 주로 검은색 옷을 입고 검은색 구두끈을 매는 것은 아버지 사후 남은 평생 검은색 옷만 입겠다던 어머니를 부정하지 않음이고, 독재와 맞서왔던 그녀만의 꿋꿋함을 기리는 제복 이자, 모든 자연과 동물과 식물이 검정색이었던 마을에 대한 향수이자,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에 대한 영원한 애도이자, 그녀 스스로 부활하기 위해 그녀가 버리고 죽인 것들에 대한 용서의 상징일 것이다.
오년 전인가 '워싱턴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방문했을 때 그 어떤 공간보다 목이 막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던 공간은 유품이나 유물, 모형 등의 증거로 실상을 알려주는 공간이 아닌, 아치형 천장에 양옆부터 오로지 가족의 빛바랜 사진들로만 높은 천고를 메우며 아무것도 전시 하지 않은 명상의 공간이었다. 마치 치밀한 각본처럼 미리 짜여진 듯한 그녀의 부모님과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운명을 그녀의 검은 앨범 속에서 뒤늦은 발걸음으로 애도하고자 한다.
다시 그녀가 그 아득한 낱말상자를 열어 '내 숨결을 그네 뛰게 할 마법의 작업'을 시작할 것으로 믿는다. 비로소 심장이 뛰면서 '한방울넘치는행복'에 미소 짓는 그날까지 나는 벅차게 기다릴 것이다. 그녀를 처음 만나던 그때 그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