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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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나치게 슬프지 않으면서도 더 할 수 없이 쓸쓸하다.
혼자남아 못 견디게 외롭다기 보다 견딜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삼켜내는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은 오래 기억될 만한 장면이었다. 

5년 전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아오모리현을 어렵게 방문한 적이 있다. 도쿄나 오사카위주의 출장에 비하면 교통이나 숙박, 기후 모든 면에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늦가을이었는데도 오후 네 시면 해가 지는 아쉬움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마을은 온통 해같은 노을로 불타올라 잊을 수 없는 풍광을 선사하곤 했다. 흡사 우리나라 남도의 농촌을 방문한 느낌도 들었고 버스를 타고 들어선 마을의 풍경은 그야말로 평화로와 보였으며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낮고 아담한 가옥, 잔잔한 나무들은 한없이 여유롭고 따스해보였지만 어딘지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달 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참가한 일본감독의 <아제미치 댄스>라는 영화에서도 일본의 농촌풍광을 배경으로 논두렁(아제미치)을 점프하던 소녀들의 순수어린 모습을 기억한다. 바로 <환상의 빛>의 배경이 된 해안마을은 기존에 내가 그리고 있던 일본 시골마을의 모습과 일치했다. 

<환상의 빛>
<환상의 빛>은 유미코라는 서른 두 살 여인의 남편이 철로 위 전차에 치이는 방법으로 자살을 한 후 소소기라는 해변마을로 시집와 재혼한 남편과 전처의 자식, 그리고 사별한 남편과 사이에서 얻은 아들과 함께 살면서 늘 가까운 사람에게 일상을 건네듯 조근조근 자신의 심경을 편지글로 써내려간 작품이다. 배경이 어쩐지 낯설진 않았고 더구나 미야모토 테루라는 작가의 편지형식의 독백에 가까운 문체는 흡사 우리문단의 여성작가들을 연상케 할만큼 친숙하고 서정적이었다. 해안마을에 등장하는 풍어(豊漁), 해명(海鳴), 어항(漁港), 돌풍 등의 단어들은 지붕에 쌓인 눈이나 파도의 물보라와 잘 어울려지며 잔잔한 문체 속에서도 환상적인 시각성을 부여하였고 편지를 쓰고 있는 주인공의 심경변화를 훌륭하게 전달해주었다.

소설적 서사에 중요한 암시를 주는 할머니의 멀어져 가는 마지막 뒷모습이나 유미코의 초경, 강인한 모습의 재일한국인 아주머니, 같은 버스에서 내려 뒤쫓아간 남자의 아무리 손짓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을 것 같던 뒷모습, 풍랑에도 불사신처럼 다시 돌아온 도메노댁의 이야기들은 가끔씩 그녀의 편지를 잊게도 하였지만 결국 왜 아무말도 없이 내 곁을 떠났느냐는 간절한 질문들로 되돌아 오기 위한 장치였음을 알게 해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아무런 준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남편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이유와 그러한 선택을 하기까지의 심경들을 오랜 세월 좇아가며 이해하기 위한 유미코의 눈처럼 부신 여정이 결국엔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그녀의 슬픔을 전해주는 것 같아 읽는 내내 마음이 일렁거리었다.

소설 도입부에 '좀처럼 보기 드문 초록색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바다에 한 덩어리가 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부분'은 마지막에 다시 '봄도 한창이어서 짙은 초록으로 변한, 거칠어지기도 하고 잔잔해 지기도 하는 소소기 바다의 모습'으로 재생된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빛나는 바다 한쪽'으로 어쩌면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그가 보았을지 모를 빛으로, 바다가 아닌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은 잔물결의 빛으로 환생한다. <환상의 빛>은 그녀에게 '죽음의 빛'이 아닌 다시 학교에서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는 '生의 빛'이 되었고 우리에겐 기분이 좋아졌지만 뜨겁고도 아픈 빛이 되어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

<밤벚꽃>
남편과 헤어진 지 이십년이 되었고, 외아들을 잃은 지 일 년이 되가는 쉰을 바라보는 아야코라는 중년여성이 바라본 벚꽃이 지는 순간의 삶의 아쉬움과 연민을 애절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바다와 벚꽃이 함께 보이는 낭만적인 자신의 집에 묵게 된 가난한 신혼부부의 첫날밤을 곁에서 같이 지새게 되면서 바로 그 순간 지금이라면 어떤 여자로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러나 눈을 떼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련한 느낌에 너무나 공감한다.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눈꽃처럼 사라지던 벚꽃의 아스라함과 꽃이 지면 마치 봄날마저 사라질것 같던 그 봄밤의 향기를 누군들 잊을 수 있을까.
평범한 마을의 풍경과 늘 마주하던 계절이 그리는 그림으로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 하는데공감을 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박쥐>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청소년시절, 문제학생이었던 친구의 비행 장소에서 그 친구를 기다리며 어쩌면 친구의 비행을 방관하던 죄책감과 비겁한 동경등의 복잡한 심경을 암시하는 '박쥐'에 대한 소름끼침은 훗날 유부남이면서 미혼의 여성과 불륜을 지속하던 어느 가을날 검게 뒤섞이는 낙엽을 통해 비로소 비쳐지는 자신의 부도덕으로 부활하며 어쩔 수 없는 '박쥐'와 중첩된다.

-그것은 둔하고 까만 눈을 가진, 새라고도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생물의 추악한 춤이며, 땀과 허무로 처발라진 관능의 무수한 비말飛沫이며, 기괴한 표정에 조종되는 그 영혼들의 어쩔 수 없는 술렁거림이었다. 134p

문제학생이었던 란도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고, 우연히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으로 더 심화될 수 있었던 자책감이 마지막 장면에서 떠올리는 박쥐로 어느 정도 해소되며 일말의 빚을 거두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술렁거림은 독자로 전해져 주인공이 갚아놓은 빚에 그다지 시원하지 못한 의문이나 약간의 배반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결국 누구나 자신의 이중적인 위선을 들키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남은 작품이었다.

<침대차>
이 작품은 주인공이 샐러리맨이고 출장으로 이동하는 침대차에서의 회상이 서사를 이루고 있어 소개된 네 편 중 가장 현실적으로 읽혀진 작품이었다. 우연히 맞은 편 좌석에 탑승한 말쑥한 노인의 상념에 빠진 듯한 시선과 밤새 들려오던 울음소리는 어린 시절 집에서 놀다가 익사할 뻔한 친구의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고 결국 대학생이 되어서도 기차에서 떨어져 죽은 일이 생각나 비로소 장례식에서 뵌 친구 할아버지의 슬픔을 헤아리게 된다. 주인공은 고타니라는 껄끄러운 직속상사와 오랜 세월에 걸쳐 공을 들인 프로젝트의 계약을 목전에 앞두고 지나간 시간을 견딘 것에 대한 보람이나 스스로의 성취감에 젖어 있을 즈음이었다.

사람이 앞만 보고 달려갈 때는 보지 못하지만 막상 커다란 성취 후에는 보게 되는 것들이 있는 것일까. 살면서 내 머릿 속에 가슴 속에 피부 깊숙이 박혀왔던 삶의 파편들이 또다시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에 문득문득 튀어 오를 때가 있어 당황하다가도 이내 상처에 대한 익숙함으로 현재의 고통을 잊게 될 때가 있다. 사람은 어쩌면 현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보다 익숙한 상처를 습관적으로 불러와 자신과 마주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분명 이 작품을 접하고는 개개인의 비슷한 유형의 상처를 다시 상기하게 되는 낯설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회상에의 부질없음이 아닌 분명 지근 존재하는 외상에 쏟아 붓는 쓰라린 알코올과도 같을 것이다.

<환상의 빛>, <밤벚꽃>, <박쥐>, <침대차>이 네 편에서는 모두 인생에서 맺은 관계속의 사람들을 상실한 주인공들이 초록의 바다에 찬란한 빛이 떨어지거나, 화려했던 밤벚꽃이 지는 순간이거나, 가을에 어지러운 낙엽들이 뒹구는 순간 혹은 자신처럼 무언가를 잃은 듯한 타자의 스쳐지나가던 표정과 같은 찰나의 순간에 느껴지는 잡을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아련하고 절실한 것들을 깊고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우리는 분명 이 아름다움으로 혹시나 아름답지 않았을지 모를 인생의 어느 순간들을 아무도 몰래 덮어주고 싶을 것이다. 어느새 상처에 새살이 돋듯 그렇게 시나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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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두드림 콘서트
유재원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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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주하다

인문학. 내가 아는 인문학은 철저하게 인문계냐 이공계냐, 인문계 고등학교냐 예체능계고등학교냐의 입시를 전제로 한 '인문'의 개념에 이분법적 분류에 따른 인문학이었음을 부끄럽게 밝히고자 한다.

인문학 : 인문학(人文學)은 인간의 조건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이 경험적인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변적인 방법을 폭넓게 사용한다. 인문학의 분야로는 철학과 문학,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종교학, 여성학, 미학, 예술, 음악 등이 있다.(위키백과 출처)

그 중에서도 인문학에 예술과 음악의 분야까지 포함되는 것을 확인하고 새삼 짧았던 상식에 헛웃음을 지으며 이 책을 열었다. 이 책은 비교적 '인문학'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상위범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콘서트'라는 다분히 저자의 성향이 담겨진 결론과 '두드림(Do dream- 꿈을 이루다)'이라는 이 책이 지향하고자 하는 도달점을 잘 조화시켜 읽는 이로 하여금 부담을 주지 않고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경쾌하게 암시하는 직설적이고도 분명한 매력을 지녔다.

어렵고 근엄해 보이는 법률가의 길을 가면서도 음악과 미술 등 다양한 예술을 통해 감성을 유지해온 그가 놀라왔고, 그러했기에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그가 내린 결론은 더 뜻 깊게 다가왔다. 그가 제시하는 '박애'의 삶은 오랜 기간 자신이 읽고 떠올렸던 훌륭한 생각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그의 '꿈'이자 그러한 인문학적 소양으로 법과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궁극적인 '꿈'으로 느껴졌으며, 그는 자신이 제시한 삶대로 그것을 소신있게 실천하는 현재진행형의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이 책은 크게 사람(人)과 음악(樂), 미술(美), 문학(文), 그리고 마지막에 세상과 소통하는 마음과 저자가 지향하는 박애주의를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두에 사전적 의미로 제시된 인문학의 분야인 철학,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종교학, 여성학, 미학, 예술등의 분야를 구체적으로 아우른다고 보기는 어렵고 또 그 선정된 기준 역시 개론적이지는 않지만 나같이 인문학의 범위에 예술분야가 포함되는 것도 간과한 독자들을 고려한다면 참 으로 친근한 카테고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구렁이 담넘어 가듯 술술 넘겨지는 책장들 사이로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연보라색의 '인문학 숲의 단상'이라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소개되는데 나는 이것이 마치 월드컵 뒷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흥미롭고 즐거웠다. 사람들은 거창한 앞 이야기 보다는 어쩌면 시시콜콜 뒷이야기에 더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도 인문학이란 죽은 고전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성현들의 이야기'를 머금고 오늘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는 우리 삶의 일부라는 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듯이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음악가가 되었건 화가가 되었건 누구나 치열한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뜨거운 메시지를 남겨준 사람들이었다.

먼저 칼라스와 오나시스, 재클린의 세기의 로맨스는 여기저기 떠돌던 이야기를 한데 모아 듣는 것처럼 도입부부터 강렬한 인상을 제공했다. 재클린은 더구나 뒤에 이어지는 케네디家의 신화에서는 조연이지만 숙명적인 대결구도에서는 행운의 승리자 였고 흥미진진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이었다. 마리아 칼라스나 재클린 케네디나 마지막은 그녀들의 화려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쓸쓸했기에 세상은 알 수 없도록 불공평하다가도 또 누구에게나 삶은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었다. 뒤이어 소개되는 케네디家의 신화 또한 여기저기서 한번 씩 지나쳤던 행운과 불운을 집대성하여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한 감동을 선사했다. 미국의 정치와 도전사를 상징한다는 케네디家의 끊임없는 열정과 집념들은 개천에서 용난다 격인 우리식 영웅 스토리를 생각케 하다가도 몇 대에 걸쳐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케네디家를 떠올리면 새삼 미국의 저력과 도전정신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아널드 파마와 잭니클라우스의 골프계의 위대한 라이벌 이야기도 너무나 교훈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라는 두 젊은 영웅의 라이벌 관계가 대비되며 아직 젊은 선수들에게 벌써 은퇴니 향후거처를 이야기 하는 현실이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했다. 종목이 다른 스포츠의 특성과 국적이 엄연히 다른 한일 간 대결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널드 파마와 잭니클라우스의 서로를 존중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열정, 은퇴후의 행보들은 어떤 스포츠 선수들에게도 훌륭한 교감이 될듯하다.

음악으로 넘어와서 저자는 고전음악으로 바하와 쇼팽을, 현대 대중음악에서는 아바를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고전음악에서는 오리지널 음악가와 그 음악을 가장 그 음악 답게 연주한 연주가의 생애를 중첩시키며 비슷한 성격, 환경을 가진 두 사람 간의 교감을 바라보고 느끼는 감회를 밀도있게 들려준다. 특히,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들으며 화려한 파리 음악계의 가식적인 분위기에 맞추어 주는 듯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조심스레 내보이려 애쓰는 이방인 청년으로서의 쇼팽을 느끼고 그 외로움에 공감하였다는 저자의 감성은 녹턴을 비롯한 쇼팽의 연주곡을 다시 들어보고 싶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또 그러한 쇼팽의 기질을 쏙 빼닮은 피아니스트 상송 프랑소와 역시 비교적 젊은 나이에 갑자기 운명을 달리 하였다는 것과 두 사람의 시공간을 초월한 조우를 우연으로 보지 않는 저자의 공감대는 인상적이었다. 한곡의 곡으로도 그 음악을 작곡한 음악가의 일생과 고독, 그리고 이어지는 후대의 연주자, 그 두 사람을 모두 알고 감상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미학적 감상의 최고치에 도달한 면모가 느껴졌다.

미술 분야에서는 <성모자화>를 그린 라파엘로와 모딜리아니의 삶과 예술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저기 스치면서 접한 기억이 있는 그림들이었지만 라파엘로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비견되는 유일한 화가이며 37세에 요절한 화가인지는 처음 알았다. 성모와 그 품에 안기어 세상을 바라보는 아기예수의 그림이 언젠가 내게도 영혼의 휴식처가 될 순간이 오리라 믿는다. 모딜리아니는 워낙 유명한 화가인데다가 그의 여인이었던 잔느의 그림과 모딜리아니 사후 바로 연이어 자살한 잔느의 일화로 내게는 불행한 청춘이자 요절한 화가의 대명사쯤으로 인식되었던 화가이다. 하지만 그가 갈망했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나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정체성, 자신의 삶에 늘 만족했다는 일화들은 눈여겨 기억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다. 여인은 그를 따라 세상을 저버렸지만, 화가는 영원히 남을 그림으로 여인을 담아 내어 그림을 통해 여인을 느끼는 오늘, 그와 그녀는 아직까지도 혹은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서는 공자의 <논어>와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폰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이야기 한다. 고등학교 이후로 공자와 세익스피어를 잊었다. 그가 들려준 공자의 제자 안연과 자로의 죽음은 꽤나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양인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자랑스럽게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그의 가르침이 어떤 교과서보다 진심으로 느껴졌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을 이해하는 관점 역시 삶의 연극무대인 법정이라는 연극적 속성을 잘 파악한 연출가로서 평가하는 그의 시선이 같은 연장선상에서 정의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독일법학자라고는 하지만 법조계에는 문외한인 내가 처음 들어보는 폰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정의롭게 소개하는 것은 당연해 보였지만 많은 한국의 작가들 중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소개하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즈음 마지막 인문학 숲의 단상에 제시된 소록도와 관련한 사회적 문제와 여러 법적 투쟁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하며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평소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를 워낙 인상깊게 읽은 터라 반갑기도 했지만 <당신들의 천국>도 진지하게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에 제시하는 삶은 마더 데레사 수녀의 삶이다. 그녀는 세상을 떠난 지 십년도 더 지났지만 웬지 우리 곁에 늘 있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스님 같은 종교적 삶을 몸소 실천하고 큰 가르침을 남겨준 성인들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존경심의 일환일 것이다. 나는 데레사 수녀의 일생과 '사랑의 선교회'를 전하려한 그녀의 끈질긴 시도들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했다. 겉으로 보여 지는 베풀고 미소 짓는 모습만 바라보고 노벨평화상을 떠올리며 세상 한편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살고 있구나 까지만 생각했다. 저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결국 박애주의라는 거창해 보이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3대개념 중 하나를 우리에게 끝내 제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결론을 마무리 짓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언젠가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믿음과 그것을 실천하는 일의 하나로 보여 지는 이 책의 출간이 마지막엔 퍽이나 무겁게 다가왔다. 결국, 저자가 인문학을 통한 배움을 이렇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꿈을 실현해 나가는 현장에 마주한 것 같아 그 의지에 기꺼이 박수를 치면서 책을 덮어야 했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방법도 여러 가지 일 것이고, 꿈을 실천하는 방법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어쩌면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동시에 이룰 순 없어도 천천히 한걸음 다가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시간들 이었다. 책을 많이 읽고 또 그만큼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 책의 저자처럼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이 다양한 인문분야의 책을 섭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얻은 것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즐겁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는 신선한 '박애주의'는 기꺼이 닮아가고 싶은 자화상이자 따라가고 싶은 행보였다.

생생하고 잔잔한 콘서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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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역사
마크 스미스 지음, 김상훈 옮김 / 수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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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부에서 시청각 교육(교육공학: Educational Technology)을 전공하였다. 우리 때 만해도 칠판식 수업과 필기위주의 학습이 주를 이루었지만 요즘은 보고 듣는(audio-visual)교육 외에도 후각, 미각, 촉각을 다양하게 이용한 오감체험 교육이 학교현장 밖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머지않아 과 이름을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등장하는 첨단기술의 제품과 IT기기의 대중적인 보급으로 이제 미세한 손끝의 움직임만으로도 복잡한 업무는 물론이고 교육, 오락, 방송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세상과 접속하며, 세상을 엿보고, 세상에 소리치고, 세상과 교류 할 수 있게 되었다. 내일은 어떤 새로운 소식이 소개될 지, 다음의 제품은 어떻게 발전되었을 지 이제 막 새로운 제품을 손에 넣고 겨우 손에 익을 즈음엔 여지없이 비웃기라도 하듯 언제나 나보다 더 새로운 제품을 손에 든 사람이 나타나고 세상은 또 저만치쯤 도망가 있다는 걸 느낀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숨가쁘게 좇아가는 것을 스스로 포기 하고 멈추게 되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욕심이나 뒤쳐진다는 느낌이 사라질 무렵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저들은 젊었다는 생각이 돌이킬 수 없는 결론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도 벅찬 현실에 '감각'이라는 것의 '역사'를 알아보고자 과연 감각 간에도 서열이 있어 그러한 시각이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 하는 것들을 궁금해 한다는 것 자체도 썩 미래적인 생각은 아니라는 선입견이 들긴 했지만, 마치 방대한 논문 열 편 정도를 훑은 것 같은 지적인 만족감은 결코 세상에 뒤쳐져 있다는 패배감을 충분히 보상해 줄 만한 것이었다.

눈에 보인다는 사실과 눈으로 믿는 진실
'내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는 말이 관용어처럼 쓰일 때가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나 사실에 대한 확인방법으로써 이런 말을 하게 될 경우는 주로 남을 통해서 어떠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거나 소식을 접한 경우일 것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눈으로 보는 것은 '믿음'과 관련지어 생각해 왔던 것 같다. '내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못하겠다'라는 말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눈'이 진실과 지식의 원천으로서 '시각'이 다른 감각보다 우위에 자리해 르네상스, 18, 19세기 이후 종교, 의학, 과학,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권력관계를 야기하고 계층을 구분짓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보였다.

16,7세기 유럽궁중에서 시작된 발레는 정치적, 사회적 볼거리의 일환으로 발소리와 숨소리를 최소화 하여 초시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연기자들의 목표였으며 사회통제와 상류층의 관심을 하나로 결합시키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은 새롭고도 놀랄만 했다. 현대 발레를 생각한다면 아름다운 주제음악이 없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예술의 한 장르인데 소리가 강조되는 춤이나 음악을 노동자 계급이 선호하고 또 그들을 상징하기도 했다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가도 '발레'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멈칫거림이 있었다. 
 
또 하나, 미국의 인종차별의 역사에서 드러난 공공장소에서 '흑'과 '백'을 구분하는 '눈'의 한계를 나타내는 두 가지 에피소드는 우리도 그들의 시선으로는 유색인종인 입장에서 무척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결론적으로 정체성은 오로지 눈으로만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하지만 나는 아직도 미국의 지하철을 탔을 때 육안만으로는 뚜렷한 흑인만 인식 할 수 있지 누가 흑인으로 오해 받을 수 있는 백인인지, 히스패닉인지는 구분하지 못한다. 이미 미국의 지하철엔 백인은 타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상식처럼 알고 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오해로 인해 부당한 인종차별을 받을 확률이 있는 백인들의 문제인 것이지 백인으로 오해받아 인종차별을 받지 않을 흑인들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즉, 진실은 오로지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눈으로만 확인 된 사실을 진실로 여기고 싶어하는 오랜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시각과 협력해 감각을 드높이다
나이가 들면 생물학적인 청력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기능이 떨어진 상태에서도 감각은 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 아마도 세월과 같이한 소리에 대한 '기억'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리는 시각보다 신뢰도부분에서는 하위에 있을지 모르지만 피부로 느끼는 체감력으로 본다면 더 직접적이라 생각한다. 청각의 역사에서 제시된 정치, 교육, 신앙에 대한 지배력은 모든 감각이 골고루 발달되지 못했던 시기인만큼 더 상대적으로 막강했을 것이다. 소리가 하나의 기호체계로서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는 역할을 하고 마차소리, 종소리, 대장간 소리 등 그 도시만의 독특한 기준음이 공동체 의식을 구축했다는 사실은 소리가 장소의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교회, 성당, 시장, 공장, 학교, 운동장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소리에 대한 영적이고 주술적인 힘이나 반대 개념의 소음의 문제, 소리를 기록하는 음반의 등장, 식민지국가를 대상으로 한 자아와 국가 정체성의 확보같은 청각의 발전은 오늘날 크게 주목할 만한 이변적인 요소로 다가오진 않았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요즘 마케팅의 일환으로도 자주 이용되고 있는 '낭독회'를 떠올릴수 있겠다. 혼자 눈으로 읽고 철저하게 혼자 느낄 수밖에 없는 독서의 외로움이 소리 내어 읽고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서로 공감을 나눌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분명 청각이 시각의 커뮤니케이션을 한차원 업그레이드 한 무형의 매체라 생각한다.

나는 시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안경을 쓰는데 안경을 벗으면 이상하게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즉, 안보이면 안 들리게 되는 것 같아 누군가 나와 이야기를 하려할 때는 나도 모르게 안경을 찾게 된다. 그렇지만 안 들린다고 안 보이는 것인가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꼭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다. 실제로 나쁜 것은 시력임에도 불구하고 청력이 시력에 종속되어 약간의 통제를 받는 다는 생각을 한다. 시청각교육에서도 시각적인 정보만 제시하고 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면 약 30% 전달력이 떨어지지만 반대로 소리만 들려주고 시각적인 정보를 제시 하지 않으면 거의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실험을 통해 청각이 시각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어떤 감각이 어떤 감각의 우위에 있느냐 자체가 중요하진 않지만, 두 가지 이상의 감각이 사용되는 장르에서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방법을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냄새를 말 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냄새는 발생한다
신입사원 시절 우리 회사에 프랑스에서 파견 온 남자가 있었다. 그 친구는 유난히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나는 사람이었는데 자신도 그것을 의식해서인지 진한 향수를 바꾸어가며 뿌리는 꽤 멋쟁이였었다. 그런데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이십년 이상 그의 육체를 만들어온 그 나라 특유의 문화와 그가 섭취해 온 음식을 다 종합한 그 세월의 냄새는 우리를 속일 수 없었다. 그가 한여름이 지나 사무실을 떠났을 때에도 그 냄새만은 두어 달 이상 건물에서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그의 존재를 잊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냄새에 대한 기억은 시각이나 청각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그것이 안 좋은 기억일 땐 영원히 각인되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 파리도심의 메트로 역사에서 나던 이해할 수 없었던 냄새, 미국 LA의 어느 박물관 화장실에서 나던 냄새, 일본의 신칸센만 타면 흘러나오던 냄새...나는 유난히 후각에 민감하며 냄새의 온갖 종류와 그에 대한 기억력이 남들보다 자세해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남들도 피곤하게 만들었던 적이 많았다. 나에게 냄새는 장소의 기억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향기와 냄새에 대해 정리한 연구들을 보니 고대와 중세에는 종교적 신앙과 밀접하게 결부 되어 있었고 그 후 근대와 현대를 거쳐 오면서 여성, 계급, 이념과 인종을 구분짓는데까지 정교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부르조아들이 범죄자와 가난한 노동자를 깍아 내리기 위해 계급적으로 후감통제를 이어 온 것과 그로인해 가난과 질병, 불결의 부정적 개념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미지로 굳어졌으며 또 그것은 그들의 감각이 우둔한 것으로 정당화 하는 합리적인 선입견이 되었고 그러한 선입견은 그들의 참을성으로 증명되었다는 사실을 보고, 나는 어떠한 감각을 잘 참는 것이 그 감각에 둔감하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았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감각을 잘 견디거나 그러한 행위가 반복되어 익숙해진다면 그것 또한 그 감각에 대해 둔감한 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연구는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각이 훈련이나 연습을 통해 더 개발되고 민감해 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상위계급층이 하위계급층에 도살장 청소나 쓰레기 버리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같은 후감의 권력행사를 보며 나는 현대에 와서도 작게는 학교에서 화장실 청소나 쓰레기 수거같은 체벌로 혹은 인분투척 같은 개인의 사회적 단죄를 떠올렸다. 아마도 악취는 죄악이라는 고대적부터의 뿌리깊은 의식이 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연결지을 수 있었다.

맛이 멋이 되다
음식과 요리의 역사라는 틀 안에서 '맛의 역사'는 프랑스와 중국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은 우리와 친근하기도 하지만 우리와는 다르게 세계 어디를 가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중국음식점을 보며 늘 신기해 하면서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상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수 있었다. 그 지방만의 특산품과 조미료만으로 만든 요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중국인들에게는 자기 지방과 민족의 음식과 맛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으며 그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이 결국 민족의 정체성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 같다.

또 영국에서는 지배층의 문화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육안으로 구별이 어려운 시각보다 미각으로 격차를 벌이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했으며 설탕을 노동자 계급에 이용해 더욱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이득을 얻기도 했으며, 초창기에는 옥수수가 돼지사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등은 매우 흥미로왔다. 내 경험으로 보면 입맛이라는 것도 나이가 들면 사람이나 환경에 의해 바뀌어 진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맛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해외 이주민의 경우 미각이 국가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정서적 진정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에 충분한 공감이 느껴졌다.

우리의 경우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가'라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미각에 대한 진리의 탐지 역할과 그에 대한 신뢰는 보고 듣는 것보다 더 아래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멀고 사람이 많아도 애써 맛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미각이 뛰어난 사람들은 다른 감각도 뛰어날지 만약 다른 감각에 더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은 어떤 감각인지 궁금하다. 미각이 민족적 정체성을 보존하는데 사용되었다면 아마도 미각과 연계된 우수한 감각 역시 그 민족의 문화적 발달과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만질 수 있다면 가질 수 있다
가장 열등한 밑바닥 감각으로 이해되어져 온 촉각의 역사는 아무래도 감각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단락이었다. 특히, 눈알을 도려내 피부에 가해지는 체벌에 대한 견딤으로 남자다움과 지위를 판단하기 위해 손톱을 기르고 눈알을 파는 것이 일상적이었다는 사실은 나이든 여성 산파들이 자신들의 권위와 힘을 보여주기 위해 젊고 임신한 여성들을 촉각적으로 괴롭혔다는 사실 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

인종차별에 촉감적인 해석이 개입되어 80년대 에이즈의 원인과 감염에 흑인의 타락과 성애에 관한 인종적 고정관념이 투사된 것 역시 노동력 착취와 서열 확립을 위한 지배층 역사의 오래된 관습을 대변하는 것 같아 문화적면에서 결코 상대적인 평가에 자유롭지 못한 유색인종으로서 반가운 결과는 아니었다.

만져 볼 수 있다는 것과 만질 수 없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디지털 시대에서 촉각은 아날로그적 감성과 교류, 물리적인 접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상하는 그 실체를 확인해볼 수있는 실존하는 무게감의 존재증명과 지각의 감각일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터치감을 중요시 하는 디지털 제품들에서 손끝의 예민한 감각으로 화면과의 접촉을 통해 컨텐츠를 올리고 보내고 내려 받고 만들 수 있지만 아무리 첨단의 제품일지라도 촉각의 수준자체가 그 제품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시기는 이미 지나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만져 본다는 것은 점점 더 희소성의 감각으로 위태로와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 장에서 제시한 박물관의 유물 만져보기는 단순한 역사를 체험하는 의미로서의 촉각이 아닌 소유를 욕망하는 접촉의 의미로 해석되어 결과적으로 교육적 효과보다는 관리적 측면에서의 제한된 실험요소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다. 만질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감각보다 확실히 내 것임을 상징하고 증명하는 하나의 기표로 인식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인간의 욕망과 연계된 더 많은 연구결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결론 부부에서 감각의 역사성과 재현문제에 관한 논의들은 당면하고 시급한 문제로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감각의 역사가 외교정책에 도움이 될 것이며 그 예로 감각에 대한 우위가 서양과는 다른 인도에 대한 사례는 같은 아시아이긴 해도 문화적, 외교적으로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꽤 중요한 논제가 아닐 수 없다. 역자도 후기에 밝혔듯이 서양사학자의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구이기도 하지만, 간혹가다 예외로 등장하는 중국과 인도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감각의 역사도 정리되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더 분명해지는 계기가 된 것 같고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입장에서는 그들의 계보와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실용적인 측면에서 후속적인 연구가 이어지길 바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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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한기
이지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나원참, 원나참, 참나원....
이 소설 한마디로 유쾌경쾌상쾌 하다 !!!
큰 기대 없이 열어본 선물상자나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영화 한편이 꼭 그 쪽 일 것이다. <청춘극한기>라는 물과 불의 속성을 한데 섞어 놓은 듯한 묘한 느낌의 제목에 대한 호기심과 전작 <모던보이>를 통해 이미 재기발랄한 발상을 기대하고는 있었으나 그것은 그냥 말 그대로 그뿐이었다. 더군다나 개인적으로 얼마 전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벨이 울리고>를 덮고는 다시금 청춘연애소설에 대한 얼마간의 기피현상까지 생기게 된 나로서는 솔직히 다시 <청춘>이 반갑지 않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소설, 이 작가 퍽이나 괘안타. 영화로 치면 코미디와 액션, 스릴러, SF, 적당한 멜로까지 온 장르가 잘 버무려진 12세 관람수준으로 학생관객까지 동원할 수 있는 설이나 추석 특수 초특급 흥행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읽는 내내 웃다가 짠하다가 또 뒤늦게 미소 짓다가 진지해지다가 결국 마지막엔 시원스레 박수치며 고개 끄덕일 수 있었다. 오랜만에 책 읽는 동안 연관되어 떠오르는 다른 잡념없이 오직 책읽는 즐거움에 몰두하며 빠른 시간에 책을 덮었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고 그만큼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었다고 밖에 표현할 수없는 건 사랑해 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이 없음을 안타까와 하는 고백의 심정과도 같을 것이니 이해를 바란다.

희망을 짝사랑하는 청춘...
이 작품에는 일, 연애, 인간관계 등 살면서 그다지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자칭 백수의 시나리오 작가인 서른 정도의 일인칭 화자 '옥택선'(2PM의 옥택연이 내내 연상되었지만)이 등장한다. 그녀는 스타벅스에서 소개팅을 하며 자신의 유품으로 주성치와 에릭 로메르 DVD, 아이북과 아이팟, 낡은 나이키 조깅화, 어그부츠, 빛을 보지 못한 작품의 메모들, 이 빠진 머그잔, 머리냄새가 밴 쿠션 등을 떠올리고 끈기나 패기, 희망, 행복같은 것에는 변변찮은 생활만큼이나 큰 미련이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한명의 부실한 청춘임에 틀림없다. 여기까지는 흡사 김애란식 소설에 등장하는 편의점에 가는 이십대 여자와 비슷한 현실에 냉소적인 성격을 예상할 수 있었다.

"..희망이 간절한 사람은 때론 희망이 두렵기도 해. 희망밖에는 가질 게 없으니까...그러면 오히려 희망에게 배신당할까봐 피하게 되지. 짝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숨는 것 처럼." 58p

어린시절 재혼한 아버지는 다시는 가질 수 없는 희망으로 옥택선의 가슴에 문신이 되고 결국 무언가 간절할수록 그것이 두려워지는, 그리하여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방어기제로 무관심이나 냉소, 미련 버리기 같은 부차적 반응이 일상화 되 버린 것이다. 이긴 자가 다가진다는 말을 청춘이 한참 지난 후에 비로소 깨달은 나는 그래도 순진한 축에 속했지 싶다.

마법의 시간으로의 초대...
그러나 작품 초반부에 묘사되는 남수필과의 소개팅 분위기, 첫사랑인 김연우와의 흥분된 재회 및 뜬금없는 고백상황, 남수필이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연락에 이은 연우와 함께 공무원들로부터 도망치는 장면까지 빠른 속도로 펼쳐지던 유머러스한 분위기는 남수필이 문자메시지로 실마리를 제공한 이균과의 만남이 전개되는 중반부로 넘어 오면서 부터는 잠시 머뭇하며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는데 이는 러브 바이러스의 이차적 징후인 '마법의 시간'을 거치면서 그 절정에 달한다.

- 내가 누구인지, 나란 존재를 이루는 사건과 사람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내가 애써 외면한 진실은 무엇인지, 그것들을 추리하며 슬슬 나를 지배하는 그것에 대하여 감을 잡기 시작했다. 139p 
 
이는 러브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인해 나타나는 1차적 징후 - 온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뛰고, 흥분으로 들뜬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해지는 느낌 - 를 겪고 난 후 그동안 잊고 지내던 무의식 속 자신의 지난 과거를 하나씩 회상하는 것으로 비록 바이러스 자체는 무방비 상태에 들어온 것이지만 이를 충분히 객관화 하여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암시하는 상징적 희망기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독감에 걸린 후 주사를 맞으면 내 안의 지독한 바이러스와 그것을 퇴치 하려는 약들과 치열히도 치고 박으며 서로의 힘겨루기를 하는 내적인 싸움의 시간처럼 말이다.

'마법의 시간'에서는 20년 전 헤어진 아빠를 다시 만나기도 하고, 아직은 미숙하기만 했던 스무살 첫사랑을 기억나게 하고, 어릴 적 뛰놀던 동네를 생각나게 만든다. 비록 지금 바이러스에 감염된 청춘은 가시화되지 않은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하지만 마법과도 같은 반추의 시간은 어떤 외부의 자극이 아닌 순도 백프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하여 결국엔 바이러스가 아닌 진짜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하는 '치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하나, 옥택선이 첫만남에선 옥신각신하며 서로를 반신반의 하다가 바이러스로 인해 서로가 원치않던 사랑을 느끼지만 백신의 치료로 정상이 된 후에도 병리학적 전염병이 아닌 진짜 가슴으로 사랑을 느끼게 된 현실의 인물 이름이 이균인 것은 아마도 바이러스의 가짜 사랑균과 가슴속 진짜 사랑균 두 가지를 암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개인적 이익을 위해 동료의 희생을 당연시 하고 성공을 위해 비열한 태도가 경쟁력이 되 버린 이균의 가슴에도 러브바이러스의 감염 후 비로소 진실한 사랑을 찾게 되었으니 그 또한 옥택선 만큼 기뻐할 일이었다.

감염을 희망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작품 후반부에서 옥택선이 성교수를 만나 러브 바이러스의 백신 개발을 위해 기꺼이 실험용 쥐 신세가 되는 과정과 이균과의 바이러스가 아닌 진짜 사랑의 시작을 암시하는 장면, 뜻하지 않게 '바이러스 가이드'가 되어 자신처럼 다시 다양한 감염자를 만나 사회적 역할을 마다않는 능동적인 변화들은 분명 같은 <청춘>을 소재로 하면서도 궁극에는 그 불완전함과 현실적인 고뇌, 실존적인 물음 등을 던지고 막을 내렸던 무거운 작품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결말이었지만 몇 개의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작위적인 연출-아이돌 그룹의 리더와 사제지간의 바이러스 가이드가 되는 설정 등-은 자칫 만화적인 설정으로 인식될수 있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나 역시도 앞만 보고 달려온 청춘에 대해 그 치열했던 시행착오를 다시 떠올리면 얼굴이 뜨거워 고개를 들기 민망할 정도이다. 사실 청춘이라는 극한기를 거쳐 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이나 희망 버리기 같은 소극적이고 패배적인 방어기제를 사용하면서 사회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학부모가 되고 중년이 된다. 많은 상처와 미련으로 세상에 속고, 사람에 사랑에 다치다 보니 굳은살의 모양이 그만 얼음같은 외모로 굳어져 버렸던 것은 아닐까.

지금 청춘이든 아니든 이 작품을 접한 독자들은 잊고 지내던 시간들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 처럼 다시 찾아오는 마법의 시간을 경험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내 안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도 될 바이러스 일 것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을 시켜도 좋은 바이러스 일 것이다. 목숨을 위협하거나 완전한 치료가 불가능해도 좋을 것이다. 잠시 활동을 멈췄다가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잠복 감염의 증상을 보여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삶을 청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앞으로 끝없이 살아내는 동안 사랑하며 살 수 밖에 없을 바이러스.

이제, 나에게도 전염되었음을 알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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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해요 2010-06-05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이장욱 외 지음 / 작가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오늘의 소설에 등장하는 7명의 작가들은 책의 이름처럼 2010년 현재를 대표하고 있는 현역소설가인 듯하다. 그들이 이미 한국문단에서 굵직굵직한 문학상을 중복되게 수상하였다는 이력은 둘째치고라도 지극히 일반적인 독자부류에서 보았을 때도 그 이름 두석자를 간간이 접해보았다는 면에서 이른바 세상에 대한 노출 빈도횟수가 높은 작가들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모두다 문단에 주목받으며 좋은 평을 받았지만 우리는 이쯤에서 꼭 그래도 그중에 1등은 누구의 작품인지를 습관처럼 확인하려드는 의식적인 무의식에 살짜기 미안함을 전하며 일곱 편의 작품을 비교적 공평한 애정을 품은 채 <오늘의 소설>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 이장욱 <변희봉>
 요즘 관객들은 변희봉의 대표작을 봉준호 감독의 <괴물>로 알고들 있겠지만 80년대 사춘기를 보낸 내 기억속의 변희봉은 단연 역대 시청률 78%를 자랑했던 <사랑과 진실>이라는 80년대 중반의 김수현 드라마에서 보여준 비밀의 조연이었다. 25년이 지난 내 머릿속에서도 주인공 원미경이나 정애리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남아있던 그의 연기, 그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그로테스크함의 정수 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주인공 원미경의 출생비밀을 알고 있는 고향아저씨로 잊을만하면 원미경의 주변에 나타나 그녀를 불안에 떨게 했던 조연 중에서도 매회 등장하지 않는 단역에 가까운 역할이었다. 그의 캐릭터가 이토록 누가 들어주든 그렇지 않든 오랫동안 불편한 진실을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전달해온 만큼 <변희봉>이라는 작품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혼란스러운 오늘 을 사는 현대인에게 아마도 이름석자로 그 어떤 진실이상의 확연한 메타포를 선사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섣부른 예감을 막연히 느낄 수 있었다.

초등생 시절 지금의 김연아처럼 예쁘고 날씬한 서양선수들이 피겨나 체조경기에 등장해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경쟁을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때 이웃사촌이자 학교선배이자 나의 물주였던 내 사촌언니와 체조 금메달 선수인 코마네치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놓고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기억이 있는데 사촌언니는 소련, 나는 루마니아- 훗날에도 코마네치가 어느 나라사람인지를 심심하면 물어보는 계기가 되었음- 를 내걸고 당시 걸 수 있었던 모든 걸 걸었던 시절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었던가. 그 유명한 10점 만점의 10점 연기의 주인공 코마네치가 소련이 아닌 루마니아 사람이란 것을 의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오지만 사촌언니는 내기에 진 사실에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는지 그 전처럼 나를 예뻐하지도 않았고 성장하면서 더 이상 친해지지 않게되는 계기가 되었던 코마네치 국적내기 사건...이장욱의 변희봉은 어쩌면 내 사촌언니에게 코마네치와도 같지 않았을까.

2009 현대문학상 수상후보작이었던 <고백의 제왕>에서 보여준 '소설 읽는 재미' 를 다시한번 통렬하게 느낄 수 있었고, 배우<변희봉>의 이름이 주는 상징성처럼 <이장욱>이라는 이름이 오늘을 살고 오늘을 파헤치며 오늘을 살고 있는 작가의 대표성을 획득하리라는데 한치의 의심을 가질 수 없는 작품이었다.

- 김숨 <간과 쓸개>·
간혹 단편을 읽을 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소설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들이 떠올라 몰입을 방해할 때가 있고, 반대로 작품 속 주인공이나 상황 속에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는데 <간과 쓸개>는 철저히 후자였다. 화창한 어느 봄날 마주친 노인이 작품을 쓰게 했다는 작가는 홀로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간암환자의 쓸쓸한 일상을 저수지의 검푸른 물빛 처럼 나즈막히 들려준다. 쓸개에 큰 이상이 생겨 자식들의 집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는 구순의 누님을 만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지병인 간암을 하루하루 견뎌낼 수 있는 생의 목표라도 되는 듯 누님과의 재회가 이루어지기까지 노인의 소소한 일상은 그립다 못해 몸서리쳐지기 까지 하다. 마지막 누님과의 외나무 같은 재회에서 마주한 누님의 '뭣 때문에 우는가?' 이 한마디는 참고 참아왔던 노인의 고독함과 서러움을 기어이 터뜨리고 마는 한방의 먹먹함을 선사해준다. 그리고 늙음과 자식을 위해 그래도 희생하였던 부모라는 인정하기 싫은 진실이 훗날 내 모습이 될지 모르는 슬픔과 마침내 겹쳐지며 천천히 숙였던 고개는 다 들지 못한 채로 막을 내린다. 
 
2009년도 현대문학상 후보작중 하나였던 <모일, 저녁>에서 보여주었던 평범한 일상의 소름찾기를 선연히 기억한다. <모일, 저녁>이 피부 바깥으로 오소소 드러나는 소름이었다면 <간과 쓸개>는 조용히 내장을 관통하는 소름이었다.

- 김애란 <벌레들>
서울 변두리 재개발 구역의 낡은 연립주택으로 이사 온 신혼부부의 벌레와의 동거이야기가 온갖 종류의 다양하고 끔찍한 벌레들이 끝내 스물스물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제목이 된 <벌레들>은 실제 소설 속 재개발 현장에서 주거공간으로 침입하는 불청객이기도 하지만, 더 넓게는 하루가 멀다하고 공사가 판을치는 대도시와 그 개발현장 안밖에서 인간성을 서서히 질식시키는 위협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달동네를 밀어내고 들어서는 첨단의 건축물 혹은 그러한 인공물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만삭의 신부가 그러한 온갖 종류의 벌레를 생산해내던 쓰러진 나무를 보면서 거기서 탈출하던 벌레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며 산통을 극렬하게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 몸서리치도록 그 고통의 끝이 아득하기만 한 산통의 현장에 비로소 주인공이 된듯했다.

- 김중혁 <유리의 도시>
유리의 자살 이라는 겉으로는 미학적으로 보이지만 다소 폭력이 내재된 도시형추리소설을 만난듯했다. 도시의 부속품처럼 인식되던 대형유리가 물리적인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떨어져나가 길을 가던 무고한 행인을 살인하게 되고 섬뜻한 생명성을 가지게 된다. 소설은 뭔가 허무한듯 시원스럽지 않지만 주제전달이 명쾌하다. 커다란 반전은 없었지만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작가의 장르적 취향도 엿볼 수 있었다. 2010 젊은 작가상 대상작인 1F/B1를 읽고서도 도시라는 거대파일속에 보이지 않지만 어긋나버린 디스크 조각들을 치밀하게 파일링 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이 끝나고 곁들여진 애니메이션 작가노트를 기억한다. 작가의 홈피를 방문했더니 흡사 신문의 연재만화를 보는 듯 지적인 디자이너였다. 그의 아이디어 창고 속에서 새롭게 탄생될 도시를 기다린다. 프로파일러와도 같은 그를 통해 오늘의 비열하고 차디찬 도심거리에 복수라도 하고 싶어진다.

- 배수아 <무종>
2010 이상 문학상 우수상에도 선정된 작품이다. 작가 자신이 매우 즉흥적으로 써내려간 작품이라 말했듯이 읽는 내내 무의식의 저편을 단절없이 방황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현격하게 호흡이 긴 문장과 의식의 흐름에 따른 배경의 연속적인 등장으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소설 속에서조차 꿈과 현실, 회상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특별한 사건이나 반전, 캐릭터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화자의 사적인 생각의 흐름만으로 글이 전개 되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실제로 얼굴도 모르는 스무명의 사람들과 여행을 준비 중인 다급한 상황에서 작품을 썼다는 작가의 후기를 보니 어렴풋한 이해를 곁들 일 수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방식이-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새로운 스타일을, 독특한 미학적 의미를, 작가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상징한다는 평론의 긍정적인 반응들이  더 진부해보였다. 이제는 좋은 게 좋은 게 아닌, 새로우면 새로운 것인지, 다르면 실험적인 것인지 독자로서 주제넘은 생각도 해보게 된 작품이었다.

- 신경숙 <세상 끝의 신발>
당혹스럽다. 나는 도시인의 고독이나 이중적인 인간상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글들에는 내성이 강한편이나 가족이나 농촌, 특히 전쟁을 겪어내고 살아온 세대와 다음세대와 연결되는 상처들에 대해서는 유난히도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는 편이다. 신경숙은 우리가 상실한 가족이나 공동체의 의미를 가장 따스하게 위로해주는 대표적인 작가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어떤 작은 일상일지라도 그냥 술술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전쟁당시 열여섯, 열다섯이었던 아버지와 낙천 아저씨의 목숨을 주고받은 신발에서부터 어린 시절 친언니처럼 돌봐준 순옥 언니의 가죽부츠, 어른이 된 내가 취재했던 발레리나의 토슈즈와 스케이트 선수의 스케이트 까지 그녀의 이야기는 소복히 쌓여만가는 하얀눈밭을 좇아가며 계속하여 야속한 발자욱을 남기는 일같이 미안하고 아프기만하다. <세상 끝의 신발>이 그렇게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이 들에게 부디 한겨울 털신같은 포근함을 안겨주길 바란다.

- 편혜영 <통조림공장>
2010 이상 문학상 우수상으로도 선정된 작품이다. 2010 젊은 작가상에 빛나는 <저녁의 구애>에서도 예상치 못한 반전에 소름이 돋았고 그 여운이 너무 길었는데 <통조림공장> 역시 한동안 회색빛 문체가 퍼즐처럼 둥둥 떠다니는 듯한 '활자의 표류현상'을 경험했다. 도시의 대량생산과 획일화된 삶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하는 통조림 공장에서의 공장장 '박'의 실종과 '박'의 실종 후에도 변함없는 정형화된 공장의 일상, 노동자들의 무표정과도 같은 행동들이 점차 노동자보다 더 냉담할 것 같은 독자의 가슴에 저마다 반복적인 노크를 해댄다. 처음엔 마치 피 한방울도 없을 것 같은 무감정의 기자가 사실만을 객관화해서 쓴 기사를 읽듯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만 남은 공장장의 실종에서 존재의 불안은 곧 마주한 나의 내면을 끔찍이도 파고들어 결국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감정의 교사상태에 이르고 만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이 음식이 아닌 온갖 실존하는 물건들을 통조림에 넣고 밀봉하듯이 내안에서 도망가지 못하는 작품에 대한 패배감 역시 작가가 제공한 통조림에 조용히 밀봉해 버리고 싶었던 그런 작품이었다.

  9시 뉴스만 매일 시청하여도 소설의 소재는 얻을 수 있다는 어느 작가의 인터뷰를 떠올린다. 소설보다 더 잔인한 현실을 보며 어쩌면 소설 속 세상과 인간의 이야기는 차라리 따스한 난방시스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우리와 같은 공간, 우리와 같은 시간인 오늘을 살아가는 작가들의 오늘의 소설은 이러한 소설보다 더하거나  못한 현실을 견디어 내는 또 하나의 청정 시스템 일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잠시 오늘의 세상과 오늘의 인간을 만나고 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지독하고 어떤 이가 더 형편없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오늘, 오늘을 같이 살아낸다는 것이다. 그가 작가이든 독자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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