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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평가단 ?
이 책을 덮고 자꾸 떠나지 않던 생각이 하나 있었다. 새삼스럽게도 ‘나는 평가단이다’, 라는 자각이었다. 의미가 있었다면 이 책은 나로 하여금 ‘평가단’으로서 서평을 작성해야 한다는 책임과 역할을 환기시켜 주었달까. 즉, 나는 이 책을 러셀을 만나보기 위해 집어든 것이 아니라 평가단 임무수행을 위해 펼쳐든 것이었고 그것은 러셀을 만나고 싶었느냐와 그리하여 만났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러셀을 만났는지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의무감 때문에 나는 며칠 이 책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7기와 8기의 소설평가단을 하면서 해당책의 서평에 부정적인 평가를 한 책은 딱 두 권이다. 한 권은 출판사의 마케팅 방향과 책 내용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론이었고 한 권은 홍보와 달리 세간의 화려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단점때문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번 모두 나름의 내 논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평가단으로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책에 대한 반론으로 귀결된다. 논리의 이면에는 근거나 자료를 제시하여 비록 주관속에서라도 객관을 유지하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 근거나 자료가 없다면 결론을 유추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기라도 해야 한다. 내 맘에 들면 좋은 책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책이라 말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지만 후자를 말할 땐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보다 논리적으로 정리해야 설득력이 생길 터이다. 그런데 이 책은 바로 그 평가라는 오류에 빠질 수 있는, 평가가 함정이 되는 책이었다. 이 책은 평가만 하지 않는다면 글로써 서평이라는 기록을 하지 않는다면 조용히 미소지으며 책꽂이 한 켠에 꽂아 두어도 좋을 책이었다.
나는 ‘평가단’과 일반 ‘서평자’는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지난 두 번의 평가단을 수행하면서 지금에서야 얻은 결론이다. 우선 평가단은 (평가를 하고 싶다는)자발적인 신청에 의해 (평가의 자격을 얻어)선정된 사람들이다. 선정의 기준은 평가단을 선정하는 사람들의 몫이지만 대개 이들은 텍스트의 분석 및 이해력, 문장력이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른바 책좀 읽고 글좀 쓰는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아마도 그렇게 책좀 읽고 글좀 써왔다고 보여지는 사람들이기에 신간의 평가를 맡기는 것일 터이다. 만약 내 생각이 틀린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수행단을 ‘평가단’에서 그냥 ‘서평단’으로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 ‘서평단’으로 칭해준다면 나는 평가를 하고서도 평가한 것에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와 굳이 평가라는 미션에 예민한 이유는 두말없이 내가 ‘평가단’이기 때문이다. 사실 7기와 8기 때는 평가단이라는 미션보다는 성실한(?) 서평자로서 한 권의 책을 통한 서평 한 편에 완성도를 높이는 쪽으로 글을 써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서평이 작품화(?) 되면서 작위적인 문장이 늘고 책을 말하기 보다는 서평자체, 문장과 논리의 완성에만 치중하게 되었고 과다필력의 부작용으로 ‘평가’를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어찌보면 나 자신과 내 글만을 위한 서평여행이었다. 솔직히 글은 얼마든지 써도 정작 평가는 하고 싶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내가 무어라고’ 하는 생각도 있었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그럼 여기서 평가라고 했다고 모두 부정적인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누군가 반론을 한다고 치자. 평가에는 물론 호평도 포함되지만 평가를 하고 그것의 결과를 적을 때는 반드시 호평인지 혹평인지, 아님 모르겠다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평가하고 싶지 않다던지 하는 위치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중요한 임무를 방기한 채 한 권의 책을 내 입장에서 다시 적어보려만 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평가를 한다고 자각한 채 평가를 내려본 적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내겐 이 사실이 땅을 칠만큼 중요했다. 러셀이 이 책을 통해 가르쳐 준 것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를 스스로 밝히는 것이었다. 평가의 오류를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는 이유는 이 책을 말할 때 나는 좋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인데 내가 평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라면 이 책은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만 싶었지 말하거나 그 결과를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읽는 것까지는 긍정할 수 있으나 어떻게 읽었는지 적어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처음으로 깨우쳤다. 이것은 중요하다. 내가 평가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면 이 책을 선택하려는 사람에게 이 책의 좋은 점만 말해 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내 맘에 안들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몇가지 이 책의 좋은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내 서평을 우연히 읽었다면 그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내 평가는 누군가의 우연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러니까, 까놓고 이야기하면 이 책은 어쩌다가 평가단에게 평가 받아야 할 불운을 안고 가는 경우인 듯하다. 이 책은 스페셜하게도 러셀의 책에서 베스트만 발췌한 명언집이다. 가만보면 콜렉션의 소장 유무는 평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미 확실하고도 훌륭한 평가를 받은 사람에 한해 행해지는 작업이고 콜렉션 자체가 마케팅을 소구하는 작품이니 책의 구성이나 편집이 허술하다고 하는 것은 넌센스일지 모른다. 단지 아쉬운 게 있다면 내가 러셀의 책을 단 한권이라도 독파를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인데 (이렇듯 평가자격이 없는데도 불구)그렇더라도 나는 이 책에 딴지를 걸 수 있는 자격을 이미 얻었다. (조용필 베스트, 조수미 베스트를 받았는데 조용필, 조수미를 모른다고 베스트에 딴지를 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니 나에게 이 책이 안좋았다고 하는 것의 의미는 오로지 평가의무에만 귀속되는 일일뿐이라는 것이 나로서는 영 기분좋지가 않은 책인 것이다. 한마디로 심사위원 자격도 안되면서 (심사위원이니까)점수 매기는 부끄럽고 속터지는 기분이다. 그러므로 이번 책에 대한 서평은 평가를 위한 평가임을 먼저 밝혀둔다.
이 책은 러셀의 책?
먼저, 나는 이 책을 통해 러셀을 만나지는 못했다. 스쳐 지나갔다고 해야 맞을 듯 하다. 가장 큰 원인은 러셀을 알기에 이 책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알았다고 여기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어떤 이는 그런대로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과연 어떤 부분이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 질문한다면 무어라 답할지 궁금하다. 이 책의 편집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러셀을 더 알고 싶다’ 정도의 대답이 나온다면 다행이지 싶다.
중요한건 <버트런드 러셀의 베스트>가 러셀이 죽고 나서 편집자의 임의에 의해 모아진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스트를 택하는데 있어 러셀은 검수를 했다. 최종원고를 검토하고 몇주 뒤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니 말이다. 7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자신의 책중에(이 책에서 발췌한 책은 40여 권이라지만)특정한 문장을 발췌하여 여섯 개의 하부 주제(정치, 심리, 종교, 교육, 성과 결혼, 윤리)아래 위치시키는 일(의 교정)을 98세에 한 것이다. 이러한 구분과 베스트 선정으로 새로운 책이 탄생하는 것을 그가 원하였는지, 구성과 방향이 그의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편집자의 작업에 최종동의를 한 것이다. 이 책을 마지막으로 러셀은 더 이상 원고를 수정한 적이 없다. 가수로 치면 칠십 주년 기념 골든 베스트 앨범작업(의 프로듀싱)을 막 마치고 얼마 후 사망한 것과 같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소장가치가 있으며 유작으로서 러셀의 일생과 학자로서의 업적을 정리하는데 의미있는 시간을 제공할 터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책이 의도한 의미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는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그 베스트로 선정된 본문의 무책임함이었다. 손가락으로 일일이 세어보니 한 개의 세부주제 하에 최소 서른 개에서 오십여 개의 발췌문이 나열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마지막 ‘윤리’의 장에는 가장 많은 육십 여개의 문단이 구성되었다. 나는 한 개의 장에서 약 열 번 이상은 독서의 흐름이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전후 맥락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선택된 문장이 구성상 서론인지 결론인지, 어떤 주장의 반론인지 동감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략 다섯 줄에서 열줄 정도 되는 한 개의 문단을 뚫어져라 정독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더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이 문단이 노벨상 수상 연설문에 속한 것인지 철학책에 있는 것인지 그게 다였다. (제목옆에 출간연도라도 표기했다면 시대를 가늠해보기라도 했을텐데, 이건 인용문의 기본적 태도가 아니다. 러셀이 평생동안 한말일까? 살면서 한번도 변하지 않은 생각일까? 현역으로 활동한 기간이 길었던 만큼 어느 시기, 어떤 시국에 출간된 책인지 정도는 인지하면서 흐름을 읽는 것이 중요한 일 아닐까? 맨 뒷편에 참고문헌처럼 연도를 표시해 준 것은 확인하고 싶으면 앞뒤 넘겨가면서 보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 그런데 나중엔 책의 제목도 큰 의미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문체의 톤이 풍자의 뉘앙스를 가진 사설조였기에 러셀이 논리를 주장하는 방식, 결론을 맺는 습관정도에만 익숙해졌을 뿐이다. 선정된 글의 순서에 어떠한 의도가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특별히 그 부분을 싹뚝 잘라내어 이곳에 같다 붙인 이유도 와닿지 않았고 나중엔 크게 구분된 상위주제가 변별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특히 마지막 장 ‘윤리’에 해당되는 발췌문은 내용상 ‘종교’와 큰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것은 완성본 없는 싯구절의 향연이 아니다. 무차별하게 배치되어 있던 이 랜덤의 규칙안에서 나는 꼼짝없이 숨막히는 시간을 보냈다. 전체적으로 사색을 방해하는 구조, 생각의 확산을 저지하는 구성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발췌문의 앞뒤를 장식하던 ‘편집자의 여는 글’과 ‘해설자의 닫는 글’도 내용상 열고 닫는 의미를 느낄 수는 없었다. 하나로 합쳐도 더 깔끔하고 잘 정리되어 보였을 것이다. 아니면 열고 닫는 글을 이 책의 가이드라고 보고 발췌된 문단을 다시 소주제로 나누어 편집자가 중간의 대화를 이끌어가는 방식으로 일관된 사유를 유도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한편의 시를 조각조각 분해해 해석하며 평을 덧붙이는 방식의 평론도 하나의 대안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다듬은 것처럼 보이도록 앞뒤에 프레임을 배치시켜놓고 완전 발췌문은 산발적인 자유 랜덤플레이로 방치한 것이 아닐지. 비편집자인 출판의 문외한인 나로서도 이 책은 아직 원고단계였다는 생각,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기왕에 러셀이 말하려 했던 모든 것을 친절하게 여섯 개의 주제로 나누었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전달하려 했다면 좀 더 독자를 배려해야 하지 않았을까.(나처럼 러셀의 책을 한권도 제대로 안 읽어본 사람에게도) 아주 최상의 재료들을 일렬로 나열해 놓고 아직 요리를 하지 않은 상태라는 느낌을 받은 건 나만의 결론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끝내 러셀을 만나보지 못하고 볼듯 말듯 잠시 스쳐지나간 쪽에 속한다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스침의 느낌이 좋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이 책은 러셀과 그의 다른 책을 말하지 않고서는 독립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기 힘든 책이다. 아쉽게도 단일본으로서는 책의 의미를 가치있게 백프로 구현하지 못한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이번 러셀 베스트가 책으로서 가치에 부합하여야 하는가는 이미 이 책의 원고가 러셀의 본문이기에 중요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러셀은 이미 충분히 가치있는 저자이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러셀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러셀의 책으로서 가치를 전달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러셀을 말하는 방법적인 문제이니 결국 책이 구성되는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리게 되고 결과적으로 러셀을 말하려다 말 못하거나 안하느니 못한 상황이 된 것 같다. 그러니 이 책은 러셀이 집필한 내용만으로 책을 만들었으나 러셀의 책은 아닌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쉽다. 나는 러셀의 모든 작품이 이런 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책 한 권만을 본다면 러셀의 논리는 심오하다기 보다는 퍽이나 유머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구성하는 발췌문들은 러셀이 말하는 ‘상당히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라 (의도적으로)여성노동자를 포함한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만 선정된 듯하다. 나는 원래 어려우라고 하면 누구보다 어렵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지만 진지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당신들을 위해 쉽게 쓰는 것이다, 라는 러셀의 지적우월감은 이글로만 러셀을 만나는 입장에선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기껏 대중적인 글을 발췌하여 대중을 설득하려했던 그의 노력을 알리고자 했건만 정작 대중인 내가 잘난척 하는 태도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는 책을 읽으며 나같은 사람이 이 책의 주요타겟군이라고 느꼈으니 말이다. 기왕이면 (편집자의 판단에)어렵다고 생각되는 글도 발췌하여 비교해볼 수 있었으면 어떨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문제이니 롤러코스터를 타듯 현격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 러셀을 더 존경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교육’을 말하는 러셀은 세익스피어를 조각조각 암기하게 하는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현학적이고 따분하게 생각하게 되고 결국 학교교육이 세익스피어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한다는 따끔한 질타를 하고 있다. 꼭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러셀의 조각조각을 확인했더니 우리네 지식인과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무지막지한 착각을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같이 단 오분이라도 러셀과 만나서 눈맞춤이라도 하고 싶은, 그리하여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앞으로의 더 깊은 성찰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여간 실망스러운게 아니다. 대체 어느 문장을 보고 러셀의 이전 책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 이미 러셀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만남이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미 러셀을 독파하고 그의 뜻을 충분히 학습한 사람들은 과연 이 책이 필요할까? (필요보다는 기념이 가깝지 않을런지)
그래도 러셀처럼 !
하지만, 이 책이 가진 가치성과 필요성에 대한 치명적인 단점을 제외하면(?) 그 스쳐가는 느낌속에서도 공감과 끄덕임이 없지는 않았다. 가장 공감한 글은 ‘종교’를 말하는 부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합리적이고 납득할 만한 근거가 없을 경우 어떠한 것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러셀은 열다섯 살 이후로 기독교를 믿지 않아왔고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믿지 않는지를 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했다. 내 보기에 러셀은 평생을 자신의 이유를 말하는데 소진했다는 생각이다. 기독교를 믿지 않게 된 이유는 곧 종교에 대한 신랄한 반론을 뜻했다. 나 역시 종교는 ‘절대성’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성’의 문제라는 생각을 가진지 오래다. 종교가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선택하면 된다는 주의다. (그러므로 종교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종교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종교가 가진 아이러니다. 종교마저 절대적이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 삶에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러셀은 종교의 절대성을 냉철하게 해체시키고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서구세계에서의 교회가 가지는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가 개념을 정의한 문장중에 가장 반가웠던 건 ‘신념’을 말할 때였다. 러셀은 ‘신념’은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정의했다. 어느 누구도 증거가 있는 것을 ‘신념’이라고 부르지 않으므로 신념이 해롭다는 것. 너무나 맞는 말이라 흠칫하면서도 짜릿했다. 이 연장선상에서 ‘신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을 때 사람들은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중거가 없으니 믿게된다는 논리가 신선했고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꿰뚫고 직시한 결과라는 생각이다. 러셀은 종교적 신앙에의 열망을 ‘두려움’이라는 인간본성으로 이해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낙관적인 신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두려움에 호소하여 두려움을 인간운용의 방편으로 삼은 종교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러셀은 신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이루는 것은 바로 ‘과학적 진실성’이었고 사고의 기초를 관찰과 추론에 두는 습성으로 세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가 이성의 힘을 신뢰한 철학자였다는 것은 이 책을 이루는 수많은 발췌문의 반복되는 논리형식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는 있었다. 이성理性은 ‘reason’이다. ‘reason’은 ‘이유’나 ‘근거’를 의미하기도 한다. 러셀은 이성적인 사람이므로 ‘이유와 근거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발췌문은 독특한 주장을 한 후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하고 자신만의 통찰력으로 문제를 매듭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리함에 추가된 것이 있다면 어른된 이성을 꼬집는 아이의 감수성이다.
우리의 도덕 체계는 금기로 가득 차 있다. 가장 존엄한 사항들과 관련해서도 갖가지 금기가 있다. 오늘날 죄악으로 분명히 인정되고 있지만 나는 한 번도 범하지 않은 죄가 있다. 성서에 이르기를 “네 이웃의 소를 탐내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웃의 소를 탐낸 적이 없다. 241p
나는 이 문장의 마지막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웃다가 결국은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러셀에 의하면 법률을 어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문장을 보면 꼭 나는 도둑질 하지 않았으니 죄인이 아니라는 사기꾼이 생각난다. 그리고 남의 것을 욕심내어 본 적이 없다는 자신의 철학을 성서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들어 재치있게 비유한 그의 감수성이 순진한 남자아이의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유일하게 나를 웃게 한 글이고 그로써 이 책에 가졌던 반감이 누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이 책은 많은 걸 감안해야 하는 책이다. 가장 아쉬운 건 러셀의 ‘논리적 사유’를 만나는데 이해가 아닌 감상의 차원에 그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러셀이 이런 말도 했다는 자료나 증거, 인용의 문장으로서는 충분할 수 있겠다. 이 책을 통해 그나마 전체 내용이 궁금해진건 <버트런드 러셀이 자신의 마음을 말하다. 1960>정도 였다. 발췌문은 에세이와 인문서적이 섞여있었지만 대부분 에세이로 느껴졌던 영향이 컸다. 마지막으로 러셀이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피력하는 글이 아닌, 세상을 향해 떠오르는 생각을 편안하게 읊조린다는 생각이 들었던 글을 옮겨 적어본다. 일백년 가까이 살았던 한 철학자가 노년에 말하는 행복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고요한 울림을 전해준다. 그 치열했던 인생속에서 탄생한 마지막 통찰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었다는 점이 숙연해진다. 어쩐지 ‘나는 이웃의 소를 탐한 적이 없다’는 말과도 통한다고 느껴진다. 나도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있게 이웃의 소를 탐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러셀의 모두를 혹은 일부라도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말한 행복만은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가 행복을 말하는 방법, 그리고 행복의 본질 그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 결국 그 역시 모두가 행복하고 똑똑하게 살아보자고 그 많던 고민을 해온 것이 아니겠는가.
이따금 나는 환상 속에서 모든 인간이 행복하고 원기왕성하고 똑똑하며 억압하는 자도 억압받는 자도 없는 세상을 본다. 모든 사람들이 공동의 이익이 서로 경쟁하는 개별적 이익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지력과 상상력을 통해 실현가능한 위대한 잠재력을 현실화하기 위해 분투하는 세상. 인류는 한 가족이기에 모두가 행복을 맞거나 모두가 불행을 맞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다수 대중의 고통에 기생해서 소수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런 시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런 시대를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의 행복을 시샘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버트런드 러셀이 자신의 마음을 말하다. 1960> 24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