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
쇠에 녹이 슨 색을 녹색으로 알았다.
그래서 자꾸만 갈색을 녹색이라고 불렀다.
엄마가 녹색은 초록색이라고 해도
나는 갈색을 녹색으로 믿었다.
아직도 그렇게 착각할 때가 있다.”
<착각, 배지훈 시집 '시를 쓰는 아이'에서>
저는 어렸을 때 ‘파랗다’와 ‘푸르다’가 알쏭달쏭했어요. 어렸을 때 많이 불렀던 노래 있잖아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그래서 ‘푸르다’는 ‘하늘빛’이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상했죠. 하늘은 파란데? 말집(사전)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나와요.
*파랗다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새싹과 같이 밝고 선명하게 푸르다.
*푸르다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풀의 빛깔과 같이 밝고 선명하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파랗다’는 ‘푸르다’로 풀이하고, ‘푸르다’는 또 ‘깊은 바다 빛깔’이라고 해요. 새싹이 파란가요? 새싹은 푸르죠. 깊은 바다가 푸른가요? 깊은 바다는 ‘새파랗다’ 아니면 ‘시퍼렇다’라고 해야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말인데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예요. 간혹 푸켓이나 제주도에 푸른빛 바다가 있기도 하죠. 하지만, 흔한 바다빛깔은 파랗거나 새파래요. 푸른 하늘도 있긴 해요. 지구 극쪽에 오로라 현상에서는 가끔 볼 수 있죠. 그래도 우리가 흔히 보는 하늘빛깔은 파랗거나 하늘빛이예요. 푸른 숲, 푸른 나무, 푸른 풀이고, 파란 하늘, 파란 바다예요.
어느 날 네 살 딸아이가 물어봐요.
“아빠, 이건 무슨 색이야?”
“응, 이건 초록색이야.”
지금까지 썼던 말이예요. 학교에서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로 칠하면서 썼던 말들이죠. 문득 아이가 물어본 말과 위 시가 떠오르면서 ‘색(色)’이 우리말일까 싶었어요. 우리말 이끄미 최종규님께 전자편지도 보내고, 둘레 이야기도 모아봤지요. 답장을 받고 깨달았어요. 색(色)도 우리말이 아니구나. 그래서 몇 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차근차근 ‘색(色)’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먼저 ‘색’을 말집(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나와요.
색(色)
(1)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사물의 밝고 어두움이나 빨강, 파랑, 노랑 따위의 물리적 현상 → 화려한 색 / 색이 선명한 옷감
(2) 같은 부류가 가지고 있는 동질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말 → 그 사람은 보통 사람과는 색이 다르다
(3) 색정이나 여색, 색사(色事) 따위를 뜻하는 말 → 색에 빠지다
(4) [불교] 물질적인 형체가 있는 모든 존재
(5)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색깔’의 뜻을 나타내는 말 → 딸기색 / 바이올렛색
여기서 뜻은 (1)이겠죠. 색(色)은 ‘빛’에서 나온 말이예요. 중국글자말로 ‘빛-색’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색(色)은 우리말로 ‘빛’이라고 해야겠죠.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해가 뜨면서 빛이 반사되서 보이는거예요. 빨간색, 무슨 색깔이야? 이런 말들은 다 우리말이 아닌거죠. 색연필, 색종이, 색도화지, 색실 이런 말들도 빛연필, 빛종이, 빛도화지, 빛실 이렇게 써야돼요. ‘이런 말까지 바꿔야 돼?’하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먼저 바로 알고 써야할 것 같아요. 어찌보면 어른들 머리에만 자리잡힌 말이지 않을까요? 빛에서 나온 말들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아요.
ㄱ. 빛
- 우리가 볼 수 있게 하는 ‘전자기파’를 말하죠. 해에서 나와요.
ㄴ. 빛깔
- 빛을 받으면서 드러나는 알록달록한 모습을 말해요. ~깔은 모습, 상태, 바탕(꼴)을 뜻해요. 맛깔, 때깔이라는 말도 있죠.
ㄷ. 빛살
- 빛이 흐르는 줄기를 뜻해요. 화살, 물살, 햇살이라는 말도 아시죠?
*이 꽃은 무슨 색깔이야? → 이 꽃은 무슨 빛깔이야?
*색연필, 색종이, 색도화지, 색실 → 빛연필, 빛종이, 빛도화지, 빛실
이렇게 써야겠어요. 그럼 우리가 쓰는 빛깔은 무엇이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어떻게 빛깔을 알려줘야 할까요? 빨주노초파남보! 이 말은 맞는 말일까? 너무 궁금하고 답답했어요. 이 궁금증도 이끄미님이 풀어주셨어요. 찾아보니 우리나라는 KS(한국산업규격)에서 색표시법으로 먼셀 표색계를 채택하고 있더라구요. 다음 열 가지 빛깔을 보여줘요.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빨강, 주황, 노랑, 연두, 녹색, 청록, 파랑, 남색, 보라, 자주
여기서 우리말은 무엇일까요?
빨강, 노랑, 파랑, 보라는 우리말이예요. ‘빨강’도 말집을 찾아보면 ‘빨간 빛깔’로 나와있어요. 그러니 다음과 같이 써야 겠죠.
*이 꽃은 빨간색이야. → 이 꽃은 빨간 빛깔이야. (또는 이 꽃은 빨강이야. 앵두빛이야.)
주황(朱黃)은 붉을주, 누를황으로 ‘붉고 노란 빛깔’이라는 중국글자말이예요. 연두(軟豆)는 연할연, 콩두로 ‘연한 콩 빛깔’을 뜻하지요. 녹색(綠色)은 풀빛녹, 빛색으로 ‘풀 빛깔’을 뜻해요. 청록(靑綠)은 푸를청, 풀빛록으로 ‘푸르고 풀빛이 나는 빛깔’을 말하죠. 남색(藍色)은 쪽람, 빛색으로 ‘쪽 빛깔’을 뜻하구요. 자주(紫朱)는 자주빛자, 붉을주로 ‘자주빛깔’을 말해요.
아이들에게 이 빛깔들은 어떻게 말해주면 좋을까요?
*빨강, 노랑, 파랑, 보라, 하양은 그대로 쓰구요.
*주황(朱黃) → 감빛
*연두(軟豆) → 옅은 풀빛
*녹색(綠色) → 풀빛
*청록(靑綠) → 짙은 풀빛
*남색(藍色) → 쪽빛 또는 짙은 파랑
*자주(紫朱) → 자주빛
더 생각해볼 것은 이런 빛깔을 우리 아이들은(저도 그렇구요) 책이나 수업시간, 물감과 크레파스에서만 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런 색상환에 얽매여 있는거죠. 얼마든지 숲에서 꽃에서 여러 빛깔을 찾을 수 있다고 봐요. 감빛이 귤빛이 될 수 있고, 동자꽃빛이 될 수도 있겠죠. 감빛도 이 감나무 빛깔과 저 감나무 빛깔이 모두 다르구요. 미술시간 교실을 떠나 숲과 나무를 찾아 저마다 다른 빛깔을 찾아보는 일도 참 좋겠어요.
(2015.04.26. 민들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