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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하여 ㅣ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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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3년째 코로나 팬데믹이 계속되면서 일상이 무너져 버렸다. 이제 슬슬 일상으로의 복귀가 점쳐지고 있지만, 아직도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예상대로 코로나 시절을 다룬 소설이 나왔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율리 체 작가의 책이라 더더욱 반가웠다. 다 읽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동안에 다른 책들을 집적거리느라 그랬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소설 <인간에 대하여>의 주인공 도라 코르프마허는 금년 36세의 성공한 시니어 광고 카피라이터다. 그녀는 봉쇄령이 떨어져 모든 것이 마비된 베를린에서 지금 막 브란덴부르크의 시골 마을 브라켄으로 망명한 서울쥐다. 아, 그리고 기후전문가에서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해서 전염병 생태전문가로 변신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애인 로베르트로부터 도주한 신세기도 하다.
뮌스터 출신으로 함부르크와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서 생활한 그녀가 농장 관리인의 저택을 사서 씨감자를 심으려고 한다. 비슷한 처지의 내가 그녀라면 농삿일을 배워서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독일에서도 서울쥐를 시골쥐들은 그렇게 탐탁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 대표주자 중의 한 명이 바로 이웃집 나치 고테 프로크슈였다.
AfD에게 투표하고, 공식적으로 금지된 나치 당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대는 고테를 좌파 자유주의자인 도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율리 체 작가는 좀 진부한 설정이긴 하지만, 도라와 고테라는 두 이질적인 인간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서사를 조금씩 전개해 나가기 시작한다.
확실히 브라켄 마을의 삶은 대도시 베를린의 그것과는 다르다. 작은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지기 위해서는 개인의 지난한 노력과 무언가 획기적인 계기 그리고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율리 체 작가는 도시 깍쟁이에서 우직한 시골 농부로 그리고 이웃의 나치마저도 포용할 수 있는 그런 캐릭터로 조금씩 진화해하는 도라라는 멋진 캐릭터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나도 도라처럼 모든 것과 그리고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과 평화로운 공존을 원한다. 그리고 소설 <인간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누구나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며, 실존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타인에게 그런 우월감을 투영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됐다. 사실 나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이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동안 유지해온 삶의 방식이나 원칙을 바꾸어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악취를 풍기며, 외국인에 대한 격렬한 혐오를 스스럼없이 내보이고, 동성애 커플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브라켄 마을의 또라이 고테에게 접근하는 일은 좌파 자유주의자 도라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싶을 정도다. 어쩌면 이런 복잡다단한 세상 풍파에 대한 단상과 성찰은 저자 율리 체가 브란덴부르크주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복무하면서 얻게 된 성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시 한 번 평화로운 공존이 얼마나 쉽지 않은 미션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율리 체 저자는 고테와 도라라는 상극의 인물들을 전면에 배치한 다음, 소설의 다양성을 위해 조연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에 투입한다. 교아종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고테를 돕는 역할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죽음 이래 소원했던 아버지 요요 박사를 브라켄으로 소환하기도 한다. 자신과는 달리 엄격한 규칙 아래, 독일 중산층 시민의 전형의 모습을 보여 주는 인물로 바로 요요 박사다. 결국 직장에서 해고 통지를 받은 도라에게 경제적 도움과 의료적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적격의 캐스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보니 코로나 시국의 실업이라는 심각한 문제도 등장했구나. 코로나는 개인의 삶 뿐 아니라 기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능력을 인정받은 중견 광고 카피라이터인 도라도 먹고사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고테를 돌보기 위해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은 비싼 약들을 사고, 식료품과 담배를 사다가 결제 실패 위기에 봉착한 도라의 모습은 소비를 위한 수입의 원천인 직장으로부터 배제된 해고가 전달하는 위기의 단면을 그대로 전달한다. 하르츠IV로 당장 직장이 없어져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복지국가 독일의 모습도 이러할진대, 다른 나라들의 상황은 또 어떨까 싶다.
코로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국 단위 봉쇄령을 내린 베를린 중앙정부와 브란덴부르크 시골의 브라켄 마을에 사는 이들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점도 율리 체 작가는 미세하게 지적한다. 시골쥐들의 기본 마인드는 이렇다. 너희 서울쥐들이 뭘 안다고 우리네 삶을 이렇게 옥죄고 강제하는 거야? 물론 이 소설 한 편으로 그네들의 삶의 간극들을 모두 알 수는 없겠지만, 상충하는 갈등의 면면들이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연쇄 그릴러 고테의 마지막을 위해 우리로 치면 마을잔치격인 파티를 열어 사람들이 모여 그간의 오해를 털고, 부어스트를 굽고 맥주를 들이켜는 장면에서는 도저히 서울쥐에게서는 엿볼 수 있는 없는 연대감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서로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해소한다는 판타지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사실 한 존재가 자신의 불안을 덜어내기 위해, 타인을 핍박하고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연쇄 그릴러 고테처럼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일종의 피해의식의 발로라고 한다면 또 그것도 이해할 만하지 않을까.
나와 다른 모든 것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시절이 도래했다. 그래도 작은 희망에 갖게 해주는 율리 체의 <인간에 대하여>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적당한 타협, 내려놓기, 그것도 아니라면 외면이라도. 율리 체는 하이데거를 인용해서 존재란 불안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요즘처럼 해소되지 않는 불안의 시대에 맞는 말이지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