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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 시게루의 라바울 전기 -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미즈키 시게루의 귀중한 라바울 전투 체험담 ㅣ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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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자 야마오카 소하치 씨가 쓴 <태평양전쟁>이라는 그야말로 희한한 책을(그것도 5권이나!) 읽은 적이 있다. 아마 저자는 종군기자였던 것 같은데, 남양군도에 전개해서 미군과 싸우다가 개죽음을 당한 일본군을 황군이라 부르며 그야말로 찬양으로 가득한 그런 내용이었다. 야마오카 씨는 그가 그토록 찬양하던 황군이 남양군도의 각처에서 저지른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래 시간이 흐른 뒤, 몇 년 전에 그가 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으면서도 그런 이유로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극우작가 야마오카 씨가 맨 오른쪽에 가 있다면, 진짜 전장에서 자신의 한쪽팔을 잃고서도 저명한 만화가로 활약한 미즈키 시게루는 자신이 직접 전장에서 체험한 사건들을 일체의 미화 없이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돗토리 부대의 일원으로 이미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일본군의 거대 기지가 있었던 뉴브리튼 섬의 라바울에 미즈키 씨는 파병됐다. 구타가 일상화되었던 구식 일본 군대에서 몽상가로 보이는 미즈키 씨는 그야말로 구타의 아주 적절한 타겟이 아니었을까. 농땡이를 피운다운 이유로 게다짝을 맞질 않나, 20-30분의 연속 따귀 세례는 아예 기본이었다. 오죽 했으면 스스로를 “따귀의 왕자”라고 했을까. 더 웃기는 건 그렇게 자신을 두들겨 팬 선임병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했다고 한다. 이런 똥군기와 정신무장을 강조하는 건 비단 구식 일본군만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 것이다.
그들이 상대하는 미군들은 잘 보급된 식사와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최신 무기와 무진장한 탄약으로 무장했기에 일본군들이 비아냥거리던 개판 같은 군기에도 자신들을 압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미즈키 씨는 그야말로 뱃속에 거지가 들어 앉았는지 오로지 라바울 현지에서 먹거리에만 관심을 가졌다.
솔저 보이(토인)들과 안면을 트고 마을을 다니면서 자신이 가진 담배와 현지의 싱싱한 과일과 야채들을 원없이 먹었다고 했던가. 그에 비하면 정규 일본군이 보급하는 부식과 먹을 것들은 너무나 부실했다. 심지어 그가 우연히 만난 해군들의 보급 상태는 육군의 그것에 비해 월등했다. 하긴 일본 육군과 해군의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이었던가. 조슈파와 사쓰마파로 나뉘어진 구 일본 군대 내의 첨예한 다툼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해왔다. 아울러 군대 전체의 기율에 반하는 하극상도 일상 가운데 하나였다.
미즈키 씨가 전하는 라바울의 실상 가운데 충격적이었던 점 중의 하나는 현지에서 보급투쟁에 나섰다가 밀림에 사는 악어밥이 된 병사들도 다수 있었다는 점이다. 악어는 일단 먹이를 잡아 부패시킨 뒤 먹는 습성이 있다고 했던가. 그래서 악어에게 반쯤 뜯어 먹힌 시신이 떠내려 오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이 남양군도에 수행한 전쟁 자체가 넌센스였지만, 현지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는 사실이 참 그랬다.
일본군의 상식에 반하는 작전은 적전 상륙이라는 이름 아래, 치러지기도 했다. 사실 라바울에 주둔한 10만에 가까운 일본군을 소탕하는 문제는 당신 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미국과 호주에도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고립된 라바울이 전략적 가치를 상실했다고 판단한 연합군 전쟁 지휘부에서는 라바울을 건너뛰고, 다른 지역을 공략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아마 그래서 과달카날이나 팔라우 혹은 필리핀 전역에 비해 라바울에서 생환한 병사들이 많았던 게 아닐까 싶다.
우리의 미즈키 씨는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결국 왼쪽 팔을 잃게 되었다. 상이용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에 대한 구타나 노역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전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게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구사일생으로 어느 순간 적으로 돌변한 솔저 보이들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난 미즈키 씨는 라바울에서 종전을 맞이하고, 토마로 가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본국으로 귀환했다.
토마에서 포로 생활 시절, 미즈키 씨는 현지 제대할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그는 확실히 현지인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다른 일본군과는 다른 성향의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자신을 돌보아 준 군의관의 설득으로 귀환선에 올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토마에서 어렵게 구한 종이와 연필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그림들을 그렸다. 그리고 나중에 일본에 돌아와서도 당장 먹고 살기에도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라바울 시절을 회상하며 기록을 남겼고, 그 기록들이 모여서 <라바울 전기>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미즈키 씨는 태생적으로 특유의 낙천가였는지 <라바울 전기>를 통해서는 비관적인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림 그리는 만화가로 한쪽 팔이 없다는 건 작화에 치명적인 결함일 텐데, 후회나 통한 같은 부분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 점이 신기하기도 했다. 하긴 만성적 말라리아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남양군도에서 생환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 않았을까.
미즈키 시게루 씨가 <라바울 전기>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도 모른 채, 타지에서 어이 없이 죽어간 그리고 학대 받은 병사들에 위해서라도 전쟁의 비극은 없어야 한다. 지금도 지구촌의 어딘가에서 대화나 타협 대신 폭력적 방식에 호소하는 전쟁이 진행 중이다. 부디 무의미한 갈등이 종식되고, 평화의 시간들이 도래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