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매튜 본, 2015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가 어떻게 재미있는지, 혹은 얼마나 글래머러스한 영화인지를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영화 속 소품들의 럭셔리함이나, 킹스맨 요원 해리 역을 맡은 콜린 퍼스의 수트빨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다만 나는 영화 속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에 대해 그저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예를 들어 영화 속에 등장했던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와 같은 대사들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대사는 영화에서 두 번 나온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 영화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해리(콜린 퍼스)의 교회 씬이다. 해리가 악당 발렌타인(사무엘 L. 잭슨)의 계략에 빠져 교회 안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인 후 어느 틈에 정신을 차리고 교회 밖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발렌타인이 그에게 총을 쏘기 전에 그에게 빈정대면서 이 말을 건넨다. "현실은 영화와 달라." 두 번째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이다. 주인공 에그시(태론 에거튼)가 발렌타인의 경호원 가젤(소피아 부텔라)과의 최후의 일전을 벌이며 그녀를 제거한 후, 악당 발렌타인을 처치하기 직전, 발렌타인은 이게 영화라면 원래 이쯤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악당에게 하는 대사가 있지 않느냐고 이죽거린다(이 영화에서는 '영화'라는 매체 혹은 다른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 편인데, 예를 들어 악당 발렌타인은 그 언급의 빈번함으로 볼 때 스파이 영화 애호가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듯 하며, 해리가 에그시를 요원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프리티 우먼>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이 영화가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 이렇게 '영화'라는 것이 언급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때 에그시는 발렌타인에게 그 대사를 되돌려준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그리고 발렌타인도 그 대사에 수긍한다.

 

위에서 언급한 광란의 살육 축제(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사실 이보다 적당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가 벌어지는 교회에서의 씬은 어떤 액션의 구성이나, 카메라 워크, 혹은 씬 전체의 흐름 같은 부분에서, 많이 언급되었듯이 분명히 매우 인상적이며, 매혹적이다. 그러나 사실 내용적으로 보자면 조금 관객을 뜨악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흔한 말로 이를 일종의 반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이는 주체가 지금까지 영화의 전반부에서 선(善)의 편에 선 좋은 멘토 해리이기 때문이며,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비록 약간의 극단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죽을 이유는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선한 인물이 무고한 사람을 (그것도 대량으로) 살상한다는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 선한 인물이 어떤 계기로 인해(그것이 선한 인물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라도) 돌변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이전에 어떤 암시가 주어지거나, 혹은 그 장면의 처리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 가장 유쾌하게 묘사된 씬 중에 하나는 이 씬이다. 이 장면은 화려하고 즐거운 무엇처럼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 뒤에 발렌타인의 부기가 따른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즉 간단히 말해서 이 씬은 일종의 영화적 규약, 혹은 믿음을 무너뜨린다. 선한 이는 선한 이를 해치지 않는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물론 선한 이가 돌변하여 선한 이를 해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때에는 물론 그를 더 이상 '선한 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는 조금 다른 것이 이 장면이 이어진 후에도 해리는 여전히 선한 인물로 남으며, 영화적 서사흐름은 이 씬으로 전혀 깨지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배가된다. 다시 말해서 이 씬이 건드리는 것은 인물이나 서사가 아니라, 어떤 '영화적 규약' 혹은 '영화'라는 것에 대해 물음이다. 즉 발렌타인이 이 때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말할 때, 그것의 방점은 '영화'보다 '현실'에 찍혀 있으며, 발렌타인은 '이제 그런 것은 더 이상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해리의 세계, 즉 이 교회 씬 이전까지 이 영화의 기본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 즉 수트, 각종 소품, 매너, 느끼함, 단정함, 매력적인 여자, 신사, 예의, 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대의를 위한 희생과 같은 것들이다. 이는 단지 이 영화에 국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 언급하였듯이 발렌타인은 스파이 영화의 광팬이며,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스파이 영화란 다니엘 크레이그 이전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대변되는 그런 스파이 영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발렌타인이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할 때, 이는 이런 스파이 영화는 이제 더 이상 '현실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며(왜냐하면 결국 발렌타인도 영화 속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스파이 영화는 이제 다니엘 크레이그 같은 피로한 노동자 유형의 007이 등장하거나, 제이슨 본과 같은 보다 현실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이 물론 실제의 스파이 영화의 흐름에서 생겨난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운 타입의 007, 혹은 제이슨 본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는 기존 스파이 영화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으며, 이러한 류의 영화들은 항상 이것이 '리얼' 즉 현실임을 강조하며 기존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에 질린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세상일이 늘 그렇듯이 반동은 반동을 불러오며, 첨단은 복고를 낳는다. 이 영화 <킹스맨>은 이런 반동의 흐름에 다시 반동을 꾀하는 영화다. 발렌타인이 영화의 중간에 '이러한 것은 이제 영화가 아니야. 현실은 달라'라며 기존의 스파이 영화들에 영화적인 죽음을 선고할 때, 다시 그 발렌타인에게 죽음을 선고하며, '아니 그렇게 말하는 너도 영화잖아. 결국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처음 발렌타인이 해리에게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라고 말할 때 그 방점이 '현실'에 찍혀 있다면, 두 번째 에그시가 발렌타인에게 그 말을 건넬 때에는 그 방점은 '영화'로 옮겨와 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몇몇 구성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영화의 초중반부 에그시와 록시 등이 킹스맨이 되기 위해 받는 훈련들은 리얼인 것처럼 포장되었지만(훈련 중 죽을 수도 있다고 겁을 주며, 마치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시뮬레이션이며(결국 영화는 일종의 고도로 조직된 시뮬레이션이다. 예를 들어 기차길에 묶인 상태에서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강요받는 영화 속 훈련처럼 말이다), 해리가 교회에서 살육을 벌일 때에 그것을 모니터로 바라보는 에그시나 멀린(마크 스트롱)의 뜨악함이 있으며(즉 이 장면에서 이를 멀린이나 에그시, 그리고 악당 발렌타인마저도 마치 영화처럼 모니터로 바라본다는 것이 재미있다. 멀린이나 에그시의 화면을 바라보는 뜨악한 표정이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물을 보는 관객의 뜨악함이라는 이 영화의 조롱이 여기에 들어있지 않을까), 결국 에그시는 기존 스파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비슷하게 재현한 다음, 악당을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한다(예를 들어 기존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상당 부분 영화의 마지막이 결국 007이 여자를 후리는 것(그다지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으로 끝났음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에그시가 발렌타인의 소굴을 부수는 마지막도 기존 본드 시리즈들을 꽤나 떠올리게 하는데, 그 영화들에서 항상 마지막 최후의 대결은 적의 소굴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거니와 적들의 하얀 위장복 같은 것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물론 감독 매튜 본이 영리한 것은 복고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되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일정 부분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어야 하는데, 그가 선택한 것은 이른바 병맛 컨셉, B급 감성이다. 예를 들어 발렌타인의 충복 가젤은 기존의 블랙플로테이션 영화 등에서 신체의 일부가 무기로 변형된 여성들의 계보에 넣을 수 있으며, 영화 속의 어떤 유머들(예를 들어 해리의 집 벽을 장식하는 선(SUN)지 같은 것들 말이다)이나 넘쳐나는 고어적 설정 등이 그러하다. 물론 그 고어적 설정들이 넘쳐나지만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B급 영화들이 기존에 구축해 놓은 구조에 빚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B급 감성이 이러한 이 영화에 잘 결합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B급 감성과 이 영화의 이러한 메시지가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편하게 예를 들어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고어나 피칠갑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이 현실과 적절한 줄타기를 행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현실과 적당하게 비껴서 있다. 현실이 영화에 비척비척 밀고 들어올 때 그 쾌감은 높아질 수 있지만, 그만큼 관객의 자리는 위협받는다. 줄이 높아질수록 줄타기의 쾌감은 올라가지만 떨어질 때의 충격은 더 큰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결국 영화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이며, 영화는 영화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에서, 그 줄의 높이를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줄을 높일 수 있는 기술은 점점 발달하고 있지만, 그 떨어질 충격파를 계산할 정신은 여전히 빈곤한 것 같다. 

 

  

덧.

 

내게 흥미를 주었던 캐릭터는 에그시나 해리보다는 악당 발렌타인인데, 이 영화의 발렌타인은 최근 몇몇 영화들의 캐릭터를 연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천재 미치광이는 <인터스텔라>의 만박사나 <설국열차>의 윌포드와 같은 인물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윌포드와는 공유하는 지점들이 꽤 많다. 한정된 자원만을 소비하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인구를 줄이는 방법이 해결책이라는 그의 결론도 그러하거니와 그가 이를 위하여 내놓은 방법론, 즉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도 그러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자본주의의 끝에 서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있던 윌포드, 그리고 0.1%의 플루토크라트 발렌타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희선 2015-02-27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ㅊ ㅎ ㅎ ㄴ ㄷ

위에 쓴 것만으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조금 알아보게 쓰면,

ㅊ ㅜ ㄱ ㅎ ㅏ ㅎ ㅏ ㅂ ㄴ ㅣ ㄷ ㅏ

얼마전에 본 책에서 예전에 어떤 분이 우리말을 풀어쓰기로 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더군요 첫소리 말만 쓰면 못 알아봐도 풀어쓰면 조금 알아볼 수 있죠 하지만 저것도 바로 알아보기 어렵죠 그때 우리말을 풀어쓰자고 한 사람이 많았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일어났으면 안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고, 우리말은 풀어쓰지 않고 모아써야 한다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두번 나온 말은 어떻게 중요할까 하는 생각은 별로 안 해봤어요 앞에서 나온 말인데 또 나왔네, 하는 생각밖에... 얼마전에 본 책에도 같은 말이 두번 나왔어요 한번은 A가 다른 사람이 해주는 말을 들었고, 두번째는 A가 B한테 말한 거였어요 하지만 그 말 A한테는 맞는 말일지 몰라도 B한테는 맞지 않는 말이었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A는 사람이지만, B는 사람 모습을 한 다른 생물이었거든요 실제로는 없는 동물이군요 A가 듣고 한 말은 사람에 대한 거였어요 A는 B도 자신과 같기를 바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A)가 그렇게 말해도 B는 너와는 달라’ 하고... 사람은 다 A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A가 한 말은(잘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한테 좋게 생각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대충 이런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B는 대체 뭐길래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겠군요 무척 자비로운 동물 기린(麒麟 중국에서, 성인(聖人)이 나기 전에 나타난다는 상상의 동물)이에요 그 책을 처음 보는 사람은 나중에야 그 일을 알기 때문에, B는 보통 사람과 다르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B가 뭔지 알아서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중요한 말이라 생각해요

처음 영화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본 사람의 놀라움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사실 어땠을지 잘 모르지만... 그것을 실제처럼 느끼기도 했다고 한 듯한데...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거 아닌가 했잖아요 이런 생각은 어릴 때도 하는군요 자라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군요 영화도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무섭고 잔인한 것을 볼 수 있는 거겠죠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무엇이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떠오르네요 이것도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본 거지만... 그런 사람은 영화를 현실로 느껴서 볼 수 없다고 하더군요 실제로도 그런 사람 있을까요

사람을 줄이기 위해 서로가 죽이는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더 깊이 생각해서 좋은 방법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지... 그것은 한 사람과 여러 사람에서 어느 쪽을 고를 것인가와 비슷한 문제네요 어느 쪽도 버리지 않는 쪽을 생각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영화를 만들 때 많이 생각해야겠네요


희선

맥거핀 2015-03-02 11:05   좋아요 0 | URL
그냥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써 본 글입니다. 물론 그게 별 의미가 없는 말일 수도 있고, 감독이 별 생각없이 그런 대사를 넣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뭐 생각이야 누구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거니까.

네..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은 많이 놀랐다고 하죠. 유명한 기차 얘기도 있구요. 현대의 관객들도 매체라는 것에 많이 길들여졌기는 하지만, 또 모르죠. 현대 관객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무엇인가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물론 3D라는 것도 그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3D는 아직도 사실 초기단계라 봐야겠죠. 개인적으로는 저도 예전에 3D를 처음 봤을 때(어렸을 때 대전엑스포에서 처음 본 걸로 기억하는데..^^)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나요.

사람을 줄이기 위해 서로를 죽이게 한다..는 일종의 비유겠지요. 그러나 현실에서도 비슷한 것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일단 그게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이기도 하죠. 흔한 말로 `경쟁`이라는 것 말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현 세상이 점점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도록 권유하는 세계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것 말이죠. 그게 강한 자들은 편하니까요. 자신들이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고, 신경쓸 필요도 없죠. 무엇보다도 약한 자들끼리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놓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약한 자들은 뭉쳐서 강한 자에게 대응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강자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이겠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점점 사람들을 수직계열화하고 사회를 점점 제로섬게임, 혹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식으로 만들고 있죠. 이 영화의 그런 장면도 이런 것들의 일종의 비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단지 비유여야 하는데, 그 비유가 점점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죠. 무서운 세상입니다.

아..그리고 아무튼 감사합니다. 뭐 이런 저런 긴 말보다는 축하해주셔서 감사하다, (지금까지) 여러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밖에는 드릴 말이 없네요.^^

넙치 2015-03-04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에서야 봤는데 덧붙인 글이 흥미롭네요!
자본주의 중심에 있는 이들이 이미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하는 오싹함이..얼마전 생체이식 칩도 곧 도래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영화가 현실이 되는 날이 오는 게 아닌지, 종말론적 비극이 떠오르네요, 저는.;;;

맥거핀 2015-03-06 00:1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공짜를 좋아하면 안됩니다.ㅋ 라고 말을 하면서 아마도 영화 속 상황이었다면 저도 신나서 공짜유심을 받아 왔을 것 같아요. 사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점점 거의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니까요. 자본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상이 점점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아주 드물게, 무엇인가를 말하기가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어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같은 작품. 처음에는 읽고 무엇인가를 써볼까..생각했지만, 읽다보니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누군가가 억지로 말하라고 한다면 이렇게는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의 처음 첫번째 장(章)을 읽으면, 읽는 사람을 이보다 더 힘들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그 다음 장은 더 힘들게 만들고, 그 다음 장은 그보다 더 힘들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읽는다는 사실이 점점 고통스럽게 느껴질 즈음, 어느 틈엔가 그 읽는다는 의미의 어떤 숭고함을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기록한다는 것과 읽음으로써 그것을 지탱시키는 것의 의미 말이다. 아무튼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그런 소설이다.

 

아마도 무엇을 말하기가 힘든 것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 앞에 가로놓여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것. 이 소설은 처음에는 하나의 어떤 실제 사건을 이야기하다가 점점 인간 일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간다. 과연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한강 작가의 말대로 놀라울 정도로 잔인하거나 악한 인물이 있었고, 그 반대로 보기 드물게 선하거나,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려 애쓰던 이도 있었다. 인간이란, 이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는가. 어쩌면 이 소설의 가치는 그런 불투명도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한석 평론가가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 대한 비판론(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비판론이었다)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은 투명하게 영화가 될 수 없고, 영화도 투명하게 세상이 될 수 없으며, 양쪽은 영원히 그래서도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소설을 비롯한 다른 이야기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야기가 투명해질 때 종종 실세계가 불투명함을 우리는 잊고, 이야기의 카타르시스를 세상에 대한 카타르시스로 혼동하거나 쉽게 대체한다. 내가 밑에 올려놓을 몇 권의 책은 불투명한 상태로 내 앞에 놓여져 있지만, 그 불투명함이 이야기를 읽고 내려놓는 마지막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혹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어도 말이다.

 

 

 

뿌리 이야기 - 2015년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숨 외, 문학사상사

 

나같이 게으른 사람들을 위한 소설집이다. 시간을 가지고 진득히 챙겨봤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이렇게라도 해야겠지. 어째 왠지 늘 그 이름이 그 이름인 것 같은 인상은 있지만, 그래도 이상문학상을 읽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은 한해를 시작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휴전, 마리오 베네데티, 창비

 

군부독재, 도시 노동자, 염세주의와 숙명론,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낯설어 보이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이 느낌. 나도 요새 자꾸 염세주의와 숙명론이 엄습하는데, 이 책이 조금 도움이 될까. 

 

 

붉은 밤의 도시들, 윌리엄 S. 버로스, 문학동네

 

반양장은 지난 달이고, 양장은 이번 달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작품은 유토피아 공화국 리베르타티아를 건설한 실존 인물 미션 선장에 영감을 받아, 인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저질러진 치명적인 실수들을 돌이키기 위해 탄생한 유토피아 소설이다.'라는 출판사 설명을 봐서는 내 취향에 딱일 것 같은데, 아마도 안되겠지. 안될거야.

 

 

상상범, 권리, 은행나무

 

예전에 '씨네21'인가, '한겨레21'인가에 연재되었던(아니면 비운의 만화잡지 '팝툰'에서였나..) 글들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름을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2322년 URAZIL의 세계라니, 재미있을 것 같다. 위에 건 유토피아, 이건 디스토피아.

 

 

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열린책들

 

다른 분들의 추천을 믿고 골라보는 한권. 로쟈님의 추천이나, guiness님의 추천을 봐도 그렇고, 추한 망나니의 '문학적 다큐멘터리'나, '기록문학'이라는 설명을 봐도 그렇고, 꽤나 흥미진진한 독서가 될 것 같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5-02-04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그나저나 이번 달 도서나 빨리 읽어야겠다. 아직 두 권 다 하나도 못봤음!

희선 2015-02-0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투명하기 때문에 어떤 답은 자기 스스로 생각해야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서 어긋나지 않아야겠죠 이런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군요 책, 거기에서도 소설(이야기)은 책을 읽는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만은 아니기도 한데... 하지만 어떤 때는 거기에서 말하는 것을 알고 배우기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억지로 가르치는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가르쳐주는 게 좋은 거죠 이런 건 맥거핀 님도 아실 텐데 말했네요

이번에 하나 배웠습니다 소설은 불투명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책을 보면서 왜 이렇게 알 수가 없는 거지, 할 때가 가끔 있는데 그것 때문이군요 불투명해야 나은 거군요

이상문학상은 벌써 39회째군요 저는 이거 예전에 아주 조금만 봤습니다 그때는 ‘나왔구나’ 했는데, 지금은 ‘아직도 나오는구나’ 하고 책 앞면 예전하고 달라졌네, 했어요 전에도 조금씩 바뀌었네요


희선

맥거핀 2015-02-05 11:56   좋아요 0 | URL
소설이든 영화든 결국 보는 이에게 질문을 하게 하고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투명하다면, 단지 그것을 읽고 보고 치워버리고 말 뿐이겠죠. 제 경험을 돌이켜봐도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이야기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더군요. 그건 우리에게도, 그리고 이야기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질문을 하는 것만큼 답을 찾는 노력도 중요하겠습니다만...

저는 대학 시절부터 거의 이상문학상은 사서 봤던 것 같아요. 뭐 아무래도 누군가의 눈을 거친 작품들이니까, 한해의 좋은 작품들을 편하게 골라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개인적으로는 표제작보다 다른 작품들이 더 좋았던 경우가 많았었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배수아 작가가 이상문학상을 못탄게 좀 아쉽기는 한데..

아이리시스 2015-02-06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어서 읽어요~!! 새벽세시..에 화장실에 가나요? ㅎㅎㅎㅎㅎㅎㅎㅎ

아이리시스 2015-02-06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집에선 컴터를 잘 안 켜서 새벽에ㅠ깨서 네, 스맛폰으로 뭐든지 합니다.. 댓글도 쓰고 아이러브커피도 아이러브파스타도..루미큐브도.. 안녕~!!

맥거핀 2015-02-06 12:50   좋아요 0 | URL
아..갑자기 무슨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데..새벽 세시 어쩌구 하는 소설이 있지 않았나요? 새벽 세시에 루미큐브 같은 거 하면 잠이 잘 안올텐데..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가 됩시다.^^ 근데 나 아직도 안 읽었어요.-_-
 

 

 

 

 

  

국제시장, 윤제균, 2015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  

윤제균의 <국제시장>을 보았다. 이미 여러모로 말이 많은 영화이고, 영화 내외부를 둘러싸고 상당히 구체적이고 풍부한 논의들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더 붙일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영화를 보며 스쳐 지나갔던 몇몇 감상들을 짤막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2.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여기저기에 윤제균 감독의 인터뷰가 많이 실리고 있다. 윤제균 감독은 여러 매체에 거의 비슷한 내용의 소감을 밝히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이 영화를 둘러싼 정치적 이념 논쟁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와 관련된 것이다. 그 인터뷰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윤제균 감독이 이야기하는 이 영화를 만든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버지 세대에 보내는 헌사, 다른 하나는 세대 간의 소통과 화합을 위한 것이다.

 

3.   

나는 한 가지에는 약간은 동의하지만, 다른 하나에는 조금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먼저 이 영화가 아버지 세대에 보내는 헌사라는 점. 솔직히 나는 영화를 보면서 왜 이런 이야기가 이제서야 나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간 우리 근현대사의 어떤 지점들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 상당수의 영화들이 어떤 정치적 태도를 표면적으로 유지하거나, 특정의 사건을 통해 내부 전체를 깊숙이 들어가 조망하려고 노력하는 모양새였다면, 이 영화처럼 적어도 표면적으로 정치적 태도를 탈각한 것처럼 보이고, 특정의 사건이 아닌 어떤 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많지 않았다.

 

4.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 영화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입에 달고 사시는, 수십 년 동안 반새누리(반한나라)라는 기조를 지켜오신 우리 아버지를 영화의 거의 시작부터 끝까지 울게 만들었나. 그러니까 적어도 이 영화에는 반새누리이든, 혹은 반새정치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이 눈물을 짓게 만드는 어떤 지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지점들은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어떤 정치적인 구호나 이념과 조금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며, 나름의 충실한 재현과 적절한 위로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독일에서 광부로 고생하는 덕수(황정민)의 모습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했던 우리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부분을 칭찬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5.  

그러나 그것이 흔히 논의된 대로 정치성을 완전히 탈색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표면적으로'라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이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일텐데, 이 영화의 중간중간 비어있는 수많은 지점들을 채우고 있는, 혹은 채우려는 욕망을 보이는 다른 무엇인가가 조심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정치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들이기 때문이다.

 

6.  

이 영화는 크게 네 가지의 사건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국전쟁 중의 흥남철수, 광부들의 파독, 베트남 전쟁, 이산가족찾기가 그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들의 선택이 부적절했다고 말한다. 그 이면에 있는 독재정권이나, 그에 맞선 반독재투쟁과 같은 것을 그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물론 반론도 있다. 덕수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므로 이 사건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반론이 그것이다. 나는 이 반론도 충분히 가능한 답변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이 사건들이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국면이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7.  

다만 의아한 것은 이 사건을 그리는 방식인데, 이 사건은 덕수를 축으로 하여 통과하는 듯이 보이지만, 문득문득 그 축을 벗어나는 지점이 있으며, 그 벗어나는 지점들이 어떤 정치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반의 흥남철수 장면에서 덕수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미군 사령관(아마도 맥아더인듯한)에게 피란민들을 배에 실어달라고 호소하는 한국인 통역관의 모습과 결국 미군 사령관이 무기를 버리고 배에 피란민들을 싣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은 덕수의 눈으로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후에 어떤 장면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그 장면은 베트남전에서 자신들을 태워달라고 간청하는 베트남 주민들의 요청을 결국 거부하다가 태우고 마는 덕수의 모습과 정확히 대구를 이룬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오로지 어떤 모습을 연상시키기 위해 존재한다(스토리 상으로는 도무지 필요가 없다). 그 모습이란 성장한 한국이라는 국가로 표상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살아남고자 애썼던 처지에서 이제는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위치. 아니 조금 덜 삐딱하게 말하자면 이제는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위치. 이러한 것은 기브 미 쪼꼬렛을 외쳤던 어린 덕수의 모습과 이제 베트남 소년에게 초컬릿을 건네주는 덕수의 모습과 같은 장면(그리고 이 장면에서 마치 필요하다는 듯이 소년은 덕수에게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혹은 독일 광산에서 관리자 앞에 무릎을 꿇었던 영자(김윤진)와 외국노동자를 조롱하는 어린 학생을 훈계하는 덕수의 모습으로 다시 비슷하게 변주된다.

 

8.  

그러니까 이 영화의 비어있는 어떤 장면들에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가끔 고개를 들이미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이상한 녀석이다. 휴전 소식을 들으며, 국가가 힘이 약하니 자기들 맘대로 하는 것이라는 멘트, 혹은 정주영의 꿈을 비웃는 소년들과 결국 정주영의 꿈이 이루어졌다는 신문기사, 혹은 노년의 덕수와 영자가 대화를 하는 풍경에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부산의 (예전과 비교되는) 발전된 풍경과 같은 것 말이다(그들은 왜 굳이 옥상에 올라가서 이 대화를 하는 것일까, 혹은 감독은 왜 굳이 나비를 통하여 이 풍광을 돌려서 보여주는 것일까).

 

9.  

물론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웃긴 장면은 대통령도 감명 깊게 보았다는 그 장면일 것이다. 덕수에게 베트남전에 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영자와 이것이 내 팔자니 어쩔 수 없다는 (약간은 이상한) 항변을 하는 덕수의 언쟁을 봉합하는 국기게양식. 이 장면을 일종의 풍자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나에게는 앞에서 이야기한 장면들과 맞물려 이 장면은 조금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일단 이 영화는 장면들이 기능적으로 분할되어 있다. 즉 웃기고자 하는 장면들이 있고, 울리고자 하는 장면들이 있으며, 그것은 철저하게 구분된다. 즉 음악이나 분위기로 이제부터 울리겠습니다, 혹은 이제부터 웃기겠습니다,라고 이 영화는 장면마다 선언하고 시작한다. 그런 구분으로 보면 이 장면은 명백히 웃기고자하는 장면이 아니며, 도리어 구조상으로 볼 때 갈등이 최고조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점은 이 장면이 이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덕수에게 그의 삶에 대해서 묻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덕수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남은 가족을 지켜내라는 아버지의 말씀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삶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그의 어떤 '욕망'이 드러나는 장면은 고시학원에서 도강을 하다가 쫓겨나는 장면밖에 없다). 그런데 아무도 하지 않고 제기될 틈도 없어 보였던 그 질문을 영자가 한다. 여기에 당신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때 울려퍼지는 애국가라니. 왜 그는 그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채, 여전히 비어있는 무엇인가로 남겨져 있는가. 이 영화에서 덕수에게 부여한 위치는 무엇인가. 사건들을 관통하여 보여주기 위한 투시경일뿐인가(예를 들어 이 영화와 비교되는 저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가 지능지수가 낮은, 그러므로 사건들을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10.  

그러니까 나는 이 영화가 헌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악조건 속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으며, 적어도 그것이 자식 세대들, 혹은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자꾸 슬며시 고개를 들이미는 녀석이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녀석이며, 국가 발전이라는 환상이다. 나는 이것이 아버지 세대가 이뤄낸 무엇을 자꾸 국가가 가로채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족이 가족 이상의 가족주의가 될 때, 혹은 그 가족주의가 하나의 국가라고 말해질 때, 실제의 가족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그 고리를 어떻게 단절시킬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의 어떤 단초를 <인터스텔라>나 <설국열차>에서 보았다.)

 

11.  

그러니까 마지막의 실제 가족은 이상한 위치에 서 있다. 나는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이상한 장면은 이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버지(의 유령)를 만나고 있는 덕수와 분리된 가족들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윤제균의 컷이다. 자식들은 아무도 덕수에게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고생한 것을 안다, 그러니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것은 그가 오래전 헤어진 아버지의 환영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환영'은 누구인가(무엇인가).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겠다. 지금 우리 아버지 세대들에게 그런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이 사실은 환영(환상)에 불과한 위로라고 해도 말이다.

 

12.   

그 환영이 국가라는 아버지이다,라고 도식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장면은 여러모로 아쉽고 미심쩍어 보인다. 왜냐하면 앞에서 윤제균 감독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 영화가 세대 간의 화합과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화합과 소통의 가장 첫걸음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이며, 이것을 영화로 말한다면 적어도 상대방을 이해할 여지가 있는 무엇인가로 그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덕수는 이해할 여지가 있지만, 자식들에게는 아무런 이해의 여지도 없다. 이 영화에서의 젊은 세대는 내가 보기에는 (흔히 말하는) 그저 기능적인 나쁜 캐릭터이다. 그들은 괜히 외국인노동자에게 시비를 걸고, 늙고 게다가 아픈 부모에게 자식을 맡기고 놀러가고, 부모의 이야기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이런 캐릭터들에게 어디 이해할 여지가 있다는 말인가.  

 

(덧붙이자면, 물론 이는 영화가 어떤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산가족상봉을 그린 후 현재로 건너뛰는 선택 말이다. 덕수와 자식들이 단절된 것은 이 시기의 어떤 것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시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소통이 단절된 현재를 보여줄 뿐이다. 이도 물론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이라기보다는 덧.  

나는 그래서 윤제균 감독의 인터뷰가 솔직하지 못했다라기 보다는 사실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그래야 더 재미있고, 더 관객이 많이 들잖아요,라고 말하면 안될 이유가 있는가. 우리 이제 그런 정도는 '익스큐즈'할 수 있는 쿨한 관객이잖아요. 이미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잖아요. (허지웅의 '정신승리하는 사회'라는 코멘트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의 그런 말은 적어도 영리한 멘트는 아니다. 그가 적어도 논란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항변한다면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희선 2015-01-21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잠깐 라디오 방송에서 이 말 들었어요 ‘국제시장’ 영화 제목이었군요 부산 국제시장에 사람이 많이 와서 가기 어려워졌다는 말이었어요 영화 찍었다고 한 것은 들은 것 같은데 그 시장 이름이 영화 제목인지 몰랐습니다 어쩌면 말했는데 제가 못 들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지는 게 좋은지 안 좋은지 이런 말도 한 것 같군요 그곳이 영화에 좋게 나왔나봐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가겠죠

영화 맥거핀 님 아버지와 함께 보셨나봐요 사우디아라비아, 저도 잊고 있었는데 삼촌이 거기에 갔다온 게 생각났습니다 삼촌이고 저는 아주 어렸기 때문에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그랬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요 개인은 나라보다 자기 식구를 위해서 그렇게 다른 나라에 가지만, 실제 그렇게 만든 건 나라였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베트남 전쟁도 그렇죠 예전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에 가서 일을 해서 나라에 도움을 주었군요 다음에는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생각나는군요

부모 (세대)가 애쓴 것을 자식은 잘 모르기도 해요 자식이 나중에 부모가 되어봐야 안다고 하지만, 정말 다 알까요 이건 남을 알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군요 영화에서는 자식들이 아버지를 제대로 보지 않지만, 이것을 보는 사람은 그러기를 바라는 건지도 모르죠 좋게 나오면 나도 저렇게 해야겠구나 마음먹거나, 나쁘게 나오면 나는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하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독일, 베트남에 갔다면 오랫동안 집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자식들과 잘 지내지 못했을지도... 잘 모르는데 이런 말을 했군요


희선

맥거핀 2015-01-21 21:18   좋아요 0 | URL
우리 아버지 뿐만이 아니고, 이 영화에서처럼 예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외국에서 일하신 분들이 많죠. 그분들이 영화에서처럼 매우 고생하셨고, 가족들을 먹여살렸으며, 또한 그분들이 벌은 외화가 우리 경제발전에 기여를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국내에서 일하신 분들도 마찬가지구요.

다만 그것이 개인이나 가족이 아니라 국가라는 단위 전체로 뭉뚱그려 이야기될 때 위험할 수 있다는 거죠. 뻔한 얘기지만, 국가는 결국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개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더구나 그것이 어떤 `희생`이라는 것으로 포장된다면 말입니다.

글쎄요. 소통을 원하는 영화라고 하는데, 소통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하는게 우선이잖아요. 자식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덕수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듯한 느낌이 있어요. 그에게는 오로지 `가족을 지킨다`는 것만 있지, 사실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 외에 설명하는 것이 잘 없기도 합니다. 사건을 그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가 어떤 인물인지 조금 더 세심한 마음으로 영화가 그렸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도리어 아버지 세대에 보내는 헌사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가 되보기 전에는 부모의 마음은 모른다고 하죠.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또 한편으로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는 또한 한편으로 자신이 젊을 때의 마음을 또 너무 빨리 잊는 것 같기도 합니다.

2015-01-24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8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형제, 2015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선택을 보여주는 영화는 대체로 늘 어렵고 힘들다. 그렇지만 다르덴 형제의 신작 <내일을 위한 시간>은 이 힘든 선택을 직관적으로, 상당히 쉬운 문법으로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생각이 필요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산드라(마리옹 꼬티아르)는 병에서 회복한 후 복직을 희망하지만, 1000유로의 보너스와 자신의 복직 중에서 선택하여 투표하자는 회사의 결정에서, 자신을 선택하도록 회사 동료들을 설득해야만 한다. 월요일 투표를 앞둔 주말의 이틀 동안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산드라의 이틀을 그대로 따라가며 16명의 동료들을 차례로 만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게 다다(영화의 원제를 직역한 영어제목은 <Two Days One Night>이다). 별다른 부수적인 플롯도 없고, 별 그럴듯한 사건도 없다. 카메라는 토요일 오전부터, 투표가 이루어지는 월요일 오전까지 산드라를 집요하게 쫓아다닐 뿐이다.

    

언뜻 보면 이 선택은 당연한 선택처럼 보인다. 1000유로의 보너스와 회사동료의 복직 사이에서의 선택 말이다. 왜냐하면 현재 이러한 선택은 어디에서나,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처럼 프랑스의 작은 회사에서나, 혹은 글로벌한 대기업에서나 하다못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복직 문제 같은 것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논리,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선전되고, 받아들여지는 논리이기 때문이다(이 영화의 회사 동료들의 면면을 보면 유럽의 저소득층 노동자들이 당면한 현실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노동시장도 만만치 않다). 우리가 나쁜 놈들이거나, 악마라서 너희들을 자르는 것이 아니야. 누군가가 나가야만 나머지 모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줄어들지 않거나, 회사가 지속될 수 있는데 어떡하겠니. 누군가는 나갈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원망하지마, 니가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이 떨어지는데 어쩌니, 바로 그 논리. 즉 이 영화에서의 각 개인당 1000유로의 보너스는 앞으로 나갈 산드라의 월급을 미리 나누어 주는 것에 불과하다. 자본가의 이익은 어떠한 선택을 한다해도 그대로 유지된다. 다른 대다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딱한 것은 계속 안정제를 입 안에 털어넣으며, 어쩔 수 없이 동료들을 만나야만 하는 산드라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동료들 모두가 그에 못지않게 딱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영화 속에 나온 말대로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그들이 산드라에게 미안해할 이유, 혹은 그 반대로 산드라가 그들에게 미안해할 이유가 없다. 이것으로 인해 그 노동자들 누구도 아무도 실질적인 이득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그들의 노동의 양은 산드라가 빠진 만큼 늘어날 것이다. 그 보너스의 양만큼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무도 이득을 보지 않는 이 선택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계속 되풀이된다. 왜? 그것이 노동시장을 제어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며, 제로섬 게임에서 참가자들은 결코 연합(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늘 분열하기를 바라며, 그들이 연대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을 분열시키려고 애쓴다(영화 <카트>에서 마트 노동자들이 해고된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그러니까 합치는 것이었으며, 자본가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주동자들을 회유하는 것, 그러니까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노동자들의 연대에 대응하는 자본가들의 첫 번째 무기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언제나 힘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사실 이 영화는 일종의 작은 실험실이자, 거대한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실험은 (사실 모든 실험들이 그렇듯) 잔혹하며, 실험 설계자는 여전히 실험실에서 가장 안락한 위치에 있다. 늘 딱한 것은 미로를 열심히 헤매야만 하는 흰색쥐들, 그러니까 실험 참가자일 뿐이다.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없다. 이 영화에는 (거의 실질적으로 보이는) 미로를 탈출할 몇 가지의 힌트가 있다. 마치 어떤 전략처럼 보이는 것들 말이다. 그 하나의 전략은 일대일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하라는 것. 인간은 집단의 의견이라는 편한 울타리에 쉽게 숨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몇 백만의 굶어죽는 아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굶어죽어 가는 단 한 명의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늘 더 효과적이다. 아니 그보다는 굶어죽어 가는 아이를 눈 앞에 데려다 놓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것은 인정에 호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정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 대신에 선택하여야 하는 것이 한 인간의 죽고사는 문제라는 것, 좋은 말이지만, 그 인간을 실제로 보기 전까지 우리는 그것을 쉽게 잊는다. 그것은 인간이 악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그렇다. 그러므로 그들은 묻는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이 항상 산드라에게 묻는 질문. (나 외에) 너를 지지하는 사람은 누가 있지. 대체로 인간은 어디에서든 소수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누구나가 많은 쪽의 편에 서기를 원한다. 그것 또한 이들(그리고 우리)이 단지 약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의 남편의 존재도 어쩌면 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사실 이 영화에서 남편의 캐릭터는 보기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끊임없이 산드라에게 동료들을 만나도록 독려하는 산드라의 남편이라는 캐릭터는 좋게 볼 수도 있지만, 보는 이들을 짜증나게 만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산드라가 영화의 내내 동료들을 만나는 것을 너무나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왜 남편이라는 작자는 그녀가 그런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는 것일까. 나는 다르덴 형제가 분명히 이 문제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실 이 영화에서 남편이라는 캐릭터가 없어진다해도 영화의 전체 진행에는 큰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동료들을 남편이 같이 만나주는 것도 아니며, 항상 그녀 혼자 동료들을 찾아간다. 그저 산드라를 이혼한 싱글맘으로 설정해도 된다. 별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캐릭터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캐릭터가 없을 때를 실제로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 생기는 문제는 산드라가 훨씬 강인한 캐릭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의 산드라를 결코 약한 캐릭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자발적으로 그 고통을 감내할 만큼 강인해져서는 안된다고 다르덴 형제는 생각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그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이다. 

 

다르덴 형제는 늘 그런 약한 인간을 이야기해 왔다. 겉으로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늘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인간들을. 아니 인간이 아니라 카메라가 흔들린다고 말해야하나. 처음의 몇 장면들은 이것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임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서 흔들리는 카메라,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이 갑자기 시작되어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야기.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에서 마치 주인공의 실질적인 유일한 친구는 늘 그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 떨어질지 모르는 카메라처럼 보였다. 주인공이 흔들리면 카메라도 같이 흔들렸고, 주인공이 숨을 고를 때면 카메라도 같이 숨을 골라주었다. 이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도 카메라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산드라의 곁에 붙어 있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날 때, 동료들의 반응숏이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반응숏보다는 여전히 카메라는 묵묵히 동료들보다는 산드라를 더 오래 비추었고, 산드라가 실망감과 고통을 애써 감추며 차로 돌아올 때 카메라도 같이 차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런 카메라가 이제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 약간 달라진다. 투표를 마친 후 회사를 걸어나가는 산드라를 카메라는 따라가지 않고 멈춰선 후 묵묵히 계속 걸어가는 산드라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길게 말이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음악 없는 엔딩 크레딧이 이어진다.

 

그녀의 발걸음이 어땠을지, 그것은 영화를 본 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희선 2015-01-06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료와 돈... 제가 저런 처지에 놓인다면, 저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동료한테 한표를(그 사람과 별로 친하지 않다 해도, 제가 착해서는 아니고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은 여러가지 생각이 많겠죠 그렇게 했을 때 자신한테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요(그렇다고 투표할 때 이름까지 쓰는 건 아니겠죠 어쩌면 쓸지도 모르겠군요) 집안이 어려운 사람은 더 그렇겠죠 지금 바로 쓸 수 있는 돈이라면, 거기에 마음이 갈지도 모르죠

실험을 하는 사람은 그저 결과만 보겠지만, 실험을 당하는 사람은 괴롭겠군요 자신한테 표를 달라고 말하기 위해 동료를 만나러 다니는 산드라도 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만나면서 서로 알게 되는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쁜 사람은 없지만,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 실험이군요 그런 건 없으면 좋을 텐데, 실제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다행스러운 건 사람은 약하지만 힘을 낼 때는 내기도 한다는 거예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하는 성경 구절이 갑자기 떠오릅니다(주기도문이기도 하군요) 정말 그런 시험에 빠지고 싶지 않네요


희선

맥거핀 2015-01-07 16:19   좋아요 0 | URL
아..근데 제가 리뷰에 안 쓴 부분도 있는데, 다른 동료들에게 작업반장이 다음번에는 네가 해고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압력을 넣었다는 부분이 있기도 해요. 그런저런 부분을 감안해볼 때 산드라에게 투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겁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보면 알게 되지만, 이들 모두에게는 보너스가 필요한 또 각각의 이유들이 있기도 하죠.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아무튼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와는 조금 다르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들이 설혹 산드라를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에게 어떤 윤리적인 비난을 하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선과 악의 문제도 물론 아니구요. 그리고 그것은 현대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마찬가지일 겁니다. 시스템이라는 것이 위험하고, 많은 부분에서 고쳐야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이들이 결국 선택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도 결국 이 시스템이 만들어낸 것이겠죠), 결국 바꿀 수 없는 것은 이 시스템밖에 없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어떤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는가에 따라 나빠지기도 하고, 좋아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신간평가단이 되었다. 예전에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지금과 같이 읽고 싶은 책을 골라내는 것이다. 그 선택이 별 의미가 없을지라도, 무엇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항상 어렵다. 더구나 읽은 소설도 많지가 않고, 아는 작가도 별로 없는데, 소설 분야에서 골라야 한다니. 그래서 (늘 선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마는 나 자신에게 동아줄을 던져 준다는 의미에서) 적어도 한 가지의 시답잖은 원칙을 세워보기로 했다. 그것이 설혹 가늘디 가늘거나, 썩은 동아줄이라 한다 해도 말이다.

 

그것은, 우리(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의 한국사회는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고, 그 연쇄의 끝(이자 시작)에는 바다에 차갑게 가라앉은 배와 아이들이 있었다. 많은 분들의 말대로, 문학은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을 반영하고, 한편으로 작가들에게는 이 무의식을 계속 표면 위로 끌어올릴 의무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현재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작가들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고, 그것으로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이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어찌되었건 나도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거창하게 말하면 그렇고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국외 작가를 상대적으로 잘 몰라서 책을 골라낼 자신이 없다.)

 

나머지 원칙은 그야말로 시답잖은 것으로 SF 작품을 읽는다(개인적 취향), 되도록 추리물을 피한다(이것에까지 머리 쓰고 싶지가 않다), 로맨스물은 피한다(사랑은 현실에서) 같은 것들이라, 더 이야기할 것은 없는데, 이것 한 가지는 얘기해두는 편이 좋겠다. 그것은 (내 떨어지는 취향을 겸허히 인정하고) 다른 평가단 분들의 추천을 꼼꼼이 읽어 그분들의 안목에 상당히 빚을 질 생각이라는 것. (그러니까, 묻어 가겠다는, 아니 거저 먹겠다는 얘기다.)

 

그래서 서설이 길었고, 아무튼 몇 권을 골랐다.

 

 

 

모든 빛깔들의 밤, 김인숙, 문학동네

 

일단 이름을 신뢰하는 작가에 의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책 소개를 읽어보니 그리 녹록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지만, 녹록하지 않은 것이 이야기뿐이랴.

 

 

디 마이너스, 손아람, 자음과모음(이룸)

 

<소수의견>을 썼던 손아람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목차에 쓰인 수많은 단어들이 불러오는 아련하지만, 또 그렇게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심상들. 그것들은 어떻게 부서져 오늘의 사회를 만들었나. <소수의견>의 빠른 개봉을 바라며 추천한다.

 

 

도시의 시간, 박솔뫼, 민음사

 

아마 예전에 단편을 한 두 편 읽었던 것 같다(그런데 솔직히 기억은 잘 안난다). 젊은 작가가 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늘 좋다. 사실은 그것이 젊은 이야기를 가장한 늙은 이야기였더라도 말이다.

 

 

벌거숭이들, 김태용, 문학과지성사

 

단편집에서 이름을 자주 들었던 작가다. 그 중에 분명히 한 두 편쯤은 봤지 싶은데, 역시 기억이 잘 안난다. 상당히 밀도 있는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 같다. (다만, 표지를 꼭 이렇게 만들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문학동네

 

다른 분들의 추천을 믿고 골라보는 한 권이다. 잭 밴스의 <최후의 성>, 어슐러 르 귄의 책들과 경합(?)을 벌였으나, 몇 가지 이유로 이 책을 선정. 불새 출판사의 책을 고르자니 양심에 걸리고, 시공사의 책들을 고르자니 알량한 존심에 걸린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5-01-04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이번에 소설 신간평가단으로 시작하시네요.
축하합니다. 저는 작년에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탈락되었어요.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새해에도 좋은 기운 성하길 빌어요.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을 고르셨네요. 가져갑니다.~~

맥거핀 2015-01-04 22:51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프레이야님. 네..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좋은 기회 잡은 것이니, 고마운 마음으로 즐겁게 쓰는 게 맞겠죠.

새해에는 서재에서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에서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cyrus 2015-01-04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시는 것 같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좋은 책과 영화 많이 소개해주세요. ^^

맥거핀 2015-01-05 12:36   좋아요 0 | URL
네..이번에는 소설 쪽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조금 더 써보려고 하는 데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cyrus님 글은 늘 잘 읽고 있습니다. 좋은 글 많이 쓰셔서 저도 얻는 게 많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희선 2015-01-05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소설, 저도 잘 안 보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을 아주 안 보는 건 아니고, 청소년 소설을 좀 보기도 했군요 지난해에는 그것도 그렇게 많이 못 본 것 같습니다 소설을 봐도 사회 같은 거 생각 안 하고 보기 때문에... 예전에 우리나라 소설을 보면서도 그런 거 잘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본 소설은 다 그때보다 더 예전 일을 다룬 것이었군요 그 시대를 다룬 것도 봤을 텐데, 제가 잘 몰랐겠죠 그래도 미스터리를 보면서는 조금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불새, 시공사 왜일까 싶군요 저는 이런 것도 잘 모르는군요

어두운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가 다 희망을 말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맥거핀 님이 모든 빛깔들의 밤, 을 보면 어떤 생각을 쓸까 보고 싶기도 하네요

새로운 한주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하세요


희선

맥거핀 2015-01-05 12:43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서 저도 국내작가 장편을 읽어본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합니다. 단편은 그래도 문예지 같은 것도 보고 문학상 같은 것도 보고 그러는데...위에 사회 어쩌구 쓴 거는 있어 보이려고 쓴 거구요. 요새 국내 작가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어요. 능력 있는 젊은 작가들이 누구인지도 궁금하구요. (출판사 얘기는 뭐 검색하면 아실만한 이야기니까요. 별 의미는 없어요.)

한동안 저도 어두운 얘기는 피해다녔는데요. 특히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로는 이야기까지 어두운 것을 봐야하나 그런 생각이 조금 있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냥 가리지 않고 다 보려구요. 뭐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니고...그런다고 현실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니.

네..저도 새해 첫주니만큼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 희선님도 즐겁게 보내셨으면 좋겠네요.^^

2015-01-12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12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