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의 개봉일은 95년 9월 2일이었다. 물론 나는 이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겨우 날짜를 알았을 뿐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개봉일로부터 한참 지나고 아마도 98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날짜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날짜를 기억도 못하는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기 전후의 일들은 꽤나 난삽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와 관련지어서는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학회 사람들과 영화를 보러 갔었다. 영화관에 간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하는 소규모의 영화제였다. 학교는 외대였고, 날짜는...아마도 봄이나 가을이었던 것 같다. 새벽에는 꽤나 추웠으니까. 밤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 야외에 대형의 스크린을 걸어놓고 하는 그런 영화제였다. 말이 영화제였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대학의 영화동아리에서 주관하는 작은 행사였었던 것 같다. 거기에 왜 가기로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학회의 누군가가 외대에 친구가 있었거나, 우연히 PC통신 게시판에서 그런 내용을 보았거나, 우리 학회에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었거나...하는 그런 시덥잖은 이유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다른 기억이 모두 틀렸다고 해도 지금 하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우리가 매우 화면 가까이에 앉아서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화면은 매우 컸다는 것이다. 스크린에 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 그 배우의 코가 적어도 웅크리고 앉은 나 정도의 크기는 되었으니까. 왜 그렇게 가까이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리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 곳의 구조가 이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나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모두 세 편이었는데, 가장 처음에 나온 영화는 롱테이크가 무던히도 반복되는 영화로, 무언가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영화였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영화의 줄거리도 전혀 모르는데다가, 바라보는 화면은 곧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으므로 꾸벅꾸벅 졸다가 옆의 친구가 옆구리를 찔러 다시 일어나서 보다가, 다시 졸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아주 훨씬 나중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그 영화는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영화가 <하류>였는지, <구멍>이었는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 때문에 지루했던 기억이 있으므로 <구멍>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미묘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여 <하류>같기도 하다.

 

두 번째 영화부터는 비교적 생기를 가지고 졸지 않고 영화를 즐기며 볼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같이 갔던 일행 중에 한 친구가 계속 영화를 보며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졸음이 올래야 올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나 역시도 지금까지 본 공포영화 중에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아직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압권 장면 중 하나일 듯한 피바다가 되는 방과 ‘REDRUM’ 그리고,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는, 거대한 스크린에 클로즈업으로 비췄던 잭 니콜슨의 눈빛. (아마도 그 스크린이 과도하게 컸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클로즈업된 잭 니콜슨의 눈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다들 너무 공포에 떨어 피곤해진 데다가, 새벽도 꽤 이슥해지는 터라 우리 일행도 자리를 뜰 준비를 하였다. 그러자 영화제 관계자 한 명(아마도 그 동아리 학생 중의 하나인 듯한)이 살짝 다가와 우리를 잡았다. 그리고 미끼를 던졌다. “이 영화도 보고 가세요. 아주 야한 영환데.” 글쎄. 왜 우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많은 관객들이 이미 빠져나갔으므로 우리라도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말에 이끌렸는지, 새벽이라 갈 곳도, 갈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정말 많지 않은 관객 속에서 그 날의 마지막 영화이자, 상당히 야하고 상당히 슬픈 영화를 보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 포르노스타의 등장과 씁쓸한 몰락, 그리고 퇴장. 우리는 초반에는 은밀한 웃음을 교환하며 좋아하다가, 곧 속았다고 생각했고, 종국에는 우리도 역시 씁쓸해졌다. 그리고 슬퍼졌다.

 

슬퍼서 그랬는지, 아니면 마지막 장면에 쇼킹을 받아서 그랬는지 우리는 그곳을 나오며, 학교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씩을 사서 몰락한 포르노스타 마냥 편의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차가 다니는 시간을 기다리며 나눠 마셨고, 나는 다시 우리 학교 앞까지 와 비디오 방에 가서 이 영화 <중경삼림>을 보다 잠이 들었다. 아마도 다음날 오전 수업을 기다리며 시간이나 때우자는 심산이었겠지만, 학교에서 수업이나 제대로 들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 <중경삼림>은 어느 날 TV에서 이 영화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 비스듬히 누워 볼 때까지 내 기억 속에는 초반부의 임청하의 까만 선글라스와 노란 가발로 기억되거나, 뚝뚝 분절되던 이상한 화면(‘스탭프린팅’이라 불리우는)으로 기억되거나, 차이밍량과 <샤이닝>과 <부기 나이트>와 그저 한 세트로 기억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을 되새기며 비스듬히 누워서 보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 앉았고, 그 영화가 좋아졌다. 그 후에 나는 이 영화를 주기를 가지고 습관적으로 반복해 보게 되었고, 내 기억 속에서 기억은 다시 <중경삼림>의 내용들과, 그리고 다른 영화들과 합쳐지고 분절되고, 더욱 난삽해져만 갔다.

 

 

 

이 모든 기억을 다시 떠올린 이유는 며칠 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로 <중경삼림> DVD를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사놓은 DVD인데, 그 동안 이런 음성해설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보게(듣게) 되었다.

 

정성일 평론가의 목소리는 꽤나 차분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가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빨리 청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심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음성해설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책 한 권으로 내도 될 만한 분량의, 수많은 알려진,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들려주는 동시에, 중간중간 의미 있는 장면을 짚어주는 것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과 영화의 주제를 다시 되새겨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지만, 영화를 여러 번 본 나도 놓치고 지나갔던 장면들(예를 들어, 영화의 전반부에 왕정문이 가필드 고양이 인형을 안고 가게에서 나오는 장면이라든가)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그런 재미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도대체 정성일 평론가는 대본을 써놓고 이 이야기들을 읽어내려 가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영화에서 평론가의 음성해설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의 음성해설이란 결국 누군가의 하나의 영화를 본 감상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 되었지, 왜 이것을 본다(듣는다)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난삽한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 것은 정성일 평론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성일 평론가가 해설 중간에 왕가위와 차이밍량을 비교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주문해 놓은 <스틸라이프> DVD가 보고 싶어졌다. 그 DVD에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 2008년 4월 30일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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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1-28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의 기억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그 기억은 만년으로 해도 되겠습니다...

맥거핀 2013-11-28 00:56   좋아요 0 | URL
오...왠지 그 말을 하는 금성무의 얼굴을 상상해버렸습니다. Mephistopheles님이 닮았다고 믿을께요.

Mephistopheles 2013-11-28 09:29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기대에 못미치겠군요..(이참에..페이스오프를..??)

맥거핀 2013-11-28 22:29   좋아요 0 | URL
그냥 금성무로 기억하고 싶어요. 제 판타지를 위해. 훗.^^

넙치 2013-11-27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 극장에 가기 전후의 기억으로 방부처리 돼는 거 같아요. 저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는데 너무 좋아서 왕가위 영화에 한동안 충성심을 바쳤는데 나이들고 다시 보니 내가 뭐 때문에 열광했었는지 궁금한 적이 있답니다.-.-;;어렴풋하게 짐작은 하지만 그 나이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사실이기도.ㅎㅎ;

맥거핀 2013-11-28 01:00   좋아요 0 | URL
네..영화라는 게 참 시간이 지나면 영화의 내용보다는 정말 그와 관계없는 다른 기억, 때로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 대체되죠. 저도 기억에 남는 영화는 대체로 개인적인 추억이 관계된 영화들입니다. 그래요? 저는 왕가위 영화는 옛날에도 좋았고, 지금도 좋고, 다시 봐도 좋아요. 물론 그 때 좋은 이유와 지금 좋은 이유는 다르겠지만요.^^

감은빛 2013-11-2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역시 맥거핀님의 글은 참 좋네요.
저는 [동사서독]을 교수님 추천으로 보고 나서,
이 영화를 봤습니다.
그 시절엔 영화란 때려 부수거나, 날아다니거나, 총질하는 액션 영화 위주로 보았고,
간혹 야한 장면이 조금 들어간 공포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동사서독], [중경삼림], [타락천사]를 주욱 이어서 봐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어요.

이 글 읽고 나니, 다시 찬찬히 보고 싶어지네요.

맥거핀 2013-11-28 01:05   좋아요 0 | URL
음..<동사서독>을 추천하는 교수님이라..어떤 분이실지 궁금하군요.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참 90년대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용적으로 볼 때도 홍콩반환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을 앞둔 홍콩의 어떤 분위기가 녹아들어가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혼돈과 과잉, 그러면서도 어떤 특유의 정서가 있다랄까요..그 때 극장에서 보았어야만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쉬워요.

감은빛 님의 좋은, 인간미 나는 글들도 잘 읽고 있습니다. 추위에 건강 잘 챙기세요.^^

2013-11-27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중경삼림, 95년에 개봉관에서 봤어요. 그치만 밤샌 후 이전 영화의 기억을 안고 피폐한 상태로 비됴방에서 비몽사몽 본 맥거핀 님 경험이 추억으로선 더 훌륭한 듯요.ㅎㅎ 스틸라이프는 역시 개봉관에서 봤는데, 잠과 꿈 사이사이로 스틸 사진처럼 장면 장면 끊긴 채로 봤지요..ㅋ

맥거핀 2013-11-28 01:28   좋아요 0 | URL
드디어 진짜가 나타나셨군요. 개봉관에서 이 영화를 보신 분. 섬님도 그 당시 개봉관에서의 추억을 생각해보면 여러가지 얘기거리가 많이 나오실 것입니다요. <스틸라이프>는 저도 개봉관에서 보기는 했어요. 저도 좀 멍하니 봤던 것 같구요. 마지막 장면에서 이건 뭐지 싶어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섬님 오랜만..잘 지내세요?

2013-11-28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개봉관 추억. 이러면 뭐 줄줄이 안 나올 영화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 책도 안 읽고 영화도 많이 안 보는데, 지난 얘기나 반추하며 서재 생활을 해 볼까나요~ㅋㅋ 스틸라이프는 그렇게 좋게 본 것도 아닌데 장면 장면의 기억은 남더군요. 배경이 남다른지, 영화가 남다른지 모르지만요.^^
저는 왜 맨날 오랜만일까요? 자주 글 좀 남겼으면 하며, 저 자신에게 바라는 소망이~ㅋ 잘 지내긴 합니다. 가을도 좋았고, 겨울도 좋고~~

맥거핀 2013-11-28 22:40   좋아요 0 | URL
섬님도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여러 재미있는 추억이 많이 나올듯 한데요. (뭐 지방이 더하지만) 서울에도 참 사라진 영화관들도 많고 해서요. 사라진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늘 애틋한 마음이 듭니다.

스틸 라이프는 영화를 볼 때에는 무슨 얘기인가 좀 어리둥절했는데, 영화를 보고 여러 글들을 읽으며 뒤늦게서야 많이 생각하게 된 영화입니다. 그게 남다른 영화라는 증거일까요?

잘 지내신다니 좋습니다. 좋아요.

네오 2013-11-2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플픽 일대종사네요,,왕가위를 이야기하면 추억을 안 말할수는 없죠,,ㅋㅋㅋㅋ 저도 중경삼림으로 그의 필모를 시작했지만 아니 어쩌면 내 희미하게나마 영혈남아일수도 있겠군요,,저는 처음중경삼림보고 친구들에게 타란티노뻬껴네 하며 주절주절 떠든게 생각이 나네요,, 그이후 마음을 고쳐잡고 그를 다시 숭상하긴 했지만 지금은음 별로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는 않아요^^,,누군가가 왕가위 베스트를 뽑아길래 저는 그러한 마음에 동참하고자 일위 2046, 이위 동사서독, 그리고 삼위는 화양연화 이정도요,,(앗 나도 한번 추억에 젖어 왕가위를 써볼까나;;;;;)

맥거핀 2013-11-28 22:47   좋아요 0 | URL
아..왕가위 영화하면 다들 누구나 추억 한가지 씩은 있으신 모양입니다. 저만의 왕가위이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군요. 아..<열혈남아>도 있었죠. 영화보다는 음악이 더 생각나는 영화...

왕가위 베스트라..저도 심심한데 꼽아볼까요. 1위는 중경삼림, 2위는 일대종사...3위는 이거 참 애매한데...2046하고 아비정전 중에 무엇을 꼽아야할지...

Shining 2013-11-2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저를 위해(?) 가져오신 글인가요? 어쩐지 뿌듯해지는데요(웃음).

저는 가장 처음 본 영화가 중경삼림이었던 것 같고 극장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비디오나 비디오나 비디오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는 작년엔가 VOD로 봤는데 기억 나는 장면은 블루베리 케이크였던가 밖엔;; 그의 영화는 (제게) 영화의 제작이나 개봉 시대가 아니라 제 머릿속에 90년대에 대한 관념 자체. 몇 번이고 돌려본 비디오의 낡은 줄과 약간 튀는 소리까지도 하나의 영화처럼 기억이 되요. 그러고 보니 왕가위에 대한 추억을 쓰라면 페이퍼 몇 개쯤은 다들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감독인 것 같아요. 회상같기도 하고 회한같기도 한 추억.

저는 DVD를 구매해도 코멘터리를 잘 안 보고 안 들어요. 이상하게, 그렇게 되네요.

Shining 2013-11-28 21:26   좋아요 0 | URL
저도 대학에서 하는 영화를 하루에 세 편 몰아서 본 적이 있어요, 하루는 세 편 다 뮤지컬 영화였고 하루는 또 다른 주제였고 그랬는데. 다같이 영화를 봤는데 일행의 반은 잤고 나머지 반의 반은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저는, 낯설고 이상하지만 좋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난 좋았는데, 라는 말을 삼키고 말았어요. 다같이 같은 영화를 본다고 결코 같은 감수성을 가질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하지만 뼈 아픈 사실을 깨달은 시간이었죠. 근데 이상하죠? 그 영화가 무슨 영화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 장면은 대충 기억이 나고 마음 먹고 찾으면 찾을 수야 있겠지만 이제는 뭐, 모르면 어떠냐 싶은 마음이에요(하하).

나중에 보니 브레송 영화의 한 장면은 트뤼포 것으로 기억하고 잠깐 본 자료 때문에 에릭 로메르의 영화 한 편을 다 본 줄 알고 착각도 하고. 생각해보면 제대로 본 영화가 무엇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계속 영화를 보고 느낀다고 생각하고 기억한다고 믿는게. 가끔은 신기해요 제 자신이.

덧) 댓글이 길고 중언부언이라 죄송합니다(꾸벅).

맥거핀 2013-11-28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hining님이 예전 왕가위 영화 얘기하시길래, 예전에 썼던 글이 생각이 나서요. 근데 요즘에 무슨 왕가위 회고 주간인가요? 서울에도 왕가위 영화 특별전하던데..별 관심없었는데, 예매자들 대상으로 왕가위 친필 싸인 DVD를 준다는 이벤트에는 좀 혹하긴 했습니다.

아무튼 왕가위는 가히 90년대의 아이콘이라 불릴만하죠. 당시 영화 좀 본다 하는 친구들은 왕가위 얘기 안하는 친구들이 없었죠. 이제는 좀 지나간 옛이름 같이 여겨지기도 하지만, 얼마 전에 일대종사 보고는 와...그래도 왕가위다,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아..그렇군요. 저는 코멘터리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라, 어떤 영화들은 코멘터리를 듣기 위해 DVD를 구입하기도 합니다. 물론 또 그중 상당수의 영화들은 아이 참 정말 내용 허접하네, 싶은 코멘터리들도 많지만..아무튼 확실히 칭찬만 하는 코멘터리보다는 까는(?) 코멘터리들이 재미있기는 해요.^^

맥거핀 2013-11-28 23:21   좋아요 0 | URL
네..같은 영화를 봐도 다들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나쁨에도 농도가 있고, 또 좋음에도 농도가 있죠. 아무튼 그 때는 대학 잔디밭에 턱 앉아서 영화를 보던 그런 때였으니까요. 지금은 추우니, 바닥에 풀 뭍으니, 소리가 제대로 잘 안들리니 불평하면서 안보겠죠. (쓰다 보면 슬플 줄 알았는데, 감정이 메말랐는지 안 슬프네요.)

근데 이상하게도 예전에 대학 때 이러저러 본 영화들은 기억이 잘 나는데, 최근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은 잘 기억이 안나요.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도 약간 그와 관련된 부분이 있는데, 이제 기억보다는 기록에 의존하게 되요. 그리고 기록해 놓지 않은 것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맙니다. 예전에는 기록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는 했었는데...영화들이 나빠진 것인지, 아니면 내 기억력이 나빠진 것인지, 아니면 훨씬 둔감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아마도 맨 마지막 이유 때문이겠지요.)
 

 

 

 

 

 

 

 

 

 

 

 

그래비티 Gravity, 알폰소 쿠아론, 2013.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1.
<그래비티>는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중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상한 영화다. 아니 분명 이 말은 오해의 소지를 담고 있다. 영화로 인해 많이 나온 이야기이긴 하지만 중력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구와 근접한 우주 공간에는 여전히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물론 지구와 멀어진다고 해서 중력이 '아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주 미미하기는 하나 중력은 여전히 작용한다. 또한 많은 이야기들이 지적했듯 <그래비티>는 실제와 맞지 않는 영화 나름의 과학법칙이 존재한다. 아무튼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과학법칙들이란 '영화에서 말한' 과학이다). 그런데 마치 중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런 중력과 (위성이) 지구를 도는 원심력이 상쇄되기 때문이다. 즉 그곳에는 여전히 힘의 법칙들이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기는 힘과 회전하는 힘. 영화의 주인공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는 회전하는 힘, 즉 지구 주위를 도는 위성잔해들에 의해 죽음 가까이까지 이르렀다가 당기는 힘, 즉 지구의 중력에 의해 살아 돌아온다. 전혀 멋대가리 없이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애초에 무(無)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가 "소리도 산소도 없다. 외계인도 우주전쟁도 없다."와 같은 '없다' 시리즈를 메인카피로 내세웠을 때, 그것은 그 대신 보여줄 다른 '꺼리'가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 '꺼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잊고 있는 것들이다. 즉 소리도 산소도, 그리고 중력도 없는(사실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공간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관성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같은 뉴턴의 구닥다리 법칙들이다. 예를 들어 줄이 끊어진 스톤 박사는 한 번 돌기 시작하더니 계속 돌며 떠밀려나간다.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혹은 다른 무엇인가가 그녀를 붙잡지 않는다면 그녀는 영원히 돌며 떠밀려가면서 죽음의 길로 갈 것이다. (지구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우주에서 뉴턴의 관성은 그녀를 죽음으로 내모는 무서운 역학이다. 그러나 그런 죽음의 길에서 그녀를 구원하는 것 역시 뉴턴의 역학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말이다. 우주에서 우주선이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뒤 꽁무니로 무엇인가를 맹렬히 쏟아내기 때문이다. 그 힘의 반작용으로 우주선은 앞으로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이를 간단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말이 안된다는 지적을 받기는 했지만) 스톤 박사가 소화기를 추진체로 이용하여 위험으로부터 이동하는 장면이다.  

2.
이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것은 영화에서 눈에 보이는 힘으로 주로 나타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대화라는 것도 일종의 작용과 반작용이다. 극의 초반부를 이루고 있는 쓸데없어 보이는 대화들, 예를 들어 우주인들과 지구의 본부(휴스턴)가 교환하는 대화들, 그리고 우주인들이 교환하는 이야기들은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내용들도 있지만, 외부인인 우리가 보기에는 쓸데없어 보이는 농담들이 더 많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그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거나, 혹은 누군가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이 그 사이에서 확인받고 싶은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선과 우주선 외부의 우주인을 연결한 물리적인 끈과 동일한 기능을 가진다. 그러니 그들은 우주선과 연결한 물리적인 끈이 끊어졌을 때보다 우주선과의 교신, 즉 정신적인 끈이 끊어졌을 때 더 큰 멘붕에 빠진다. 끈을 잡아당기면 다시 우주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신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시 우주선으로, 혹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은 여전히 작용-반작용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세계는 관성의 세계, 죽음과 가까운 세계이다. 영원한 회전, 혹은 줄을 손에서 놓고 영원히 멀어지는 것. 그것은 영화 속에서 실제로 보여지거나 이야기로 확인되는데, 예를 들어 아이를 잃어버린 스톤 박사가 라디오를 들으며 몇 시간동안 끝없이 운전만 했다고 말한 경험은 그것은 관성에 대한 투항일 것이었다. 관성에 내맡겨서 자신을 죽음으로 가까이 내모는 것이다. 아마도 스톤 박사가 기꺼이 먼 우주로 떠나온 것도 분명히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처음과 끝을 제외하자면 이 곳은 관성의 세계니까. 영원히 지구 주위를 도는 세계. 위성은 한 번 지구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 엄청난 힘(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필요하지만, 그 후에 그 위성을 지배하는 것은 위성의 원심력과 지구 중력의 평형인 관성이다. 그 궤도에 한 번 오르게 되면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3.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는 아무런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즉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힘이 상쇄되는 것이다. 다시 스톤 박사의 경우로 돌아간다면, 죽은 아이는 스톤 박사의 마음에 그대로 있지만, 죽은 아이가 스톤 박사를 당기는 힘을 운전이나 우주에서의 위성 회전과 같은 원심력으로 상쇄시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영원히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영원히 라디오를 들으면서 운전하거나 영원히 지구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서 죽은 아이를 영원히 잊을 수 있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거나 혹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죽음과 맞닿아 있는 길이기 때문이며, 인간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거나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해 보자. 스톤 박사는 그래비티, 즉 중력이라는 힘을 피하여 우주 공간에 왔다. 지구의 중력, 아이의 기억은 그녀를 잡아당기고, 그녀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지구를 돌다가, 이제 우주를 도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이곳은 언뜻 무중력의 공간, 다시 말해서 힘이 없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순간 힘이 작용하고 있다. 지구의 중력과 물체의 원심력의 균형으로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을 뿐, 사실은 힘이 존재했다. 그녀는 균형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 존재하는 힘들을 깨닫는다. 물체의 원심력이 없어져 관성으로 영원히 우주 어딘가로 떠밀려갈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여전히 그녀를 지배하고 있던 중력의 따스함, 혹은 아이에 대한 기억을 깨닫는다. 즉 아이를 잊기 위해 계속 무엇인가를 도는 그녀를 돌 수 있도록, 죽음으로 떠밀려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여전히 그 가운데에 들어가 있는 아이였다. 즉 우리에게는 완전한 무중력, 혹은 완전히 힘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란 없다. 우리는 가능한 힘들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고, 사실상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그 가능한 힘들 중에 죽음은 가장 최후의 불가피한 고려대상이다.

결국 스톤 박사는 그것을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된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죽음을 선택한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그것에 내몰리는 것이다. 최후까지 교신을 하려 애쓰지만 그 교신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은 다음, 그녀가 돌연 살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 죽고자 하는 액션이 살고자 하는 의지의 동일한 힘임을, 즉 결국 그것에서 최후까지 살고자 하는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녀가 만들어낸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는 이렇게 표현해준다. 착륙은 이륙과 같다고. 다시 말해서 그 얘기는 우주선이 남은 최후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며, 그녀 안에 살기 위한 에너지가 남아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기 위한 에너지란 죽기로 결심하고 산소를 끄는 힘이다. 아니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구의 중력을 뚫고 이륙한 힘이다. 즉 착륙하는 힘과 이륙하는 힘은 같다. 무엇인가를 떠나오기 위해 이륙을 결심한 자라면, 무엇인가로 돌아가기 위해 착륙을 결심할 수 있다.

이 마지막은 말하고 있다. 떠나오기 위해 혹은 잊기 위해 노력이 필요했던 것처럼 돌아오기 위해 혹은 기억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의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돌아오는 것에는 댓가가 따른다. 어쩌면 돌아오면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더 괴롭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댓가가 따른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돌아올 수밖에 없다. 영원한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과 거의 마찬가지인, 우주공간을 영원히 떠도는 삶이다. 돌아오는 것, 혹은 그래비티.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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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나 여러 장점들이 있음에도 이 영화 <그래비티>를 걸작이라고 부르기가 주저되는 부분들이 있다. 개인적 서사를 너무 쉽게 전체로 확대하거나 혹은 전체를 너무 쉽게 개인에게 봉합하는 것, 서사를 전개하는 간편한 방식(이는 사실 불가능한 귀환이다), 익숙한 할리우드의 가족주의, 영웅주의 등 언뜻 보이는 부분들도 그렇지만(그리고 왜 사고는 항상 러시아나 북한이나 중국이 치는가), 조금 더 의아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영화의 흔히 말하는 '고난의 체험'이라는 구조이다.

물론 몇 가지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영화에서 온전한 체험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고통을 중점적으로 묘사한다고 해서 더 좋은 영화가 될 수는 없으며, 고난을 받는 스톤 박사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웅장한 음악을 우리 귀에서도 빼버린다고 해서 그다지 더 좋은 영화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고통이 우리에게 온전히 전달될리는 만무하다. 주인공이 목마름으로 허덕인다고 해도 우리는 옆에 놓인 콜라를 한모금 들이켜면 되며, 스톤 박사가 모든 사람과 교신이 끊겨 공포에 떨 때도, 우리는 여전히 최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있다. 아니 도리어 영화는 고통스러움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는 이들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을 동일하게 겪는다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니다. 우리가 영화가 "실감이 난다"고 이야기할 때, 그 실감은 적어도 고통이 상당 부분 제어된 실감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쩌면 영화는 쾌감을 전달하기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고통을 전달하기에는 부적합한 매체일는지도 모른다(도리어 글이 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관객에게 당신이 이것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고문받는 자의 위치에 카메라를 놓고 관객을 고문받는 자의 자리에 위치시킨 다음 고문하는 자를 보도록 했던 <남영동 1985> 같은 영화도 결국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영화관의 자리가 저 고문받는 자의 자리와 얼마나 먼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럼으로써 그 고문에 멀어져 있는 자신의 안도감에 깃든 내면의 허위와 공포를 맞닥뜨리게 하는 것은 아닐는지. 그럼으로써 지금 영화 밖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5.
그런데 이 영화 <그래비티>는 그러한 방법론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이 영화는 이안의 <라이프 오브 파이>와 여러모로 비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이것이 결국 홀로 헤쳐 나와야 하는 재난이라든가, 결국은 땅을 밟는 것이 최후의 목표라는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지만, 영화의 구조로 볼 때도 비슷한 점이 있다. 그것은 두 이야기 모두 사실은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그 고통의 많은 부분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사실 거대한 재난, 혹은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을 보았음에도 주인공의 고통보다는(혹은 적어도 고통만큼이나)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이나 멋진 지구의 풍경을 기억한다(또한 이는 두 영화 모두 일종의 환상씬이 등장한다는 점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관객이 이 두 사람 모두 살아서 귀환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주인공 파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이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으며, <그래비티>에서는 코왈스키가 떠나가는 장면이 나올 때 스톤 박사의 귀환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혹은 그런 장면이 없더라도 스톤 박사는 당연히 살아돌아올 것이라고 거의 모든 관객이 믿는다. 왜? 이건 우리의 믿음에 보답하는 할리우드 영화니까). 아무튼 이 두 사람의 재난은 고통스러운 경험보다는 도리어 멋진 체험이나 아름다운 기억에 가깝다.

그 이유를 한편으로 카메라에서 찾을 수도 있다. 영화의 초반부 스톤 박사를 지켜보던 카메라가 그녀의 헬맷으로 가깝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시점숏으로 전환되는 장면이 있다. 허문영이 <씨네21>에서 '외설적'이라고 말했던 그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영화가 본격적으로 체험으로 전환하겠다는 신호다. 그리고 이후에도 몇 장면은 그녀의 시점숏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은 이 시점숏들이 그녀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내가 기억하는 예외적인 거의 유일한 장면은 얼굴이 뚫린 동료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녀가 죽기로 결심하거나, 지구로의 귀환을 견뎌내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녀 옆에서 그녀를 비추고 있으며, 이 때에는 영화는 체험이라기보다는 관찰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도리어 그녀에게 가장 고통스러웠을 장면, 예를 들어 코왈스키와 줄을 잡고 있는 장면 같은 것은 (나쁘게도) 스펙터클하게 찍혔다. 물론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은 그녀의 시점숏으로 보여지는 지구의 장관이다. 즉 우리에게 체험을 극대화하여 느끼도록 하는 장면은 사실 그녀의 고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이 체험은 결국 무엇을 위한 체험이란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영화 초반부의 카메라는 허문영의 말대로 '외설적이다'. 허문영은 다른 의미에서 외설적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관객을 향한 그 장면의 무람없음 때문에 외설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6.
그래서 지구로 돌아와 발에 땅을 내딛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씬에서 다시 명백한 1인칭 시점숏으로 돌아오지만 그 체험에 미심쩍은 잔상이 남는다. 그녀의 귀환과 땅에 발을 내딛는 첫 발걸음에 응원의 의미로서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 웅장한 첫 발걸음에 그렇게 마음이 동하지가 않는다. (또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적어도 이 뒤에 파이의 고백을 붙여놓는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 영화와는 조금은 다른 길을 간다.)

반 농담으로 한 마디 붙여두자면 최근에 들어서 어떤 영화가 좋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을 때, 진정으로 좋은가, 좋지 않은가를 나는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생각이 든다면 진정으로 좋은 영화다. 좋은 영화다,라고 생각이 든다면 진정으로 좋은 영화가 아니다. 나는 <그래비티>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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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11-15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왜 영화DB가 연결이 안되지...근데 이럴 때가 아니라 서평단 리뷰 써야하는데..책이 참 진도가 안 나간다..;

아이리시스 2013-11-1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접힌 거 이렇게 길꺼면 왜 접은 건데요, 왜요, 왜, 왜, 왜.

정말 추워요, 제가 토욜에 응답하라 보면서 혼자 겨울모드 되어가지고 겨울잠도 좀 자고 바깥활동도 줄이고 눈왔으면 좋겠다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 거기는 눈이 왔다는데 그게 진짭니까, 맥거핀님?

겨울은, 남쪽 도시에서 겨울은, 어쩐지 공짜로 먹는, 뭔가 잃어버린 텅 빈 계절 같아요 :)
그나저나 저 아직 리뷰 다 안읽었음. (이런 댓글 좋아하죠? 징징대는 거)

맥거핀 2013-11-20 16:02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까는 내용이라 덜컥 겁이 나서요. 근데 뭐 예전에도 엄청 호평 일색이었던 영화(예를 들어 <아바타> 같은 영화) 비판하는 글 쓸 때 살짝 긴장하고 그랬는데, 뭐 악플도 없고, 거의 무플이라 허허허...참 쓸데없다는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들 다 예스 할 때, 아니오 하는 글을 쓰려면 왠지 걱정이 되요. 허허.

그날 서울에 눈이 오기는 왔었나요? 눈 못 본 사람들 엄청 많을텐데 저도 온다는 말만 인터넷에서 봤지 실제로 눈을 보지는 못 한 사람들 중에 한 명입니다. 눈도 오고 나면 겨울이 좀 실감이 날텐데, 저도 아직 겨울이 실감이 안나요.

요새, 여러모로 몇 가지 일들 때문에 글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그닥입니다. 힘 좀 내고 살아야 할텐데...(나도 징징)

Shining 2013-11-25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열심히 살아야겠다, 고 생각했고 좋은 영화라고도 생각했는데(먼 산...). 열심히 살아야겠다, 와 그냥 살아야겠다, 라는 이중적인 생각이 함께 들었어요 실은 하하하. 이런 생각은 해봤어요, 착륙 이후 스톤 박사의 삶이 정말로 드라마틱하게 달라졌을까. 그 때 그 숭고하기까지 한 다짐도, 일상의 부딪힘과 상실과 기억의 부재 속에서 다시 고통스러워지지 않을까. 나를 각성시킬 무언가가 필요해 더 큰 자극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는 생각. 그래서 삶이란 얼마나 지루한지. 최초란 얼마나 막대한지. 그런 생각이요.

영화가 쾌감을 전달할 순 있어도 고통을 전달할 수 없을 거라는, 말씀엔 저도 동의합니다. 극장이란 공간, 화면과 나 사이의 거리, 영사기와 스크린의 도달 정도. 그렇다면 대체 나는 무엇을 하려고 여기 앉아있나 문득 생각할 때도 많아요. 인간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고통이나 고난도 이해할 수 없으면서. 안전한 곳에 앉아 울고 웃으려고. 그렇게 자문하다가도 영화를 봐요, 네, 그렇게 되네요.

우리는 그녀처럼 우주 공간에 혼자 머무를 일이 아마도 없겠지만 그녀가 가진 두려움과 절망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단언할 순 없는 것 같아요. 극단적인 가정이고 상상이지만, 그래서 서사로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겨도 이상하죠, 저는 그녀가 슬펐어요.

Shining 2013-11-25 14:38   좋아요 0 | URL
(아이님께 쓰신 답글 읽고 쓰는 덧)

저도 <아타바>를 혹평...그럼에도 걸작이라고도 생각하긴 했어요. 영화의 역사적 측면에서. 하지만 그 서사.... <인셉션>같은 경우도 다들 엄청 열광했는데 저는 주인공 캐릭터가 영 거슬려서 혼자 (속으로) 혹평한걸요... 그런데 제가 사실 <인셉션>을 꽤 좋아한다는게 이상한 점;; 잘 만든 영화같은데 별로 좋지 않은 영화도 있고 헐렁한 점이 있어도 무척 끌리는 영화도 있잖아요, 신기하게도. 근데 왠지 눈치 보이긴 해요, 모두가 호평하는데 혼자만 혹평하려면. 소심한 저는 그냥 의견을 안 쓰는 방법을....

맥거핀 2013-11-27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확실히 Shining님 식대로 생각해보면 더 슬픈 결말이기는 합니다. 드라마틱한 끝과 시작이 아니라, 다시 반복으로 돌아가는 루틴으로 생각해보면 말이죠. 그것을 보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일까요? 그것을 그렇게 보는 것이 더 세상에 대해서 염세적이라는 증거일까요?

아무튼 저는 Shining님처럼 그녀가 슬펐다,라는 생각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감동..이라는 단어를 쓸 때에 좀 의아했습니다. 감동이 나쁘다 혹은 감동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감동이라고 할 때에 그 감동이 과연 무엇에서 어느 부분에서 오는 것일까 의아해서 말이죠. 그 '무엇'이 무엇인지 정말 조금 궁금했습니다.

물론 의아한 것은 그런 것만이 아니지요. 여전히 제 자신이 영화를 보는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카운슬러>를 보러 극장에 갔는데요.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CGV의 지루한 광고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과연 오늘 무엇을 보러 여기에 온걸까. Shining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글을 봐서 분명히 나는 오늘 비참한, 혹은 누군가의 고통을 보게 된다고 알고 있는데, 그 고통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왜 굳이 여기에 왔던가. 그것은 영화가 잘 만들었다, 못 만들었다, 혹은 '영화'라는 것을 보는 즐거움과 다른 지점에 위치한 질문입니다. 나는 단지 고통을 즐기러 온 것인가, 아니면 고통 이상의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여기가 안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약받고 싶은 것인가,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맥거핀 2013-11-27 01:16   좋아요 0 | URL
흠..맞아요. 저도 서사 때문에 <아바타>를 비판했었는데, 그 글을 올리고 한 30분이나 되었을까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공격적인 댓글을 달았더라구요. 영화를 다시 보고 오라고..

그래서 엇..하면서도 그래 이거야!,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그 댓글을 반박하는 댓글을 달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냥 그 두 분 싸우지 말라고 중재하고 끝냈습니다.

아무튼 그 글에는 그렇게 달랑 두 개의 댓글만 달렸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입니다.

Shining 2013-11-28 21:11   좋아요 0 | URL
음, 아마도 저는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것에 엄청난 회의를 가진 사람이라 이런(?) 영화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아직까지도 도무지, 인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도통 믿지 못하겠습니다....(물론 반대의 근거도 무수하기 때문에 확신은 할 수 없지만요), 안타깝지만요.

아마도 여기서의 감동, 은 숭고함, 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저도 감동 비슷한 걸 받은 기분이었는데, 생각해보면 저는 그녀가 대단하기보단 짠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감동, 보다는 슬펐다, 는 마음이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전혀 다른 예지만) 가끔 맘껏 슬퍼지고 싶어서 혼자서 꺼내보는 영화들이 있는데. 사실 이게 무슨 짓인지. 영화를 이용하는건지 활용하는건지. 슬프지만 보는것인지 슬프려고 보는건지 우습고 슬플 때가 있어요, 전혀 다른 예지만요(웃음).

그나저나, 두번째 댓글 정말입니까? 재밌네요, 하하.

맥거핀 2013-11-28 23:33   좋아요 0 | URL
까기 위해 오로라 공주, 같은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심리일까요. 현실에 있는 정말 부조리한 일들은 대놓고 깔수가 없으니까 드라마라도 보면서 대놓고 까고 싶은 심리와 비슷한 것일까요. (그러고보면 임성한 씨가 확실히 영리해요.) 카타르시스라고 얘기하기는 힘들겠지만, 그 비슷한 어떤 것을 나는 어쩌면 원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Shining님의 댓글을 읽다보니.

그렇군요. 숭고함...숭고함이라..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는 숭고함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영화라는 것과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먼산.^^) 아. 그런데 숭고함이라는 것을 생각하다보니 최근에 EIDF에서 <블러드 브라더>라는 다큐를 보고 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니 이만 댓글을 마쳐야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아..그러고보니 'EIDF 영화 단상들 2' 써야 하는데..이래서 제목에 함부로 숫자를 달면 안되요..;)
 

 

 

 

 

 

 

 

 

 

 

화이, 장준환, 2013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장준환의 신작 <화이>는 아직까지 회자되는 <지구를 지켜라!>와 마찬가지로 가히 캐릭터들의 열전이라 부를만 하다. 장준환의 영화는 사실상 스토리 중심의 영화라기보다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전작에서도 일단 주목을 끄는 것은 특이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들이었고, 이번 영화 <화이>에서도 (개인적으로) 흥미를 끌었던 것은 스토리보다는 그 캐릭터들이었다. 전작에서도 그렇지만, 이 영화의 수많은 캐릭터들도 사실 보통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영화의 중심축인 낮도깨비 강도단의 다섯 명의 캐릭터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들과 한통속인 형사(박용우) 혹은 이들을 뒤쫓는 형사(김영민)도 그러하며, 또다른 갈등의 중심축인 진사장(문성근)이나 그의 수하인 실장(유연석)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모두 일종의 괴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다시 말해서 영화 <화이>는 부러 영화의 모든 캐릭터들을 괴물들로 채우고 질문을 하는 영화다. 괴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두 가지 중의 길, 그 중의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가? 하나는 그 괴물들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낮도깨비의 리더이자 화이(여진구)의 심리적인 아버지 석태(김윤석)이 제시하는 길. 그가 말하는 괴물이 되어야, 괴물을 보지 않게 된다는 말 자체는 그다지 잘못되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것도 분명히 가능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다른 하나는 괴물과 맞서서 모든 괴물을 가능한한 제거하는 것이다. 주인공 화이가 결국 선택하는 길. 아직도 수많은 괴물들은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지만, 화이에 의해 적어도 위에 제시된 괴물들은 모두 제거된다(화이가 직접적으로 제거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이들 모두는 화이가 제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창고에서의 대규모 총격씬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엇인가 찜찜한 부분이 남는다. 과연 이 둘은 다른 길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괴물인 것은 그들에게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맥락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 패턴이나 사고의 연원을 잡아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러한 행동을 보여줬을 때 이렇게 나올 것이다, 혹은 이 행동 뒤에는 이렇게 움직일 것이다라는 어느 정도의 패턴과 맥락이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낮도깨비 강도단이 범죄 행각을 벌일 때를 보면, 이들은 거의 무정형적인 패턴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조직의 브레인이자 설계자인 진성(장현성)은 이렇게 멋대로 할거라면 계획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화를 낸다. 즉 괴물이 무서운 것은 그들이 우리들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여기에서 감독의 전작 <지구를 지켜라!>를 떠올릴 수도 있다. 외계인, 혹은 외계생물체의 가장 두려운 점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우리와 다르다는 점이다. 아마도 외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인가가 미래에 온다면, 분명히 우리가 예상한 형태와 방식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우리의 예상은 결국 '인간의' 예상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맥락을 알 수 없는 것은 사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사실 영화 <화이>는 언뜻 보면 매끄러운 플롯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석연치않거나,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많다. 예를 들어 이들 낮도깨비 강도단이 이렇게 모이게 된 연원에도 여전히 조금 미심쩍은 부분들이 남아있고, 이들 각자의 과거들, 그리고 이들과 형사들과의 관계, 혹은 임형택(이경영)과의 관계에도 약간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남아 있다(물론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의문 중의 하나는 왜 이들이 화이를 키우고자 했는가,라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보면 맥락을 알 수 없는 것은 절대악, 괴물의 반대편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임형택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 인상적이고도 기이해 보였던 장면 중의 하나는 임형택 부인의 병상 앞에서 펼쳐지는 석태의 과거 회상이다. 이 과거 회상에서 임형택은 그야말로 선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해한 인물마저도 감싸안으려 애쓰는 그런 인물이다. 즉 사실 여기서의 그의 행동 패턴은 보통사람들에서 벗어나 있다. 편의상 석태를 '맥락이 없는 악'이라 지칭한다면, 임형택을 '맥락이 없는 선'이라 부를 수도 있다. 즉 절대적이고 맥락이 없다는 점에서 석태와 임형택은 거울상이다. 어쩌면 석태의 임형택을 향한 증오도 그런 것에서 연원한 것이 아닐까. 당신과 나는 매우 다르지만, 어떠한 면에서는 같다. 다시 말해서 임형택은 맥락이 없다는 면에서 역시 다른 이름의 괴물이고, 석태는 그에게서 자신의 옆에서 계속 따라다니는 괴물을 본다. 하얀 괴물을. (그러므로 맥락이 없는 연결처럼 보였지만, 어떻게 보면 바로 그 시점에서의 석태의 회상은 적어도 그에게는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거기에서 그렇게 묻고 있다. 사실은 당신들도 괴물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의 중간에 있는 화이가 있다. 그의 선한 심성, 혹은 그림을 그리는 재능 등은 그의 생물학적인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지만, 그의 운전실력이나 냉철한 판단력, 민첩함, 혹은 어떤 잔인함 같은 것들은 그의 아버지들로부터 물려받았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마도 가장 이상해 보이는 설정은 그가 석태와 마찬가지로 괴물을 본다는 설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보는 괴물의 형상은 특이하다. 그가 보는 괴물의 형상은 언뜻 나무 뿌리가 붙잡고 있는 괴물처럼 보인다. 나무 뿌리가 붙잡고 있는 괴물이라면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그를 어떻게든 나무뿌리, 그러니까 선한 핏줄이 붙잡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혹은 어떻게든 괴물이 되기를 강요하는 석태에 맞서서 그의 근원에 있는 선이 붙잡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던 간에 그를 지금까지 지탱해 온 것은 그의 근원에 있는, 그의 부모로부터 온 선함이다. 그런데 혹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은 나무 뿌리가 붙잡고 있는 괴물이 아니라 나무 뿌리로 만들어진 괴물이다. 나무 뿌리가 어지럽게 얽혀서 만들어진 괴물이다(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을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온당해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온 선함도 결국 맥락이 없는 무엇이며, 나무 뿌리가 붙잡고 있는 괴물이건, 혹은 나무 뿌리로 이루어진 괴물이건 본질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다. 이렇든 저렇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괴물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사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신도 괴물이 되는 것, 다른 하나는 괴물에 맞서서 최대한 괴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찜찜한 질문이 남아있다. 괴물에 맞서서 괴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거하는 누군가는 괴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도 결국 괴물이라고 답한다면 두 가지의 구분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렇든 저렇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 영화 <화이>의 메인 카피는 '괴물을 삼킨 아이'이고, 그런 관점에서라면 이 카피는 중의적인 의미로 읽힌다. 괴물을 삼킨 아이는 괴물을 제거한 아이라는 뜻도 되지만, 괴물이 된 아이라는 뜻도 된다. 이것은 어느 쪽일까, 혹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는 디스토피아의 전망일까. 괴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결국 괴물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얘기일까. 장준환은 쉽게 답을 주지 않는다. 그가 마지막 보여준 것은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 총을 담아 떠나는 화이의 뒷모습 뿐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왜 키웠는지 그리고 결국 무엇을 길러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덧.
비유나 상징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이 희생당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비유나 상징을 시각화해서 보여주려 애쓴다. 나무 밑에 들어가는 아이, 괴물의 형상, 다섯 개로 나뉘어진 아버지...이 다섯 개의 나뉘어진 아버지는 사실 원래는 하나다. 다만 그것을 눈에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두기봉이 <매드 디텍티브>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다섯 개로 나누었을 뿐이다(화이는 이 아버지를 쓰러뜨리기 위해 그러니 인간을 쓰러뜨리듯이 먼저 머리를 겨누고, 팔다리를 제거한 후, 최종적으로 심장을 찌른다). 좋은 영화들은 탄탄한 서사 속에서 상징이나 비유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도록 하지만, 이 영화는 상징이나 비유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스토리를 희생시키는 면이 있는데, 그 결과 <씨네21>에서 송효정이 지적했듯이 영화가 꽤나 산만해지고, 밀도는 점점 뒤죽박죽이 되어간다(사실 <지구를 지켜라!>도 스토리가 탄탄한 편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한편의 영화가 더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그 '또 한편의 영화'이든 다른 무엇이든 장준환의 다음 영화도 빨리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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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활동이 슬슬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처음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슬슬 나태와 관성이 고개를 드는 때이기도 하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늘 핑계에 불과하다. 조금 더 절실한 마음으로 책들을 보아야만 한다.

 

 

 

광신 / 알베르토 토스카노 / 후마니타스

 

'설국열차'의 머리칸 부근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광신을 가진 자들의 대결을 본다. 환각물질인 크로놀에 취해 정신을 못차리는 남궁민수와 역시 환락과 크로놀에 취해있는 일군의 무리들의 대결. 아마도 우리의 시대는 지금 그 순간에 거의 다다랐거나, 아니면 그 순간을 넘어서 머리칸의 문을 열어제치기 직전일 것이다. 물론 머리칸을 연다고 해도 그렇게 나아지는 것은 없다. 거기에는 더한 광신자이자 열차성애자 윌포드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남궁민수처럼 어떻게든 문을 여는 것이 해결책일까. 모든 광신들의 근원인 크로놀을 합쳐서? 그가 창 밖에서 보았다는 무엇인가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의 환상에 불과했을까. 우리는 답이 없는 채 도박을 해야하는 위험한 상황에 점점 내몰리고 있다.

 

광신 없는 세계는 이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광신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광신은 남궁민수의 그것처럼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무엇인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좋을지 나쁠지는 광신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달려있다. 

 

 

일베의 사상 / 박가분 / 오월의봄

 

아마도 그런 광신의 한 단면이 '일베'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베에는 온갖 것들이 흘러들어왔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다시 흘러나간다. 그곳은 사회의 온갖 재료들이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오염되어 흘러나가는 거대한 역정화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마치 카오스처럼 보이는 그곳은 나름의 규칙과 나름의 패턴과 나름의 팩트로 중무장한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책을 쓴 청년 논객 박가분의 말이다(사실 그 '일베(일간베스트)'라는 이름에서도 우리는 어떤 패턴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청년의 시각으로 '일베'라는 '청년들의 공간'을 보는 것은 노땅들의 분석과는 또다른 지점을 던져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 박가분의 글들을 재미있게 읽기도 했다.

 

 

파멸의 시대 저항의 시대 / 크리스 헤지스, 조 사코 / 씨앗을뿌리는사람

 

물론 그러한 광신의 이면에는 망가져가는 절대다수의 삶이 있다. 무엇인가에 취해 있지 않고서는 버티기 어려운 현실의 그늘이 짙게 우리들에게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 책은 미국의 자본가와 자본주의가 인디언, 흑인, 유색인종의 희생을 먹고 자라났다고 말하는 책이다. 물론 절대다수의 삶을 망가뜨리는 미국 기업 자본주의의 실상은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코믹 저널리즘으로 잘 알려진 조 사코의 그림이 가미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는 이미 팔레스타인이나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 등을 코믹(comic)이라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다루며, 이야기를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다. 아마도 이번에도 조금은 다를 것 같다.

 

 

리딩 / 크리스토퍼 히친스 / 알마

 

그러한 광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고 논쟁적인 태도를 취했던 이들 중에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같은 이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유작 <리딩>은 전에 출간된 <논쟁>과 본래 한묶음이었던 글들로 <논쟁>이 주로 칼럼에 가까운 글들을 담고 있다면, 이 책은 주로 서평들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글의 성격은 조금 다를지라도 그가 치를 떠는 것들은 여전하다. 그것은 전체주의, 종교적인 독단, 테러리즘, 국가폭력 등등의 소위 '광신'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현실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끄집어내기 위해 책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쩌면 폭압적인 현실에 맞서는 우리 시대의 책읽기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영화 같이 볼래요? / 김영진 외 / 씨네21북스

 

조금 쌩뚱맞지만 솔직히 말해서 서평단이 끝나기 전에 영화에 관련된 책을 한 권 쯤 읽고 싶었다. '카쿠군'님이 추천하셨길래 이때다 싶어서 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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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1-04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베'가 하나의 단어가 되어버렸네요... ㅠ
저런 신조어가 생겨나는 사회가 조금 서글프네요.

맥거핀님, 잘 지내시나요?
이런 활동은 정말 부지런해야 가능한거 같아요, 홧팅~ 좋은 책들 골라내셨네요.

맥거핀 2013-11-04 21:52   좋아요 0 | URL
썩 유쾌하지는 않은 말이죠. '일베'를 막는다거나, 그들을 일종의 범법자 취급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닌듯합니다. 지금 서평단 때문에 표창원씨의 <공범들의 도시>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표창원씨가 강조하는 것이 처벌보다는 예방의 문제라고 하는데, 그에 공감합니다. 먼저 그러자면 그 메커니즘을 알 필요가 있겠죠.

부지런하지 않고 허덕허덕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번달 책도 지금 겨우 읽기 시작했군요. 마녀고양이님도 잘 지내시죠? 가끔 서재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참 부지런하십니다.^^

가연 2013-11-04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신을 주제로 책들을 고르셨네요. 리딩이 겹치는데요ㅎ 광신, 은 저도 추천할까 고민했었기는 하지만.. 짐멜의 돈의 철학, 이 너무 눈에 띄어서 결국 놓아두었네요.

맥거핀 2013-11-06 18:25   좋아요 0 | URL
저도 돈의 철학,을 추천할까 하다가 결국 안되지 않나 싶어서..가라타니 고진의 책도 역시 그간으로 볼 때 안된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구요. (사실은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서평을 쓸 자신이 없어서... ) 크리스토퍼 히친스 책은 일단 재미있으니까요. 즐거운(사실 그렇게 즐거운 내용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 2013-11-05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단 활동이 그렇긴 하더라구요. ^^ 그렇게라도 읽으니 읽게되는 측면도 있고 좋은 책 소개도 이렇게 하게되구요. 마음에 들어오는 책 몇 권 담아갑니다. 좋은하루 보내세요.^^

맥거핀 2013-11-06 18:27   좋아요 0 | URL
네..이번에는 현재 추천도서 0권 선정의 위업을 달성중입니다만, 뭐 이 참에 안 땡기는 책도 보고 그러는거죠(분위기를 보니 잘하면 이번에 1권 될지도..). 그리고 영화도 그렇듯이 사실 기대하고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EIDF(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본 영화 단상들 첫번째.

 

 

 

부즈카시(Buzkashi!), 나지브 미르자, 2012

낯선 땅에서 벌어지는 낯선 스포츠에 대한 그러나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 '부즈카시'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벌이던 놀이에서 유래한 전통 스포츠로 타지키스탄에 널리 퍼져있다. 이는 죽은 염소를 땅에 놓고, 달리는 말을 타고 재빨리 그것을 '잡아채서' 정해진 곳까지 이동시키면 득점을 획득하는 게임으로, 많게는 백명이 넘는 인원(과 말)이 동시에 참여하기 때문에 매우 격렬할뿐더러, 늘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도 또 그렇다고 해서 또 그렇게 무모한 위험만이 있는 것만은 아니며, 박진감과 스릴이 넘치는 게임이기도 하다. 영화 <부즈카시>는 이 '부즈카시'에 선수로 참여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축으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개인 대 개인으로서 게임에 참가하는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는 베테랑 챔피언 아잠과 현대식 훈련으로 팀을 짜서 게임에 참가하는 크루세드, 그리고 새롭게 게임에 참여하는 젊은 유망주 아스카가 그들이다.

여기에는 익히 보아왔던 충돌 지점이 있다. 전통적인 훈련 방식과 전통적인 게임 방식을 존중하고 그에 최선을 다하는 아잠과 현대적인 훈련 방식으로 새로운 전환을 꾀하는 크루세드의 충돌이 그것이다. 아잠은 팀을 짜서 훈련하고, 팀을 짜서 게임에 참여하는 크루세드 측을 '마피아'라고 부르면서 비난하고(일종의 팀으로서 게임을 하게 되면, 당연히 유리할 수밖에 없다. 화투판에 팀을 짜서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면 크루세드는 한꺼번에 백명이 넘는 인원이 뛰어드는 현재와 같은 방식은 스포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꿈은 이 '부즈카시'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유망주로서 그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아스카가 있다. 그는 아잠의 방식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크루세드의 방식을 택할 것인가. 그러니까 이 <부즈카시>라는 영화의 미덕은 일종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것에 있다. 특색을 가진 인물들과 그들의 충돌과 그 사이에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 많은 영화들이 꿈꾸지만 사실 잘 만들어내고 있지 못한 것을 이 영화는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 상에서의 충돌 외에도 다른 충돌들도 잡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유목의 공간과 빠르고 격렬한 부즈카시가 보이는 충돌 같은 것이 있다. 격렬한 부즈카시를 보여주는 사이사이에 느린 호흡의 장면들 - 예를 들어 아잠이 산등성이를 뛰면서 훈련하는 장면을 먼 전경에서 정지된 카메라로 잡아낸다거나 하는 장면들 - 을 삽입하고, 아주 가까이에 붙어서 말과 사람들의 충돌을 보여주다가도 카메라는 언뜻언뜻 아주 뒤로 물러나 먼 발치에서 그 스포츠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표정을 느리게 살핀다. 이러한 정과 동의 충돌은 어쩌면 이곳 타지키스탄의 현재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산과 양과 염소와 유목민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곳에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고, 느린 이곳에도 빠른 다른 것들이 점점 들어오고 있다. 크루세드의 훈련장에 울려퍼지던 빠른 비트의 음악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무엇인가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빠른 변화 속에 이들이 언젠가 사라질 운명의 것임을 우리가 예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슬퍼할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또 마지막에 새로운 탄생을 보여주기도 하니까. 아잠의 아들은 언젠가 의사가 될 것이고, 새로 태어나는 새끼 염소도 있으니까. 사라짐과 탄생이 교차하며 삶은 이어진다.

 

 

 

100m 위의 고독(The Solitary Life of Crane), 에바 웨버, 2008

에바 웨버의 이 27분짜리 짧은 다큐는 고공의 크레인에서 외롭게 일하는 기사의 하루를 다룬다. 영화가 취한 방법은 조금 색다른데,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크레인 위에서의 그들이 아니다. 사람 한 명 앉으면 꽉 들어차는 그 공간의 답답함이나 폐쇄성이 아니라,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보는 세계이다. 100m 위의 좁은 공간에서 그들은 세상을 관찰한다. 지상에서는 누군가가 집을 나서고, 집안을 청소하고, 옥상 위에서 파티를 즐기고, 혼자 앉아서 식사하고,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비오는 퇴근길에 우산을 쓰고 귀가를 재촉하고, 전화로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방에서 옷을 갈아 입는다. 영화는 우리가 크레인 기사의 입장에서 그 세계를 같이 보기를 바란다. 혼자 들어가서 24시간이 넘게 앉아있어야 하는 좁은 크레인 위에서, 사람들을 100m 위의 고공에서 멀리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좁은 크레인 위에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고독하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일 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도리어 가깝게 느낀다는 점이다.

때로는 100m 위의 고독한 크레인 기사들은 어떤 이의 생활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이 알게 된다. 그들이 매일 집안을 언제 청소하는지 알고, 그들이 밥을 주로 누구와 먹는지 알고, 누가 누구와 친한지 알고, 언제 일어나고 언제 잠자리에 드는지 안다. 그리고 그들이 때로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게 된다. 즉 역설적인 것은 그들은 고독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타인들을 바라보고 생각하게 됨으로서 고독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반면 대부분의 우리는 시끌복잡한 지상의 세계에서 고독하지 않지만, 나 이외의 타인의 삶을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고독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으로 고독했던 것은 다른 많은 삶을 바꾸기 위해 그런 곳에 올라갔던 김진숙 위원과 같은 이들보다 한번도 그런 고공의 크레인을, 그리고 크레인 위의 사람을 생각해보지 않은 우리들일 것이다.) 마지막, 영화는 런던 시내에 올라가 있는 수많은 크레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비춘다. 지상의 삶을 관찰하는 수많은 관찰자들이 그곳에 있다.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새로운 것을 쌓아올릴까 고민하는 이곳 서울에는 아마도 그보다 훨씬 많은 크레인이 있을 것이다. 고공의 관찰자들이 거기에 있다. 그들은 우리를 보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지 못한다. 

 

 

블랙 아웃(Black Out), 에바 웨버, 2012

늦은 밤, 불이 켜진 공터에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뭐 그다지 놀랄 건 없다. 어느 곳에서나 어두워질수록 나이든 사람들은 어떻게든 집으로 가고, 반면 청소년들은 집을 나와 집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가까이에서 본 아이들의 모습은 조금 색다르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 같은 일탈 행위들이 아니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이니까. 이곳은 서아프리카의 기니. 인구의 80%는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고, 그나마 가동되는 전기도 발전소 시설의 낙후로 번번이 끊기기 일쑤이며, 아이들은 '전기를 지원해주는 집'이 부럽다고 말하는 곳이다. 시험 기간이 되면 아이들은 공항 근처로 모여든다. 시험 기간이 되면 우리네 도서관이 붐비듯이 그곳에는 공항의 공터가 붐빈다. 늦은 밤까지 불빛이 공급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비행기 소음과 날벌레들 옆에서 그들은 수학 공식을 외우고, 인체의 기관을 살피고, 주요한 세계사의 사건들이 일어난 년도를 외운다. 그러므로 제기되는 것은 왜 이렇게 환경이 열악한가라는 물음보다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들이 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 두 가지의 물음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영화는 두 가지의 교차하는 축을 이용해서 보여준다. 하나는 기니의 열악한 현실이다. 정치는 군부 쿠데타 등으로 불안정하고, 발전소를 비롯한 제반 시설들은 낙후되어 있으며, 풍부한 자원들은 거의 모두 외국으로 반출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 그러한 현실을 보고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들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꿈은 대부분 공무원이나 정치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기를 바라며 그런 세상이 오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공항의 불빛 속에서 공부를 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영화의 마지막은 보여주는데, 학교의 최종 시험일에 아이들은 시험을 치르고 성적은 학교의 벽에 나붙는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라디오에서는 대통령궁이 괴한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고, 대통령은 피신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불안정한 정치에 조그마한 희망을 가져오리라 여겨졌던 대통령이 말이다. 그렇게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희망은 늘 무엇인가에 공격을 받는다. 아이들의 공부를 하겠다는 희망은 때로는 블랙 아웃(정전)에, 그리고 때로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부모들의 뜻이나 가족을 돌보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경제적인 부분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늙은 선생님은 힘주어 말한다. 삶의 본질은 희망이며, 희망 없는 삶은 죽음이라고 말이다. 희망의 친구는 늘 신념이다. 그 희망이 이루어지리라는 신념에 희망은 살아남고 삶은 이어진다. 

.................

무엇인가가 교차한다. 느림과 빠름, 정과 동, 전통과 현대, 이전 세대와 미래의 세대. 혹은 고독하지만 타인을 보는 사람들과 고독하지 않지만 타인을 보지 않는 사람들. 혹은 희망 없는 현실과 희망을 만들어내려는 노력. 좋은 다큐멘터리는 그렇게 교차하는 것들을 잡아내 그 교차점들과 가까워지는 것 혹은 멀어지는 것을 지그시 살펴보도록 함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숙고하게 한다. 물론 그 무엇인가 중의 하나는 그 다큐멘터리를 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교차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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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13-10-2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단락 격하게 공감해요. 영화를 보는 이유기도 하고.

맥거핀 2013-10-30 21:24   좋아요 0 | URL
다큐는 특히 더 그런 것 같아요. 생각을 하게 해주는 다큐들이라 좋았습니다.

아이리시스 2013-11-03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블랙아웃]은 제가 맥거핀님이 말씀해주셨을 때 보려고 기억했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첫째날에 편성되어 있어서.. 이후에 또 재방이라든지 해서 다시보기가 가능했는지는 모르지만, 여튼 제가 정신을 차린 게 둘째날이라 못..( '') 뭐 이게 자랑은 아니고 하고싶은 말도 아니고.. 제가 하고싶은 말은요, 첫번째 사진 엄청 좋아요. 말이 사람 밟고(자세히보니까 말도 밟힌 ㅠㅠ) 그래서 좋은 거 아닙니다..활력이 느껴지고 뿌연 게 뭔가 역동성이 느껴져서요. 하지만 역시 저는 저 작품을 못볼 거예요, 아마도. 저는 경기시키고 경주하고 돈걸고 스포츠하고 그런 걸 못보겠어요. 오랜만에 읽어도(요즘 좀 뜸해서) 맥거핀님 글은 글자체까지 좋네요(뭔 상관?). 뭔가 맘을 꽉꽉 채워서 가는 것처럼요.

1분만 더있음 내일입니다!

맥거핀 2013-11-04 21:56   좋아요 0 | URL
오..그래도 볼려고 했다는 얘기죠..? 좋아요, 좋아요. 위에 올린 것 말고도 몇 편 더 본 게 있어서 리뷰를 남기려고 하는데, 계속 미뤄지네요. 조금 미리미리써야 사람들에게 알리는 효과도 있고 좋을텐데...이렇게 뒤늦게 올리는 게 자기만족 외에는 무슨 효과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 '부즈카시'란 작품 참 좋았어요. 사진만 보면 엄청 격렬하게만 보이는데, 이 다큐멘터리에는 또 무척 정적인 장면들이 있거든요. 그게 멋있기도 하고, 일종의 리듬도 만들어내고 해서 꽤 좋았습니다. 사람 사는 게 참 다양하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는 저들의 삶을 보면서 뭔가 이질감을 느끼지만, 저들은 또 우리의 삶을 보면서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살까 하겠죠..

오랜만에 아이리시스님 댓글을 보니 좋아요, 좋아.

아이리시스 2013-11-05 12:44   좋아요 0 | URL
자기만족..그게 좋은 거죠.. 좋은 거예요.. 사실, 리뷰를 보고 나도 봐야지 한 적 거의 없었어요, 저는. 어차피 볼지 말지는 맘속에서 다 결정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알리는 효과, 미리 쓸 필요 없어요. 맥거핀님 리뷰는 그냥 그 자체로 좋아서 읽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다음사람1)
아..그러니까 빨리빨리 쓰란 말입니다..네? 왜 늦어요, 방송정보를 알려주고 올렸어야죠, 이렇게 뒤늦게 올리시면 자기만족 외에 우리는 얻는 효과가 뭐가 있어요. 봤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그러지마요, 우리집에도 TV 있어요.

(다음사람2)
써준 것도 감사하지 무슨 자기 못봤다고 빨리 올리라느니 효과가 없다느니 차라리 읽지 마세요. 님 같은 사람들은 봐도좋을 작품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사람3)
힘들어서 기권



(돌아온 아이리시스) 맛난 점심 드세요!

맥거핀 2013-11-06 18:32   좋아요 0 | URL
어..(다음 사람1)이 제일 좋은데요. 저는 변태인가 봐요. 갈구는 게 좋아요. 하긴 이런 다큐는 사실 때 지나면 못보는 경우가 많아서 보고 다음날 바로 올린다해도 별 의미가 없겠죠. 그저 자기만족만 해도 다행이죠. 요즘에는 자기만족도 안되는 글들도 많아서..

아이리시스님 저녁 잘 챙겨드세요!! (비오는 날에는 늘 술이 땡기는데 그래도 밥을 먹어야겠죠.)

2013-11-09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0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